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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향기’를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August 8, 2003

아무래도 이렇게 비가 많은 여름은 처음인 것 같다. 말짱하게 해가 떴다가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던 비가 뚝 그치기도 하고. 올 여름 들어 우산을 다섯개째 샀다. 오늘은 매점 언니가 아는척을 했다.

매점 언니 : “어머, 어제도 우산 사지 않았어요? 또 잃어버렸어요?”
이정환 : “아뇨. –; 집에 두고 나왔어요.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죠?”

그러나 비는 퇴근 무렵 그쳤고 결국 새로 산 우산은 그냥 가방에 넣어 왔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친구랑 영화도 봤다. 집에 돌아와서는 인터넷으로 드라마 ‘여름 향기’를 봤다. 멀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그 원칙을 확실히 지킨다. 할일이 많을수록 자꾸 딴짓을 하게 된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여름 향기’는 대충 이런 줄거리다. 혜원(손예진)은 민우(송승헌)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뛴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는데 그 심장이 민우의 죽은 옛날 애인의 심장이라서 그렇단다. 그러나 혜원에게는 이미 약혼자 정재(류진)가 있고 또 정재의 여동생 정아(한지혜)는 민우를 좋아한다. 그런데도 혜원과 민우는 사랑에 빠진다. 좀 한심한 상황이다.

이 드라마의 재미는 등장 인물들에게 좀처럼 감정 이입이 안된다는데 있다. 도대체 혜원과 민우는 상황 파악을 할줄 모른다. 운명적인 사랑에 눈이 멀었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아무래도 어딘가 어설프다. 어쩌면 저렇게 솔직하지도 당당하지도 못할까. 설레고 애틋하다기 보다는 어딘가 병약하고 자폐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열려있지 못하고 닫혀있고 어딘가 우울하고 침울하다.

민우에게 사랑하는 약혼자를 빼앗긴 정재가 그나마 좀 제 정신으로 보인다.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사람을 어떻게 돌이켜 세울 수 있을까. 정재는 혜원을 이해하는 척하면서도 괴로워하고 질투하고 또 어쩔 수 없이 오래 기다린다.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건 아닌 것 같은데 시청자들은 정재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정작 주인공들, 혜원과 민우를 미워하게 된다. 두사람은 서로에게 내게 더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감정을 너무 쉽게 드러내고 지루한 대사를 마냥 늘어놓고 게다가 시청자들의 참을성을 넘어설만큼 시간을 너무 끈다.

혜원 : 술과 사랑의 닮은 점 알아요?
민우 : 취한다!
혜원 : 내 의지대로 안된다!
민우 : 그리고 때론 용기를 내고 싶다!

혜원 : 이번엔 어 그러면 기차하고 사랑하고 닮은 점 해볼래요?
민우 : 음… 아 맞다! 때때로 이렇게 흔들린다!
혜원 : 그러네, 흔.들.린.다!

민우 : 아까 기차하고 사랑하고 닮은 점 대답 안했잖아요.
혜원 :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민우 : 그러네.

혜원 : 커피하고 사랑하고 닮은 점 알아요?
민우 : 글쎄요…
혜원 :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종류가 무지 많다.
민우 : 길들여진 입맛을 바꾸기 어렵다.
혜원 : 온도에 따라 맛이 다르지만, 뜨거운게 가장 맛있다.
민우 : 중독된다. 커피나 사랑이나 다 끊기가 어렵다.
혜원 : 철이 들어서 시작한다.
민우 : …
혜원 : 일회용도 먹을 만하다.
민우 : 비가 오면 더 생각난다.
혜원 : 분위기에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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