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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격노, 주식 한 주도 없는 이건희의 리모콘 경영.

Written by leejeonghwan

August 3, 2013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격노했다는 일련의 기사들은 뭔가 이상하다. 이 회장이 격노하는 장면을 본 기자는 아무도 없다.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진노했다”는 표현을 쓴 신문들도 있다. 이 회장은 지난달 30일 울산 SMP 폴리실리콘 공사장에서 삼성엔지니어링이 시공 중인 물탱크가 터지면서 3명이 숨지고 12명이 다친 지난달 26일 사고와 관련, 책임을 물어 박기석 삼성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을 전격 경질했다.


연합뉴스를 비롯해 주요 언론은 2일 “이 회장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후진적인 환경안전 사고는 근절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삼성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남의 회사 말하듯 하는 이 회장의 격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을 연상시킨다. 이 회장은 말 한 마디로 사장의 목을 칠 수 있는 최고 의사결정권자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격노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월급쟁이 사장이다.

이 회장의 격노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 회장은 지난 2011년 삼성테크윈의 내부 비리와 관련해서도 격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이 보도한 삼성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어떻게 삼성 내부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삼성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문화가 훼손됐다, 부정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격노했다. 이때도 오창석 사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사표를 냈지만 사실상의 경질이었다.

지난해 3월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전자 수원 사업장에 현장조사를 나왔는데 임직원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한 혐의로 4억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도 이 회장은 격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이 회장이 관련 내용을 보고받고 크게 화를 냈다”면서 “강한 질책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 신문은 “정도 경영 그토록 강조했는데…”라는 확인되지 않은 이 회장의 발언을 제목으로 뽑아 올리기도 했다.

격노는 몹시 분하고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는 말이다. 진노는 성을 내며 노여워한다는 말이다. 모두 객관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 회장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그가 몹시 분한지 아닌지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안 올랐는지 언론은 알 수가 없고 그걸 판단해서도 안 된다. “강하게 질책했다”는 정도로 쓰면 충분할 텐데 굳이 격노나 진노라고 쓰는 건 그렇게 해야 이 회장의 의중이 제대로 전달된다고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회장의 격노는 지난달 30일의 일이다. 언론 보도는 이틀 뒤인 1일에 나왔다. 기자들은 이 회장 주재의 회의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이 회장이 격노했다는 기사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삼성그룹 홍보팀에서 흘려줬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격노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내부 판단이 있었을 것이고 언론이 충실하게 이를 반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언론의 삼성 관련 보도는 영국의 왕실 보도를 연상시킨다. 이 회장이 출국할 때나 입국할 때, 어쩌다 출근할 때마다 기자들이 따라 붙어 한 마디 한 마디를 기사로 만든다. 이 회장이 차를 바꿨다거나 누구를 만났다거나 딸들과 손을 잡고 행사장에 나타났다거나 이런 보도에는 아무런 관점도 없다. 맥락도 살피지 않는다.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하고 인용하고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언론이 간과하고 있는 더 중요한 지점은 과연 이 회장이 삼성엔지니어링의 사장을 경질할만한 위치에 있느냐, 그럴 자격이 있느냐다. 삼성엔지니어링의 최대 주주는 제일모직이다. 13.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SDI가 5.1%, 삼성화재해상보험이 1.1% 등 특수관계인 지분이 19.4%에 이른다. 이 회장이 직접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단 한 주도 없다. 이 회장은 회장이라고 불리지만 삼성전자는 물론이고 삼성엔지니어링 등과 아무런 법적 관계가 없다.

삼성엔지니어링의 최대주주 제일모직의 최대주주는 9.8%를 보유한 국민연금공단인데 2대주주인 삼성카드와 삼성자산운용 등 삼성그룹 관련 지분을 모두 더하면 12.2%가 된다. 삼성카드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이 각각 37.5%와 28.0%씩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그룹 관련 지분이 71.6%나 된다. 역시 이 회장의 지분은 단 한 주도 없지만 삼성에버랜드를 통해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지배하고 그룹 전체를 리모트 콘트롤하고 있다.

상법에 따르면 이사의 해임은 주주총회에서 주주 과반수 출석에 출석 주주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특별결의 사안이다. 언론에서 “삼성그룹은 박기석 사장을 경질하고 후임에 박중흠 운영총괄 부사장을 내정했다고 밝혔다”고 보도하면서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주식회사의 대표이사를 경질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놀랍지만 이런 사실을 언론에 당당하게 공표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삼성엔지니어링은 주주총회 등 절차가 필요해 박중흠 후임 사장 선임에 40여일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박기성 사장은 해임 보다는 스스로 사직하는 형태로 물러날 가능성이 크다. 이 회장의 한 마디에 모든 게 결정된 상태에서 요식적인 절차를 밟는다는 이야기다. 삼성그룹 지분 19.4%를 뺀 나머지 80.6%의 주주들은 결론이 정해진 주주총회에 들러리를 서게 된다. 구호로만 떠돌던 경제 민주화의 참담한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이 회장이 격노했다던 지난달 30일 업무 보고 자리는 이 회장의 올해 들어 일곱 번째 출근이었다. 6월4일 이후 56일 만이다. 이 회장은 지난 6월20일 출국해 일본과 유럽을 오가며 해외에 머물다 37일 만인 지난달 27일 귀국했다. 이 회장의 자산은 130억 달러로 세계 부자 순위 69위다. 삼성그룹에서 공식적인 직책은 없다. 연봉은 0원이지만 삼성전자에서 받는 배당만 지난해 375억원, 주가 상승으로 지난해에만 자산이 2조3700억원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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