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의 초대형 특종, 물 먹은 주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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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가 조세 도피처에 설립된 한국인 명의의 페이퍼컴퍼니 명단을 공개한 22일 오후 전국언론노동조합 대회의실은 100명 이상의 기자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다. 입구에는 조중동 종편의 취재를 거부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가뜩이나 날도 더운 데다 좁은 공간에 방송 카메라들이 내뿜는 열기까지, 후덥지근한 기운이 좁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거기 앞에 좀 가리지 말아요.” 사진 기자들이 신경질을 부렸다.


이날 기자회견은 여러 가지로 독특했다. 우선 언론사가 취재 결과를 기자회견 방식으로 발표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최승호 뉴스타파 PD는 “잠시 뒤 뉴스타파 취재 결과가 유튜브에 올라올 테니 그걸 참고해 달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뉴스타파가 공개한 동영상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일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기자회견을 할 게 아니라 그냥 동영상을 보라고 하면 되지 않았겠느냐”는 푸념도 흘러나왔다.

뉴스타파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진행하고 있는 조세 도피처 프로젝트의 유일한 한국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ICIJ의 제러드 라일 기자가 입수한 자료는 260GB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ICIJ는 당초 70여명의 한국인 명단을 확인했다고 밝혔으나 뉴스타파가 추가 확인한 결과 245명으로 늘어났다.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는 “뉴스타파가 장기 탐사 보도에 전념할 수 있는 비영리 언론이기 때문에 한국의 취재 파트너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뉴스타파는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ICIJ 자료 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언론사다. 다른 언론사들은 뉴스타파의 발표를 기다려 그대로 인용할 수밖에 없다. KBS와 MBC를 비롯해 여러 국내 언론사들이 ICIJ와 접촉해 자료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에 자료 협조를 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정부 기관과는 자료 공유를 하지 않기로 ICIJ와 협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다음 주 초 2차 발표가 있을 텐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 그룹 임원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확인되는 대로 계속해서 추가로 공개하겠다”고도 했다. 국내 언론은 뉴스타파의 발표를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사안이니지만 완벽하게 독점적인 정보, 조세 피난처 페이퍼컴퍼니 명단은 그동안 한국 언론의 취재 범위 바깥에 있는 굉장히 독특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합뉴스에 실린 제러드 라일 기자의 인터뷰도 흥미롭다. 연합뉴스는 ICIJ 사무실까지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고 전화로 인터뷰를 했는데 정작 아무런 새로운 내용이 없다. “명단에 있는 다른 이름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라일 기자는 “뉴스타파가 이번 프로젝트의 파트너이고 그들이 한국 관련 정보를 갖고 있다”며 거절했다. 연합뉴스 기자는 “결과가 어떠리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다시 “뉴스타파에 물어보라”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ICIJ는 1년여 전 이 자료가 담긴 하드디스크를 소포로 배달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ICIJ의 독일 파트너였던 쥐트도이체자이퉁의 한 기자는 “전체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두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 바 있다. 파트너 언론사들도 자료의 일부만 열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 외교 기밀문서 원본을 통째로 공개했던 위키리크스와 달리 ICIJ는 비밀 유지와 취재원 보호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부자들은 스위스 은행에 돈을 숨겨왔다. 조세 도피처로 검은 돈이 이동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들어서다. 조세 도피처는 치외법권 지대라기 보다는 국가 권력의 비호 아래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거나 이른바 통치자금을 운용하는 창구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단속하는 시늉을 하지만 전체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000년 이후 조세 도피처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500년을 이어온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 원칙이 무너진 때문이기도 하다. USB는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고강도 세무조사에 못 이겨 미국인 고객 수천명의 재무 정보를 미국 정부에 제공하기도 했다. 독일 국세청은 리히텐슈타인 은행의 비밀 계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정보원에게 고객 정보가 담긴 CD 한 장을 500만유로, 우리 돈으로 70억원 가까이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UBS 같은 거대한 은행들도 안심할 수 없고 조세 도피처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진 버진아일랜드도 털리는 상황이다. 더 외진 곳에 숨길수록 더 안전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고객들 정보를 헐값에 팔아넘길 위험도 크다. 독일 정부는 CD 한 장에 500만유로를 들였지만 이 CD 덕분에 2억유로 이상의 은닉 자산을 찾아냈다. 일련의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정보가 생성되는 순간 유출될 위험도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버진아일랜드의 경우 인구가 2만5000명 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인데, 80만개 넘는 기업들이 등록돼 있다. 버진아일랜드는 영국령이다. 버진아일랜드 다음으로 큰 조세 도피처인 케이만 군도는 미국령이다. 영국의 가디언은 “2008년 금융위기로 선진국에서 세수 문제가 부각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상 외국자본 유치를 명분으로 역외탈세를 정부가 묵인해왔다, 사실상 정부는 역외탈세의 공범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번에 공개된 이수영 OCI 회장과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조욱래 DSDL 회장 등은 순진하게 실명으로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지만 대부분 페이퍼컴퍼니가 차명이나 익명으로 개설되고 여러 지역의 조세 도피처를 넘나들면서 자산을 분산시키기 때문에 좀 더 거물급 재벌 오너 일가들은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ICIJ가 입수한 페이퍼컴퍼니 명단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버진아일랜드는 우리나라에 낯선 이름이지만 외환은행의 대주주였던 론스타펀드는 벨기에와 룩셈베르크, 버뮤다를 거쳐 들어왔고 제일은행을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되팔고 나갔던 뉴브리지캐피털은 본사가 케이먼 군도에 있다. 한미은행의 대주주였던 칼라일펀드는 본사가 라부안에 있다. 모두 조세 도피처다. 주주가 누군지도 모르고 세금도 안 내는 이런 국적 불명의 자본에 공적 자금으로 살려낸 은행을 팔아넘겼다는 이야기다.

뉴스타파는 245명의 한국인 명단을 확인했다고 밝혔지만 조세 도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는 사실만으로는 탈세나 범법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 페이퍼컴퍼니는 누구나 설립할 수 있다.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개설된 해외 계좌와 검은 돈의 흐름을 밝혀내는 것이 핵심인데 ICIJ가 확보한 명단에는 이런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추가 취재로 밝혀야 할 부분이지만 금융회사들의 협조나 폭로가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세 도피처에 숨은 검은 돈을 파헤치지 못하는 것은 기밀 정보가 유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정부가 이를 비호하고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ICIJ와 뉴스타파가 드러낸 것은 국경을 넘는 국가 위의 자본의 실체다. 버진아일랜드는 수많은 조세 도피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드러난 몇 사람의 탈세 행위에 집중하는 건 자칫 사안의 본질을 간과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시스템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ICIJ와 뉴스타파가 고발한 것은 단순히 재벌 총수들이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이런 공공연한 탈세 행위를 그동안 정부가 방치해 왔고 지금도 국제 공조를 하겠다느니 실태 조사를 하겠다느니 시늉만 할 뿐, 애초에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국세청은 뒤늦게 미국과 영국, 호주 국세청으로부터 조세 도피처 관련 자료를 넘겨 받아 분석 작업에 나섰다고 발표했다. 그동안은 조사를 안 한 것일까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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