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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향한 투쟁, 기자 리영희의 불퇴전의 삶.

Written by leejeonghwan

August 19, 2017

“리영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리영희가 있는 것이다.”

(녹색평론 2016년 3‧4월호 기고입니다. 녹색평론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전도서 1장9절)”. 기자는 정말 괴로운 직업이다. 퇴근을 하고 나서도 다음날 뭘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밤새 꿈에서 기사를 쓰다 멍한 머리로 깰 때도 많다. 어느 한 순간도 마음 편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자나 깨나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게 늘 취재고 업무의 연장이지만 새로운 뭔가를 찾는 건 언제나 바닥까지 한계를 드러내면서 영혼을 쥐어짜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래야 겨우 좋은 기사가 나온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1월 ‘뉴스를 넘어 저널리즘의 미래를 묻는다’는 제목으로 미디어 컨퍼런스를 진행했다. 미첼 스티븐스 미국 뉴욕대 교수의 ‘비욘드 뉴스’가 기초 교재였다. 스티븐스 교수는 미디어오늘(박상현 베이클라우드 이사 대담)과 인터뷰에서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식의 보도로는 충분치 않다”면서 “단순히 새로운 사실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언론에 미래가 없다”고 강조했다. “상식과 편견에 도전하고 맥락을 짚는 ‘지혜의 저널리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사실 기자들이 괴로운 건 기자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이들이 너무 많은 기사를 쏟아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인터넷 신문이 5000개가 넘고 포털 사이트 네이버 다음 등과 제휴를 맺고 있는 언론사가 400여개, 이들이 만들어 내는 기사가 하루 2만건이 넘는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기사는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다. 경쟁력 없는 기사는 유통기한도 매우 짧다.

스티븐스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리영희 선생이 생각났다. 리영희 선생이 한겨레에서 수습기자들 대상으로 특강을 하면서 “내가 외무부를 출입하던 시절, 부장이 기사거리가 없다고 하면 왼쪽 주머니에서 취재수첩을 꺼내도 1면 톱, 뒷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도 1면 톱이었다”고 자랑했다는 게 기자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선배 기자라고 부르기에는 까마득하지만 리영희 선생만큼 통찰과 혜안을 갖춘 기자는 리영희 전으로도 후로도 없다.

기자는 글로 말한다. 최용묵 성공회대 교수가 쓴 ‘비판과 정명’은 기자 리영희를 그의 글로 이해하기 위한 방대한 작업의 결과다. 리영희가 쓴 글도 많고 리영희에 대한 글도 많지만 그가 쓴 글을 되짚어 가면서 리영희의 사상적 계보와 저널리즘 방법론을 정리한 이 책은 기자 리영희를 다시 발견하게 만든다. 기레기(기자+쓰레기의 조어)라는 자조적인 비판이 일상화된 한국 언론에 새로운 전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저널리즘 교과서 같은 책이다.

최영묵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리영희 선생은 진실을 알기 위해 공부에 헌신했고 알게 된 진실을 알리는 데 자신의 존재를 다 던졌다”고 평가한다. “취재와 공부를 통해 알게 된 지식과 정보의 집적이자 그 관계의 통찰에서 나오는 ‘총체적 앎’이 리영희 선생이 생각하는 진실이었다”는 설명이다. 리 선생은 온갖 권력의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정론직필의 기자로, 우상을 타파하고 허위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지식인으로 평생을 살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리 선생을 “뉴스타파 할아버지”고 부른다고도 한다. 과거 한 방송 인터뷰 화면 일부를 뉴스타파가 인트로 화면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킬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애국 이런 것이 아니야. 진실이야.” 리 선생은 “어둑서니는 진실의 빛을 쐬면 꺼져버린다”고 강조하곤 했다. 어둑서니(허깨비)는 있다고 생각하면 점점 커지지만 진실을 직면할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

고은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리영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리영희가 있는 것이다.” 리 선생이 평생을 바쳐 우리를 억압하는 구조와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성찰과 타파를 역설했지만 여전히 우리가 같은 우상을 두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2009년 고별 강연에서 “이명박 통치 시대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반인권적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면서 “우리가 이룩했던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불퇴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리 선생의 통찰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도 놀랍다. 리 선생은 베트남 전쟁이 단순히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주의 대 제국주의, 독립투쟁 대 식민주의, 혁명 대 반혁명, 통일 대 분열, 독립 대 의존, 인권 대 종료, 자유 대 억압의 갈등이 빚은 전쟁으로 보고 “20세기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평가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은 5만 명의 병력을 파병한 ‘교전 당사국’이었다.

