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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만 잡으면 된다? 삼성부터 잡아야 한다!

Written by leejeonghwan

July 10, 2014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7월호에 기고한 글을 추가 보완했습니다.)

10년 전 일이다. 나는 지금은 폐간되고 안 나오는 월간 ‘말’에 “삼성만 잡으면 된다”는 주제의 기사를 썼다. 재벌 해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대안이 아니라면 이건희 회장의 지배력을 인정해 주고 삼성그룹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딜’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고용 없는 성장과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스웨덴의 찰츠요바덴 협약을 벤치마크 모델로 제시했던 이 기사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진보진영에 사회적 대타협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뒤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이건희의 목줄을 쥐고 합의를 끌어내라고 제안했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와 삼성 비자금 특별검사 이후 어처구니 없게도 삼성은 통째로 면죄부를 받았다. 이재용 부회장의 후계 구도도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었다. 경영권은 안정됐고 이제는 누구도 감방에 갈 일이 없다. 이건희나 이재용이나 딱히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이다. 지금 이대로가 정말 좋은데 무슨 합의를 하고 무슨 타협을 하겠나.

돌아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건희의 목줄을 잡을 의지도 없었고 이건희 또한 딱히 노무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뒤이어 집권한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다. 법이 없으면 만들고 불편하면 바꾸는 게 삼성이다. 삼성이 요구하면 법이 되고 제도가 된다. 삼성이 앞장서면 다른 기업들이 따라가고 그게 경쟁의 룰이 된다. 법 위에 삼성이 있고 삼성이 정치권력을 지배한다. 삼성은 이미 통제 불가능의 절대 권력이 됐다.

1936년 스웨덴의 찰츠요바덴 협약은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의 격렬한 대립 끝에 나왔다. 동유럽의 공산화 도미노 현상에 위기의식을 느낀 자본가 계급이 산별 노조 전환 요구를 받아들였고 사회민주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연대 임금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의 근간을 만들었다. 사회적 대타협은 적당히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피나는 정치적 투쟁과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삼성으로 대변되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은 애초에 힘이 동등하지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50%가 넘고 노동조합 조직률은 10% 미만이고 그나마 산별 노조는 정치적 존재감이 크지 않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질 좋은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데 있다.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요원하고 계급은 분열돼 있고 진보정당은 색깔론 광풍으로 궤멸되다시피 한 상황이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이 주장한 한국적 사회적 대타협의 아이디어는 주주자본주의가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기업이 고용과 설비투자를 줄이면서 이익을 늘리고 그렇게 늘어난 이익이 주식시장을 통해 주주들에게 흘러나가면서 단기 실적에 치중하게 되고 고용 없는 성장이 고착된다. 기업의 이익은 늘어나지만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국가의 부가 금융시장과 해외로 빠져나간다.

다분히 몽상적인 아이디어지만 국가적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해 대기업 노동자들의 연봉을 3분의 2 정도로 깎고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봉을 두 배 가까이 올리면 어떨까. 상식적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는 기업들이 숱하게 도산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줄어든 인건비만큼 고용을 늘리고 무너진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직업훈련을 통해 좀 더 부가가치 높은 일자리로 옮겨가도록 할 수 있다.

(인건비를 깎을 수 있게 해주면 삼성이 고용을 늘릴 거라고? 만약 약속을 안 지키면 어떻게 할 건가. 이런 사회적 합의를 실제로 구동하려면 국가적 차원의 시스템 설계가 필요하다. 막연하게 기업의 선의에 기댈 게 아니라 정부가 기업들을 압박하고 추동해야 한다. 스웨덴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도는 국가가 고용을 책임지는 파격적인 실업급여와 폭넓은 사회적 임금, 그리고 국가적 차원의 직업훈련과 재취업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핵심은 경쟁력 없는 기업들이 인건비를 깎고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수명을 연장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상대적으로 삼성 같은 대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겠지만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강제하는 게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의 핵심이다. 스웨덴의 소득세 실효세율은 50%가 넘는다. 사회적 대타협까지 가지 않더라도 기업들이 세금만 제대로 내도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삼성전자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5년 평균 20.4%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15.0%로 낮아졌다가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에는 12.8%까지 낮아졌다. 애초에 세율이 낮기도 하지만 비과세·감면 혜택이 대기업들에 집중된 덕분이다. 한국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2011년 기준 15.2%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 15.7%보다 낮다. 사회보장세를 감안한 총실효세 부담률은 OECD 평균이 42.5%, 한국은 29.8%에 그쳤다.

