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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수신료 납부 거부 사건’.

Written by leejeonghwan

December 13, 2013

KBS 이사회가 지난 10일 TV 수신료를 월 2500원에서 4000원으로 인상하는 안건을 강행 처리한 가운데 TV 수신료 납부 거부를 주제로 한 독립영화가 뒤늦게 눈길을 끌고 있다. 인형민 감독의 2008년 단편영화 ‘수신료 납부 거부 사건’이다.


만화가 지망생 정화는 거래하던 출판사가 부도나 밀린 원고료를 받지 못하자 닫힌 문 앞에 놓여있던 낡은 TV 수상기를 들고 온다. 그런데 정작 정화의 집에는 TV 안테나 연결 단자가 들어와 있지 않다. 난감해 하던 정화는 그동안 집에 TV도 없는데 TV 수신료가 전기요금에 포함돼 6개월이나 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분노한다.

정화가 한국전력에 전화를 걸어 따지자 상담원이 말한다.

“시청자님, 현 시점부터 조치를 해드릴 수 있지만 지난 수신료 환급은 어려운 부분이니 시청자분의 넓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정화가 “멋대로 세금을 매겨놓고 환불이 안 된다뇨? 1만5000원이면 만화책이 5권인데”라고 따지자 상담원이 “네, 시청자님, 방송법 시행령에 따르면…”이라고 말을 자른다.

정화는 “저 시청자 아니거든요?”라며 반발하지만 “시청자님 댁에 TV가 없다는 걸 확인해야 한다”면서 “저희쪽 담당자가 방문할 테니 전기 안전점검도 받으시라”는 말에 아연실색한다.

며칠 뒤 전기 검침원이 들이닥치자 정화는 부랴부랴 TV를 숨긴다. 둘의 대화가 TV 수신료 인상을 둘러싼 논란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낸다.

검침원 : “TV 안 보면 안 심심해요?”
정화 : “안테나 꽂는 데가 없어요.”
검침원 : “아니 그러면 안테나를 꼽든가 케이블을 연결하든가.”
정화 : “TV 사고 수신료 내고 거기다 돈을 더 내라는 말씀이신데…”
검침원 :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거 아니에요?”
정화 : “물 팔아 장사할 사람이 파야죠.”
검침원 : “사람이 참 힘들게 산다.”
정화 : “제가 억울한 건 딱 질색이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월 2500원은 큰돈이 아니겠지만 일자리를 잃고 방 월세도 못 내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정화 입장에서는 결코 푼돈이라고 할 수 없다. KBS는 그동안 방송이 안 나오면 케이블이나 IPTV나 위성방송이나 유료방송에 가입하면 된다고 말해 왔다. 정화는 케이블을 다는 데 돈을 더 쓰고 싶지도 않고 정 안 되면 TV를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TV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TV 있다고 다 방송 보는 건 아니라는 정화의 항변은 타당하다.

정화 : “말이 나와서 말인데 TV 있다고 무조건 수신료 내는 거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검침원 : “방송법 64조. TV 수상기를 소유한 자는 그 수상기를 등록하고 수신료를 납부한다. 법이 그런 걸~.”
정화 : “아니. 칼 들었다고 다 강도도 아니고. TV 있다고 다 방송 보는 거 아니잖아요.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인두세를 매겨요?”
검침원 : “TV도 없는 양반이 뭘 그렇게 열을 내고 그러세요.”
정화 : “그러니깐요.”

다행히 검침원이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정화가 창틀에 올려놓은 TV를 꺼내는 순간 창밖의 검침원과 눈이 마주친다. 정화는 TV를 들고 뛰기 시작한다. 정화는 결국 붙잡힌다.

정화 : “아저씨, 제 사정 잘 아시잖아요. 저는 TV를 보고 싶어도 TV를 못 봐요. 근데 수신료 내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방송법은 TV를 보거나 안 보거나 TV 수상기를 보유하고 있으면 수신료를 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화처럼 지상파 방송을 직접 수신할 환경이 안 되고 유료방송에 가입할 여력도 안 되면 수신료를 내거나 TV 수상기를 버리는 수밖에 없다. TV 수상기를 비디오나 DVD 감상용으로만 쓴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검침원 :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아, 테레비~ 볼 거야?”
정화 : “천만에요. 팔 거에요! 팔면 되는 거 아니에요?”
검침원 : “뭐 그러시든지 다들 이해 안 되고 억울해도 그렇게 살아갑디다. 요 밑에 전파상 있더만. 지금 팔 거지? 나 이거 영수증 갖고 가야 돼. 퇴근 시간 다 됐으니까 빨리 와.”

이 영화의 뒷부분은 그냥 사족이지만 재미있다. 검침원은 들고 가던 TV를 실수로 떨어뜨려 망가뜨리고 현금으로 내놓으라는 정화의 성화에 며칠 뒤 집에 있던 TV를 보내준다. 카메라가 TV를 클로즈업하는 순간 “방송의 날 친절 베스트 상”이라는 스티커가 화면에 들어온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정화가 그 TV를 들고 고물상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정화는 왜 TV를 팔 수밖에 없었을까. 흔히 지상파 방송을 무료 보편적 서비스라고 하지만 정화에게는 TV를 소유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2008년 영화고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 전환 이전이라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정화가 정말 TV를 보고 싶었다면 실내 또는 실외 안테나를 달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 나온 정화의 동네처럼 주택가가 밀집된 지역에서는 웬만한 안테나로 직접 수신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저가형 케이블 방송에 가입한다고 하더라도 수신료 2500원에 케이블 수신료로 최소 3000원을 더 내야 한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을 받아 수신료를 면제 받는 방법도 있지만 정화처럼 20대 대졸 백수들은 선정되기가 쉽지 않다. 영화 중간에 정화가 PC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정화 입장에서는 TV를 팔고 적당히 인터넷으로 보거나 결합상품으로 IPTV에 가입하는 게 훨씬 더 이익이라는 계산이 된다.

최근 한 토론회에서 조준상 공공미디어연구소 소장은 “누가 수신료도 내면서 유료방송에도 가입하는 이중부담의 전면화에 동의할 수 있겠느냐”면서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정보기관들의 선거 개입 작태에 대해 집권세력을 비호하며 침묵하고 축소하며 호도하는 보도행태를 보며 굳이 수신료 제도를 유지해야 하느냐는 회의가 널리 퍼져가고 있기도 있다”고 지적했다. 조 소장은 “공영방송의 재원과 거버넌스와 인프라를 구분해서 접근하자고 주장해 왔지만 이 세 가지는 밀접히 연결돼 있고, 병행해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조 소장은 “불행하게도 제작 자율성을 포함한 거버넌스는 나아지지 않고 저널리즘은 땅에 처박혔는데도 ‘우리는 공정하다’는 궤변과 함께 재원이 어렵다면서 울부짖는 기괴한 장면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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