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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옮길 수 있을 때 옮겨라.

Written by leejeonghwan

July 29, 2003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직장은 꿈의 무덤이다. 올해 서른인 장태만씨의 지난 몇년도 그랬다.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서류 작업과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이제 그는 아무런 기대도 없다. 장태만씨의 친구들은 그를 태만한 태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라. 그는 결코 게으른 성격은 아니다. 다만 지치고 의욕을 잃고 체념하고 있을 뿐이다.

3년 전, 스물여섯살의 그는 자신만만한 신입사원이었다. 이른바 명문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모두가 선망하는 최고의 직장이었던 은행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그는 열정에 들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자주 한다.

“야야, 은행원들 우습게 보지 마. 창구에 앉아서 돈 계산이나 하고 있으니까 한심해 보이지? 그건 은행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스펙타클하고 사람 사는 재미가 넘치는 곳인가 너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아마도 지나간 과거는 오지 않은 미래 만큼이나 왜곡되고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퇴근하고 나서 동료들과 맥주를 기울이던 기억이나 월말 마감을 앞두고 밤샘을 하던 기억, 실적 목표를 맞추려고 여기저기 조바심 내며 뛰어다니던 기억. 그리고 그는 거기서 첫 사랑을 만났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 남은 첫 직장의 열정은 첫 사랑의 기대와 설레임만큼이나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는 사실 대학교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다. 은행 일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평생 머물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그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더 신나는 일을 하고 더 유명해지고 더 성공하고 출세하고 싶었다. 스스로를 머리좋고 학벌좋고 재능있고 전도유망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던 장태만씨는 직장 동료들 몰래 언론사 시험을 준비했고 그해 가을 신문사 수습기자 공개채용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때 은행을 떠난 게 잘한 일인가 아직도 확신은 없다. 다만 그는 부족한 무엇인가를 찾아 떠났고 아직 그 무엇인가를 찾지 못했다.

수습기자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달펐다. 수습기간이 끝나면 연봉 3천만원 정도를 받는다지만 그때까지는 50만원의 활동비로 버텨야 한다. 처음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하면 경찰서 취재를 맡아야 한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서 관할 경찰서를 돌아다니면서 사건을 살펴보고 두시간 마다 한번씩 선배들에게 보고를 해야한다. 선배의 지시에 따라 상가집도 가봐야 하고 영안실에 가서 시체도 살펴봐야 한다. 힘든만큼 재미도 있었지만 한달에 택시비만 100만원, 전화비도 50만원 가까이 나왔다. 매일 같이 새벽 두시에 잠들어 다섯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6개월 가까이 하고 나니 은행 다닐 때 벌어둔 저축도 거의 다 바닥이 났다.

6개월의 힘겨운 수습기자 생활을 마치고 난 장태만씨는 경제부에 배속됐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경제부 기자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무엇인가 아쉬웠다. 몇달 뒤 그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신문사를 그만뒀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다. 마침 한참 잘나가던 대기업 종합상사에서 신입사원 공개채용을 했다. 그래서 한번 더 회사를 옮기기로 했다. 오대양육대주를 넘나들면서 돈뭉치를 져 나르는 종합상사는 못다 이룬 야망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험은 거뜬히 합격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퇴근 길에 직장 선후배들과 왁자지껄 소주를 걸치는 재미를 빼면 종합상사의 일은 따분하기만 했다. 서류와 서류와 서류와 서류와 서류. 기안과 결재와 무의미한 회의. 틀에 박힌 선배들과 상사들. 평생을 여기서 썩을 수는 없다!!!

장태만씨는 그때부터 이미 무언가 꼬이고 있다는 조바심에 시달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벌써 2년 가까이 지났지만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옮겨다닌 직장도 벌써 세번째다. 돈도 거의 모으지 못했다. 열정을 잃으니 일도 재미없고 그만큼 성과도 형편없었다.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회사에서 천덕꾸러기에 사고뭉치, 투덜이였다. 퇴근 시간과 주말을 기다리면서 버티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이대로 젊음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 장태만씨는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회사를 옮기기로 한다.

