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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참, 국민연금을 잘 모르시나본데…”.

Written by leejeonghwan

February 5, 2013

“거 참, 국민연금을 잘 모르시나본데…” 지난달 29일 한국경제에 실린 정규재 칼럼은 매우 흥미롭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이하 직책 생략)은 종종 TV에 출연하는 보수 인사 가운데서도 비교적 팩트에 밝은 사람이다. 그에게 동의하든 하지 않든, 나름 치밀한 논리 구조를 갖춘 사람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를 테면 토론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진실에 직면할 시간이 왔다”고 말하는 이날 칼럼도 언뜻 그렇게 보인다.

“국민연금을 잘 모르시나본데”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캠프에서 경제민주화 공약을 만들었던 김종인씨가 어느 토론회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국민연금이 고갈되면 그때는 세금을 걷어서 주는 거예요! 원래 그렇게 돼 있는 거예요.” 정규재는 “김종인의 이 말은 진실이다”라고 전제하면서도 “적립금이 고갈되면 세금을 거둬서 줘야 한다”면서 “이게 바로 국민연금의 기만적 진실”이라고 뒤집는다.

김종인이 보기에 국민연금은 원래부터 언젠가 고갈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기금이 바닥나 급여를 줄 수 없게 되면 정부가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정규재도 동의한다. 다만 정규재는 “세금을 낼 사람이 적다면, 아니 없다면? 당연히 연금도 없다”면서 “내가 평생 모아놓은 돈은 어디로? 이미 구세대가 전부 타먹고 사라졌다”고 괴상한 3단 논법을 펼친다. 세금 낼 사람이 없다는 전제부터 틀렸다.

국민연금이 고갈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해를 돕기 위해 건강보험과 비교해보라고 말한다. 2010년 기준으로 건강보험공단 재정 적자는 1조2994억원에 이른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에 따르면 건강보험 재정 적자는 2030년이면 최대 28조원까지, 2060년이면 최대 132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어마어마한 적자를 내고 있는 건강보험은 애초에 적립을 하고 말고도 없이 이미 고갈돼 있는 상태다.

정규재가 강조한 것처럼 “줄 돈이 없으면 세금을 걷어서 줘야 한다”. 건강보험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국고에서 직접 지원하기도 하고 건강증진기금에서 지원하기도 한다. 이름은 다르지만 어차피 그게 다 세금에서 나가는 거다. 건강보험을 두고 정규재처럼 “세금 낼 사람이 없으면 혜택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세금은 부족하면 더 거두면 된다. 어디에서 어떻게 거두느냐의 문제일 뿐, 세금 낼 사람이 없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애초에 정규재의 3단 논법은 “내가 평생 모아놓은 돈은 어디로?”에서 전제가 무너진다. 정부가 애초에 홍보를 잘못한 탓이지만 국민연금은 금융상품이 아니다. 국민연금 금고에 “내가 평생 모아놓은 돈” 따위는 없다. 누가 건강보험을 본전 생각하면서 내나? 국민연금이 당신이 낸 돈을 두 배, 세 배로 불려줄 것 같은가. 내가 낸 소득세가 꼬리표가 붙어서 돌아다니지 않는 것처럼 국민연금을 노후 재테크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국민연금이 곧 고갈된다”는 해묵은 괴담을 유포시키는 사람들이 바로 정규재 같은 사람들이다. 가볍게 반론을 하자면 첫째, 국민연금이 고갈된다고 해서 국민연금을 못 받게 되지는 않는다. 정부가 부족한 부분을 지원하게 된다. 둘째, 국민연금은 원래 고갈되도록 설계돼 있다. 정확한 표현은 기금 고갈이 아니라 적립금 소진이다. 셋째, 다음 세대 부담이 너무 크지 않냐고? 그게 그렇게 걱정되면 보험료를 올려야 한다. 지금 당장.

정규재가 말한 것처럼 “국민연금은 지금의 노후세대를 봉양하기 위한 사회적 세금으로 걷고 있는 돈이지 가입자의 노후를 위해 적립하는 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국민연금은 이자를 붙여 돌려주는 장기저축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국민연금은 젊은 세대에 대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난폭한 결론을 끌어낸다. 국민연금을 세금으로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전제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이상한 결론이다.

국민연금 고갈을 정말 걱정한다면 보험료를 올리자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정규재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당신이 낸 돈도 못 받게 될 수 있다며 불안과 공포를 유포한다. 보험료를 올리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면 단계적 증세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증세 이야기를 꺼내면 화들짝 놀란다. 고갈될 게 뻔하고 보험료 인상도 싫고 증세도 싫고 당장 국민연금을 폐지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일까.