한국 사회가 삼성과 이건희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뭘까. 영업이익의 일부분을 사회공헌기금으로 내게 해서 국가 주도의 연구개발 투자와 고용 창출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총수의 준범죄적 행위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기업의 돈을 내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반론도 있었고 근본적으로 사회적 연대와 타협이 전제되지 않은 사회공헌기금 몇 푼으로는 달라질게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나마 이런 것도 모두 10년 전에나 가능했을 아이디어다.

외국인 주주들의 압박에 시달리는 이건희를 내세워 주주자본주의와 맞서게 만들자는 발상은 참신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무망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다. 삼성은 주주자본주의와 맞서기 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결탁했다. 노동자들을 탄압하면서 주가를 끌어올렸고 주주들에게 두둑한 배당을 줬다. 이건희는 굳이 정부가 경영권을 보장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주가가 계속 오르는 동안에는 주주들이 기꺼이 그를 지지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어떤가. 지난 10년 동안 삼성전자의 매출과 주가는 다섯 배 이상 뛰어올랐는데 고용은 겨우 두 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익의 대부분은 현금으로 쌓여있거나 자사주를 사들이는 데 쏟아붓거나 주주들에게 배당으로 빠져나갔다. 삼성그룹의 매출이 국내총생산(GDP)의 23% 수준까지 불어났고 한국 경제의 의존도도 그만큼 높아졌다.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시가총액 비중도 25%에 육박한다.

사실 한국의 재벌 시스템은 애초에 주주자본주의와도 상충된다. 이건희는 그룹 계열사 전체에 걸쳐 실제로 가진 지분보다 훨씬 큰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때로는 이건희 일가의 이해관계를 반영해 주주들의 이익을 희생하기도 한다. 배임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주주들이 이건희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건 삼성의 독특한 순환출자와 분산된 지분 구조 때문에 적대적 인수합병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건희는 사회적 대타협 보다는 정부 관료와 국회의원들을 각개 포섭하고 매수해 리스크를 줄이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게 비용은 적게 들면서 효과는 확실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건희는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았지만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비난 여론이 거세도 언론이 침묵하면 공론화되지 않는다. 물밑에서 숱한 검은 거래가 이뤄지지만 국민들은 알지 못한다. 삼성전자 집단 백혈병 사태를 그렇게 오래 뭉개고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때 삼성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출자총액 제한이나 금융산업 분리 등은 몇 차례 규제 완화를 거쳐 이미 사문화된 상태다. 숨겨놨던 이건희의 차명주식들은 특검 덕분에 모두 실명 전환됐고 엄청난 상속세를 물어야겠지만 상속세를 다 내고도 이재용 왕국의 입지는 크게 흔들릴 것 같지 않다. 삼성의 목줄을 죄기는커녕 삼성이 정부의 목줄을 죄고 정책을 좌지우지한다. 지주회사 전환으로 가는 몇 가지 걸림돌이 있지만 삼성은 여유로워 보인다.

