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혁명 지도자 와엘 고님, 미완의 혁명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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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가에 대해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서는 동의를 끌어내지 못했죠. 혁명 때 힘을 합쳤던 사람들이 분파로 쪼개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중요한 게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양극화, 이데올로기의 싸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민주주의나 정치는 수단일 뿐, 우리의 목적은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니까요.”

와엘 고님(Wael Ghonim), 300만명의 페이스북 추종자들을 거느린 이집트 혁명 전사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지나치게 조심스럽다는 인상이 들었다. 애초에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생경하게 들리기도 했다. 이 나라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아직도 폭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다. 1987년 민주화 이후 2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경제 민주화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나라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사회적 합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30년 장기 집권을 했던 호스니 무바라크를 끌어내린 이집트 시위는 칼레드 사이드라는 한 청년의 죽음에서 비롯했다. 우리나라에서 박종철 열사 고문 치사 사건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것과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2010년 6월, 카페에 앉아있던 스물아홉살 청년 칼레드 사이드는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하고 숨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지만 무바라크의 권세에 눌려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무바라크가 대통령이었습니다. 칼레드 사이드가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사진을 본 순간, 극한의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정하고 부당한지 직접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리 모두 끔찍하게 살해될 수 있고 누구도 이런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하게 됐죠. 그래서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게 됐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모두 칼레드 사이드다”라는 메시지가 강한 울림을 전파했다. 몇 분만에 300명이 글을 남겼고 사흘 만에 10만명을 넘어섰다. 고님은 그러나 “우리는 모두 좌절감과 분노를 느꼈지만 그 누구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고님은 “이집트 혁명을 페이스북 혁명이라고 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테크놀로지는 도구일 뿐이고 인터넷이 없을 때도 혁명은 있었다”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시위를 계획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칼레드 사이드의 죽음에 분노한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위험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온라인에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죠.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뭐라고 한 마디씩 쓴 메시지를 들고 사진을 찍어서 모아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소극적인 저항이었지만 반향은 컸다. 처음에는 다들 눈치를 봤지만 며칠 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사진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실명을 내걸고 직설적인 비판을 쏟아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리고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검은 옷을 입고 광장에 나가 5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시위였지만 다들 가만히 서 있기만 했기 때문에 경찰도 체포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남긴 댓글을 읽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페이지를 몰랐을 때가 더 행복했다. 진실을 알고 나서 더 큰 좌절감을 느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데 무기력함을 느낀다.’ 저도 그랬습니다. 부정부패와 독재, 선거조작 등의 동영상을 올리고 공유하고 있었지만 좌절감을 심어주고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진실을 모를 때가 나았다고 말하는 것이죠.”

구글 직원이었던 고님은 익명으로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했다. 순교자라는 의미로 엘 샤히드라는 가명을 썼는데 구글의 동료 직원들조차 그의 실체를 몰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온라인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데 그쳤지만 2011년 1월4일 튀니지에서 혁명이 성공한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이벤트 페이지를 만들고 1월25일 오프라인 시위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순식간에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10만명으로 불어났다.

그날 오후 한 장의 사진이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선 한 남자. 1989년 중국 톈안먼 사건 때 탱크를 막아섰던 이른 바 ‘탱크 맨’을 떠올리는 이 남자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고 “죽어도 좋다,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날 저녁 무바라크는 인터넷을 끊었고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거리에 나섰던 고님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납치돼 감금됐다.

그러나 인터넷을 끊어도 혁명의 불길을 잡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팩스와 전화로 소통했고 갑자기 그가 사라지자 해외에서도 고님을 석방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휴대전화를 모뎀으로 쓰는 방법이 알려졌고 전화로 메시지를 전달하면 트위터에 포스팅을 해주는 서비스도 나왔다. 날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무바라크는 2월1일 차기 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11일 마침내 권좌에서 물러났다.

29일 구글 개방성 포럼에서 만난 고님은 “15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튜브는 달마다 10억명이 방문하고 40억시간 분량의 동영상이 재생된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검열이나 승인도 없다는 데 있다. 고님은 “15년 전에는 주류 언론이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이제는 누구나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칸아카데미라는 사이트도 주목할 만한 사례다. 옆집 꼬마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려고 유튜브 동영상을 올린 게 발단이 됐는데, 2007년에 만든 이 교육용 동영상 사이트에는 4000개의 무료 동영상이 올라있다. 재생회수는 무려 2억7000만건. 세계 최대의 갑부, 빌 게이츠도 딸과 함께 이 사이트를 즐겨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이트를 만드는 데 든 돈은 고작 300달러였다.

키바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만든 온라인 마이크로 크레딧 사이트다. 소말리아에서 600달러짜리 재봉틀을 사려는 누군가에서 스웨덴에 사는 사람이 돈을 빌려줄 수 있다. 2005년에 만든 이 사이트에서 돈을 빌려가는 사람이 100만명, 빌려주는 사람도 100만명에 이른다. 대출금 규모가 무려 4억달러. 더욱 놀라운 건 상환 비율이 99.01%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15년 전이라면 상상도 하기 어려웠을 일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위키피디아는 인류 최대의 지식의 보고다. 세계 인구의 5%, 날마다 4억7000만명이 이 사이트를 찾는다. 2600만개의 항목이 올라와 있다. 아무런 금전적 보상도 없이 항목을 작성하고 수정하고 이름 한줄 들어가지 않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7만7000명에 이른다. 고님은 “인간의 능력으로 얼마나 뛰어난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라고 설명했다.

고님은 “인터넷은 하나의 도구이므로 좋게도 나쁘게도 쓸 수 있다”면서 “우리의 역할은 훌륭한 시민으로 사람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님은 구글을 휴직하고 타히르아카데미라는 교육 사이트를 개발해서 운영하고 있다. 고님은 “기술은 단순히 도구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고님은 “인터넷이 없었을 때는 산꼭대기에서 큰 소리를 질러가면서 혁명을 했다”면서 “이집트 혁명은 페이스북 혁명이 아니라 민중의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고님은 혁명 이후 이집트에 대해서는 평가를 아꼈다. 고님은 “가장 중요한 것은 이집트 사람들이 두려움을 떨쳤고 정치적으로 행동하고자하는 의지를 갖게 됐다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혁명에 실패했다고 섣불리 생각하지만 우리는 국민들이 정치인을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한다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면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선출됐다면 설령 내가 동의하지 않는 세력이 집권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고님은 “사람은 선택에 대가를 치를 수 있어야 한다”면서 “우리가 계속 진전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런 목적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고님은 “혁명이 다 잘되고 헤피 엔딩이 됐으면 좋았겠지만 무바라크 퇴진 이후에도 불안정이 계속되고 있고 사회 투쟁이 이제 막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국가의 미래를 합의하기 힘들다”고도 말했다. 이집트 혁명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의미다.

이집트 혁명은 컴퓨터 밖에 모르던 스물아홉살 청년을 혁명 투사로 만들었다. 또래 청년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던 고님은 300만명의 온라인 추종자들을 이끌고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종식시킨다. 그가 발견한 것은 사람들의 억눌린 분노와 불의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 이면의 강한 유대의식이었다. 고님이 강조한 것처럼 이제는 무엇을 반대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2013년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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