리 선생은 “베트남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과 눈물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잠자리에 든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 외신기자 리영희가 집요하게 매달렸던 건 냉전 시대 폐색 상황이 강요하는 지적 불구화와 사상적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필사적인 고투였고 그 덕분에 한국 사회는 적어도 정신적인 호흡 정치 상태를 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리 선생은 ‘민족주의자’라고 불리는 걸 싫어했지만 ‘민족’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주의’에 대한 거부감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최 교수는 이를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이념이나 조직도 교조화되면 부패하고 본말이 전도돼 버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리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 지배를 통해 우리 민족을 ‘부정’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 ‘부정을 부정’하는 작업이 식민 잔재 청소의 기본 방향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40여년 간 주입된 식민 정신과 시스템을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 군국주의 지배 체제의 손발이 돼 밀정과 주구,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를 청산하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민족 정기를 지속적으로 말살해 왔고 일재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자리에 친미 반공주의가 들어와 우리를 식민지 시대처럼 옥죄고 있다는 게 리 선생의 문제의식이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해방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에 힘입어 ‘정치적 노비 문서를 소각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식민 체제와 단절이 더 어려웠고 그 극복이 더욱 절박했던 것이다.” 리 선생은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우거나 독립기념관을 짓는 것과 같은 보여주기 위한 쇼로 극일(克日)이 될 리 없다”고 준엄한 비판을 토해 냈다. “차원 낮은 민족 감정을 애국심으로 착각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반전 평화에 대한 글도 여전히 강한 울림을 갖는다. 리 선생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반공주의를 유일한 국가생존의 이데올로기로 내세우며 미국과의 혈맹관계가 영원한 형제애로 지속될 것이라는 사고는 너무나도 단선적이고 불모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핵심은 한 국가의 독립과 영토적 보전을 보장하는 최후의 물리적 힘인 군대와 작전권이 헌법상 원수에 있지 않고 다른 나라의 현지 사령관에게 장악돼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리 선생은 2006년에 출간한 ‘21세기 아침의 사색’에서 휴전 이후 남에서 북으로 올려보낸 파괴납치 공작원이 1만4000명이나 된다는 충격적인 자료를 공개한다. “이 가운데 남쪽으로 돌아오지 않았거나 돌아오지 못한 숫자는 정확히 7662명이다. 국방부가 이들의 위패를 비밀리에 간직하고 있어 일절 공지된 적 없으나 목적을 달성했거나 달성하지 못했거나 갔다 돌아온 숫자가 얼마인지 확실치 않지만 하여튼 돌아오지 못한 숫자가 7662명이다.”

리 선생은 책상머리에서 글을 쓰는 백면서생이 아니었다. 기자 시절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대사관 공보처와 도서실을 순례하면서 신간과 논문, 잡지 등을 읽고 복사하고 꼼꼼히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외무부 출입기자 시절, 외무부 관료들이 연구 주제를 받아 자료실에 가보면 이미 리영희 기자가 1주일 전에 대출해 간 기록이 있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노란 봉투를 끈으로 묶어 국내에서 최초로 스크랩북을 만들어 쓴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미리 연구하고 조사해서 90% 취재를 마쳐놓지 않은 것은 취재원에게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대뜸 문 두드리고 들어가서 오늘 무슨 일 없느냐고 물어보는 식의 취재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남은 10%에 대한 확인을 위해 취재원들에게 예스냐 노냐의 대답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이런 연구 습관 덕분에 언제든지 톱으로 쓸 수 있는 기사를 예비로 갖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왕성하게 글을 쓰던 1995년, 월간 말과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다.

리 선생은 남보다 세 배 더 열심히 공부한다는 생활 목표를 세우고 대체로 지켜왔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에 배운 게 없는 만큼(선생은 공고를 나와 해양대를 졸업했다) 남들보다 훨씬 더 공부해야 나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는 그만큼 가치도 없어요. 남이 구하지 못하는 자료, 접하기 힘든 자료를 구해야 하는데 그게 엄청나게 힘듭니다. 정작 구하고 나서도 노력의 양에 비해 쓸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미국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사작전을 지휘했다는 의혹을 두고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국 대사와 논쟁을 벌였던 일화도 흥미롭다. 1980년 5월 미국의 항공모함이 부산에 정박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광주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게 미국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리 선생은 “박정희 정권이 특전사 부대 20사단을 한미연합사령부 작전 통제권 밖으로 빼내간 사실을 정말 몰랐느냐”고 다그친다.

리영희 “한국 정부가 20사단 이동을 통지할 때 북한의 공격이 있었는가. 그들이 남한의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승인했는가.”
릴리 “한국 내부 문제에 대해 충고는 할 수 있지만 명령을 할 수는 없다.”
리영희 “한국에 대해 명령과 동일한 효과를 갖는 각종 압력으로 명령을 대신한 일은 없나. 왜 하필 광주 학살 행위에 대해서만 제재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가.”
릴리 “항공모함이 부산에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광주 사태와 관련이 없다.”
리영희 “미국과 이익 체계로 연결된 약소국가에서 정변을 시도하거나 계획하거나 진행 중일 때 미국의 군사력이 바로 그 지역 또는 부근에서 시위행동을 하지 않은 예를 나는 알지 못한다.”