조세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소득세 비율이 우리나라는 3.6%,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회원국 평균은 8.7% 수준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소득세를 끌어올릴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 다음 세대가 지금 우리들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면, 그렇게 많은 세금을 내고도 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의료와 보육, 교육, 주거, 노후 등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보편적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

진보진영 일부에서 국민연금 기금을 헐어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늘리자는 주장도 있었다. 국민연금의 과도한 금융 투자에 대한 우려도 있다. 어항 속의 고래가 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공공임대 주택을 늘리거나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확대하거나 노인요양 시설을 짓자는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것보다는 국채를 발행하는 게 낫다는 지적도 있었다. 관건은 인구 고령화에 따른 막대한 비용을 어디에서 어떻게 조달할 것이냐다.

국민연금의 소득 재분배 역할을 강화하려면 가난한 사람들은 낸 돈 보다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지금 보다 좀 더 수익 비율을 낮추는 방향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규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사회적 세금일 뿐 노후를 위해 적립하는 돈이 아니고 장기저축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작 “네가 낸 돈을 못 받게 될 수도 있어”라며 악마 같은 속삭임을 지면에 퍼뜨린다.

국민연금 없이도 노후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낸 돈 보다 더 적게 받도록 해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물론 반발은 크겠지만) 지금은 이들도 국민연금으로 짭짤한 재테크를 하게 된다. 오죽하면 부자들이 많이 가입할수록 국민연금 재정이 더 취약하게 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올까. 가난한 사람들의 노후를 돕기 위해 만든 제도가 부자들에게 더 큰 혜택을 준다. 지금 국민연금의 수익비율 구조는 매우 역진적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민연금의 소득 월액 상한선은 389만원, 최고 납입 보험료는 35만1000원이다. 월급이 400만원이 넘는 사람이라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같은 보험료를 낸다는 이야기다. 당장 소득 월액 상한선을 높이고 이들의 수익비율을 낮춰 잡기만 해도 국민연금 기금 고갈 시점을 뒤로 늦출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의 사례를 들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소득 월액 상한선이 없다면 이 회장의 월급이 10억원이라면 보험료를 월 9000만원씩 내게 된다.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된다고 해서 세상이 끝장나는 건 아니다. 지금은 연봉이 3000만원이라면 소득의 9%, 270만원을 국민연금 보험료로 낸다. 그런데 앞으로 30년 뒤 우리 아이들은 18%인 540만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때는 지금만큼 수익비율이 높지 않을 수도 있다. 정규재의 저주처럼 낸 만큼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고 마이너스 수익 비율에 반발해 국민연금 납부 거부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국민연금이 고갈된다며 떠들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첫째, 국민연금은 금융상품이 아니라 세금이라고 확실하게 못 박을 필요가 있다. 둘째, 고갈이 되더라도 약속한 건 다 주겠다고 국민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셋째, 부자들이 좀 더 많이 부담하도록 사회적 합의를 이룰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 보험료를 높이는 것도 좋지만 기금을 지나치게 많이 쌓는 것도 위험하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소득세 세율을 높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정규재는 국민연금의 미래에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않는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병하던 70대 남성이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사건을 기억하나. 간병 살인과 간병 자살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하루 종일 폐지를 주워 2000원을 버는 노인들 이야기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나. 월 15만원의 생활비로 살면서 영양실조에 걸려 시들어가던 세 자매의 이야기를 기억하나. 양극화를 어쩔 수 없는 일로 방치할 건가.

우리가 아무리 보험료를 많이 낸다고 해도 보험료만으로는 복지를 해결할 수 없다. 인구 구조가 그렇게 돼 있다. 우리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노후를 의탁하는 대신 그들이 우리만큼 교육과 주거에 소모적인 비용을 쏟아 붓지 않게 하려면 최소한의 사회적 서비스를 공동구매하는 보편적 복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게 우리 세대가 우리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연대의 선물이다.

정규재는 “진실에 직면할 시간이 왔다”고 말하면서 교묘하게 진실을 호도한다. 정규재가 말하는 진실은 국민연금은 바닥나게 돼 있고 세금으로 메워야 하지만 세금 낼 사람이 없으면 국민연금을 한 푼도 못 받게 될 거라는 것이다. 물론 국민연금은 바닥나게 돼 있고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는 건 진실이다. 그러나 그가 직면해야 할 더 중요한 진실은 증세를 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는 것, 미루면 미룰수록 우리 다음 세대의 고통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논란에 대해 한 마디. 지분을 갖고 있는 만큼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건 당연하다. 당연히 경영권에 개입할 수도 있다. 다만 정치권력이 기업을 쥐고 흔드는 수단으로 악용돼서는 안 되고 단순히 주주 가치와 투자 수익률을 높이는 수단으로 변질돼서도 안 된다.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하려면 공적 연기금의 본분에 걸맞게 노동과 환경, 지속가능성 이슈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이 돼야 한다.

슬로우뉴스에 게재됐던 기사입니다. http://slownews.kr/7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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