이건희는 삼성전자 지분은 5%도 안 되면서 삼성생명 고객들의 보험금으로 삼성전자를 우회 지배하면서 회장 행세를 하고 그룹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성전자의 최대주주는 7.2%의 지분을 보유한 삼성생명인데 이건희와 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지분을 각각 20.8%와 19.3%씩 보유하고 있다. 금융산업 분리 원칙에 따라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처분해야 하지만 이건희는 규제 완화를 기대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 386 참모들이 삼성경제연구소 사람들을 불러다 개인 과외를 받았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삼성에서 건넨 보고서가 버젓이 정부 정책 과제로 제목만 바꿔 채택되는 경우도 있었다. 특검 과정에서 일부 드러나긴 했지만 수많은 정부 관료와 국회의원들이 삼성에서 부정기적으로 떡값을 받으면서 삼성의 로비스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로 넘어오면서 정부와 삼성의 유착은 더욱 견고해졌다.

삼성 관계자들이 건넨 출처불명의 문건이 국회의원들 사이에 오가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특정 법안을 막으려고 로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건희와 상속권 분쟁을 벌였던 CJ 이재현 회장을 겨냥해 CJ 그룹에 유리한 방송법 개정안을 저지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실제로 단말기 유통 진흥법은 삼성의 반대로 국회에 계류돼 있다. 영리병원 도입 역시 삼성의 작품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확보한 삼성이 하나의 사회적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최근 삼성전자서비스 위장도급 논란은 단순히 이 회사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전자 집단 백혈병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명백한 불법 행위를 정부가 외면하고 방조한다. 언론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한다. 삼성이 버티면 거대한 법의 구멍이 생겨난다. 그리고 다른 기업들도 그 치외법권 지대에 안주하게 된다.

삼성은 일찌감치 복수노조 허용에 반대했고 복수노조가 허용되자 알박기 노조를 내세워 단체협약을 방해하고 있다. 그룹 차원의 노조 대책 문건이 공개돼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수사도 이뤄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로 노조 결성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는 폭로가 쏟아지고 있다. 삼성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건 정부가 쉽게 삼성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서비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삼성전자 집단 백혈병 사태를 명확히 규명하지 않고 한국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할 수 없다. 삼성에 노조가 들어서고 삼성의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해 이건희 일가의 전횡을 견제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한국의 기업들이 노조를 두려워하고 노조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삼성을 잡아야 한국 경제를 바꿀 수 있다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장하준 교수는 최근에도 필요하면 삼성법이라도 만들어 금산분리를 예외 적용하자는 주장을 했는데 여전히 드는 의문은 이건희 왕국의 3세 승계를 묵인하는 대가로 한국 사회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실하다는 데 있다. 그나마 이건희가 삼성을 지배하니까 장기 투자가 가능했다, 이건희의 대안은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는 뜨내기 주주들 뿐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건희에게 맡겨두는 게 한국 경제에 유리하다는 이야기 뿐이다.)

(나는 장 교수의 학문적 성과를 높이 평가하지만 과연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이 이건희 밖에 없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결국 한국 경제가 단기실적주의에 매몰돼 성장이 멈추는 걸 막으려면 이건희 일가의 불법과 전횡을 묵인할 수도 있다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삼성=한국 경제라는 도식도 지나친 비약이지만 도대체 한국 경제가 이건희와 이재용의 오너 정신에 고용과 투자를 의존해야 할 만큼 그렇게 취약하다는 말인가.)

이건희의 약점은 여전히 많다. 과거의 죄를 묻기는 어렵겠지만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금융·산업 분리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하고 부당 내부거래를 철저하게 규제하면 이재용이 이건희 왕국을 그대로 물려받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부터라도 과도한 비과세·감면을 정리하고 부당 노동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면 삼성전자의 이익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혜를 거두고 원칙을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이건희 왕국은 크게 흔들리거나 무너지게 된다.

한국 사회는 이건희 왕국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있다. 이건희나 이재용에게 사회적 대타협 따위를 기대하기 보다는 불법과 부정으로 세운 그들의 왕국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특혜를 남발하면서 가망 없는 삼성의 선의에 목매기 보다는 삼성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삼성을 버릴 각오를 해야 삼성을 넘어설 수 있고 삼성을 넘어서야 그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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