장태만씨는 그렇게 두번 회사를 더 옮겨 지금은 조그만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한때는 어디든 시험만 치면 합격할 자신감도 있었고 그만큼 오라는 데도 많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싫증이 나면 사표를 툭 내던지고 새로운 직장으로 훌쩍 옮겨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옮겨갈 데가 없다. 일에서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하고 소모적이라고 느끼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벼랑끝에 선 느낌이다.

그는 이제 적당히 퇴폐적이고 적당히 염세적이다. 욕심도 없고 그날 그날을 고집스럽게 버텨갈 뿐이다. 여기, 장태만씨가 말하는 직장을 옮기는 10가지 원칙이 있다.

1. 사람을 보고 옮기지 마라. (외부에서 볼 땐 그렇게 성격 좋았던 그 사람이 같은 조직에서 일하는 순간부터 끔찍해 질 수 있다.)
2. 조직을 보고 옮겨라. (시스템이 잘 돼 있는 직장과 그렇지 않은 직장은 완연히 다르다. 1과도 일맥상통한다.)
3. 돈이든, 재미든, 하나라도 더 나은 직장으로 가라. (사람은 본전생각이 강한 동물이다. 대부분의 여건이 전직장에 비해 안 좋다면, 심리적으로 굉장한 타격을 받는다.)
4. 이직을 하기 전에 새 직장쪽과 완벽하게 근무조건에 대해 합의를 봐라. (막상 무작정 옮기고 보면, 대우조건이 그 전에 얼핏 보장받았던 내용과 다른 경우가 많다.)
5. 옮기기 전에 그 회사의 간부급, 사원급, 중간계층 등의 사람을 골고루 만나봐라. (새 직장에 대한 취재는 필수적이다. 다만 그 사람들이 거짓을 말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6. 섣불리 옮기지 마라. (“이 상승장에 나만 주식투자에서 빠져있군. 아무거나 사야겠다.” 그러면 다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분석을 하든, 내부 정보를 빼내든 신중해야 한다)
7. 과감하게 옮겨라. (6과 상반되는 것같지만 사실 비슷한 내용이다. 섣불리 옮기지는 말되, 과감하게 옮기는 것이다. 타이밍을 놓치면 다시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다)
8. 이직 후엔 곧바로 적응하는 게 중요하다.(이직자들은 대개 동기가 없기 때문에, 본 모습을 보여주거나 자신의 회사생활 패턴을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다. 동기가 있다면 이런 문제는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9. 직장을 옮긴 뒤 아니다 싶으면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낫다. (대략 한 달 정도 지난 뒤의 감(感)이면 믿어도 좋을 듯하다)
10. 막상 옮기도 나서 실수라고 생각하지만 갈 곳이 없다. 그러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엔 취미 등 다른 꺼리를 만들어야 한다.)

직장은 얼마든지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옮겨갈 수 있을 때는 당신이 가격 대비 품질을 갖춘 20대의 마지막 몇년뿐이다. 조금 더 지나면 당신은 너무 비싸거나 너무 나이를 먹는다. 마음에 드는 직장을 찾기란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지만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운도 따라야 하지만 그보다는 직접 기회를 찾아 나서야 하고 기회를 만났을 때 민첩하고 용감하고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직장은 열정의 무덤이다. 직장에 당신의 꿈을 묻지 마라. 직장 생활 2년차, 마음에 안드는 직장이라면 빨리 그만 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봐라. 경력을 발판 삼아 껑충껑충 뛰어올라갈 수 있는 직장이 아니라면,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보람도 열정도 찾을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만둬라. 직장을 고르는 일이 당신의 20대의 가장 큰 결정이라면 직장 생활 2년차에 직장을 옮기는 일은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기회다. 10년 뒤, 20년 뒤의 당신을 생각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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