리 선생의 통찰은 방대한 학습과 면밀한 취재에서 나왔다. 리 선생은 일찌감치 북핵 위기를 예견해 “무지란 핵 기술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땅에 남의 핵 무기가 들어와 있으면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무식함”이라고 비판하곤 했다. 2016년 2월, 한국 사회가 북한의 핵 실험과 미국의 사드 배치, 중국의 교전 위협으로 일촉즉발의 위기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리 선생의 통찰과 혜안이 더욱 절실하다.

리 선생은 “휴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바꾸고 미군을 철수했다면 북한이 구태여 핵 무장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고 진단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고 적대관계를 선린관계 내지 일반적 국가관계로 해소·발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 북방 3국 군사 동맹체의 일방적 해체와 그로 말미암은 핵 우산의 상실, 미국의 남북한 교차 승인 거부, 대북한 전쟁 위협 속에서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핵과 미사일 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리 선생은 “북핵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핵 협상 약속 파기 문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핵 개발은 남한의 핵 문제와 무관하지 않고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 공격 시도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다. 리 선생에 따르면 1945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 군부가 핵 폭탄 사용을 결정했거나 구상, 협박 또는 준비한 일이 26회나 있었다. 이 가운데 한반도가 목표가 됐던 게 5회나 된다.

리 선생은 “미국 군부의 관심은 북핵 제거가 아니라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있다”면서 “단독 패권 체제 속에서 북한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세력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은 관계 개선을 원하지만 미국은 북한과의 평화 공존을 원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리 선생은 “북한의 지도자 집단을 예측불허의 광인 집단으로 단정·경멸하는 미국 군부와 한국인의 일반적인 인식 착오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용묵 교수는 “리 선생이 생각하는 우상은 체제와 구조였고 그 체제의 작용으로 인한 우리의 생각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리 선생의 글은 이 생각 없음을 생각하게 하기 위한 고투였다”는 분석이다. 최 교수는 “우리가 21세기에도 리 선생을 계속 호출해야 하는 이유는 그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 없음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극복하는 일이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리 선생은 어둑시니들이 진실에 다가서려는 이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고 우상을 깨뜨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최용묵 교수의 설명을 다시 인용한다. “리 선생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조건반사적인 토끼가 돼 버린 인간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고 허위란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부정된 진리를 회복하는 일이며 결국 휴머니즘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 책의 제목 ‘비판과 정명’은 리 선생의 삶을 밀도있게 압축한다. 비판(批判)이 우상의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이라면 정명(定名)은 사물과 사상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비판은 인식과 글쓰기의 밑바탕이고 정명은 글쓰기와 사회적 실천을 연결하는 고리다. 리 선생은 우상과 권력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돌파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고 언론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했다.

리 선생은 평생 말과 글을 통해 정명을 실천했다. 최용묵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리 선생의 정명은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사물의 이름을 바로 알기 위한 공부와 탐구 단계다. 둘째, 사물의 이름을 바로 잡기 위한 취재와 글쓰기 단계다. 그릇된 언어와 언설의 실상을 파악하고 말과 글을 통해 알리는 일이다. 셋째, 말의 오남용과 허위의식을 유포하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드러내고 바로잡는 실천 단계다.

우리는 여전히 리영희의 시대를 살고 있다. 최 교수가 리 선생을 ‘오래된 미래’라고 규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부단한 성찰로 자신의 주어진 조건을 회의하고 극복해야만 모든 인연과 조직, 집단,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 과정을 거쳐 자유인이 됐을 때 비로소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구애됨 없이 각 주장과 이해가 교차하는 경계에서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본질, 진리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게 리 선생의 신념이었다.”

기자들이 괴로워하는 건 사실의 외피를 좇으면서 사실 너머의 진실을 파고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보도는 여전히 기사의 핵심이지만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라는 게 리영희 선생의 글이 웅변한다. 언론이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는 건 기자들의 공부가 얕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구조와 권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고 지적 사상적 아집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자들은 그동안 주관적인 판단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 전달에 집중하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용묵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진실은 사실의 덩어리가 아니다. 그리고 기자들은 종종 객관성의 가면에 숨어 주관을 은폐하곤 한다. 사실을 선택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주관이 배제될 수 없고 객관을 가장한 주관이 오히려 위험하다는 걸 기자들은 잘 알고 있다.

스티븐스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그리고 리영희 선생이 평생 말과 글로 펼쳐 보인 것처럼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상과 허위의식을 깨뜨리고 실체적 진실을 파고드는 것이다. 사실 확인이 취재의 기본이지만 사실을 엮는 맥락을 읽고 체제와 구조를 극복해야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은 여전히 저널리즘의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리영희를 거듭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

비판과 정명 / 최용묵 지음 / 한울아카데미 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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