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간첩으로 만드는 엉터리 디지털 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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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검찰이 들이닥쳐서 당신의 컴퓨터를 통째로 들고 갔다고 생각해 보자. 그 컴퓨터에서 당신이 작성한 적 없는 문건이 쏟아져 나와서 법정에 증거로 제출된다. 아니라고 부인해도 소용이 없다. 그 문건이 당신의 컴퓨터에서 나온 문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지만 버젓이 파일이 폴더에 들어가 있는데 판사가 누구 말을 더 믿을까. 북한에서 내려온 지령이라도 들어있으면 당신은 꼼짝없이 체제 전복을 노리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이 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면 어떨까. 오길영 신경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지난해 2월23일, 왕재산 사건 선고가 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왕재산 사건은 북한의 225국(옛 노동당 대외연락부)의 지령을 받아 왕재산이라는 지하혁명조직을 건설해 국내 정치동향과 군사 정보 등을 북한에 보고하는 등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최대 9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은 사건이다. 오 교수는 이 사건 재판에 자문 교수로 참여했다.

유죄 판결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양형 취지는 충격적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은 별다른 근거 없이 이 사건을 조작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방어권 행사의 범위를 넘어 진실의 발견을 적극적으로 숨기거나 법원을 오도하려는 시도에 기인한 행위”라면서 “적극적으로 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조장하는 행태라고 봐서 가중적 양형요소로 참작했다”고 밝혔다.

오 교수는 “재판 결과를 듣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고 했다. “재판이 끝나고 서너달을 술에 절어 폐인으로 살았다”고도 했다. 오 교수는 “이 사건은 단순히 공안 사건을 넘어 디지털 증거능력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첨예한 공방을 벌였던 역사적인 재판이었다”면서 “그런데 재판부는 내가 쓸 데 없는 의혹을 제기했다며 가중 처벌을 했다, 내가 그 사람들을 더 오래 감옥에 있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씻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왕재산 사건 재판 항소심 선고가 이달 28일 열린다. 오 교수는 “그 사람들이 간첩인지 아닌지는 관심 없다”면서 “내가 왕재산 사건을 돕는다면 다들 묻는데, 한 번도 그건 생각해 본적 없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내가 관심 있는 건 디지털 증거의 증거 능력인데 검찰이 제시한 증거 가운데 증거 능력을 제대로 갖춘 건 거의 없었다”면서 “그런 부실한 증거를 토대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고 설명했다.

검찰이 법정에 제시한 증거는 압수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거기서 찾은 파일의 출력물들, USB 메모리, 피고인들이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는 장면을 찍은 사진 등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그 하드디스크가 피고인들의 컴퓨터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검찰이 제시한 사본과 원본이 동일한지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고 그 원본이 진짜 원본인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찍은 동영상이 있다고 했지만 공개하지 않았다.

흔히 디지털 포렌식(법과학)에서는 원본과 사본이 맞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해시(hash) 값을 비교한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하드 디스크의 이미지를 떠서 사본을 만드는데 사본을 증거로 사용하려면 각각의 해시 값을 읽어서 두 개가 일치하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사본을 건드려 파일을 끼워 넣거나 수정하는 등 증거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더라도 이를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직접 사본의 해시 값을 검증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으나 18시간이나 소요되는 작업이라 프로그램을 돌린 뒤 법정 문을 닫아걸고 다음 날 확인을 했더니 컴퓨터가 멈춰 있었다. 변호인들이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재판부가 이를 거부했고 결국 검찰이 제시한 증거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검찰이 제시한 60여개의 디지털 증거 가운데 해시 값 검증을 거친 증거는 하드디스크 하나와 USB 메모리 뿐이였다.

오 교수는 “컴퓨터 안에 하드디스크를 확인해 가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오 교수는 “하드디스크를 증거로 제출하려면 그 하드디스크가 피고인의 컴퓨터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검찰이 입증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압수 당시 동영상 촬영 과정에서 시리얼 넘버를 찍어서 봉인하고 이미지를 떠서 사본을 만든 뒤 쓰기 금지 조치를 하고 해시 값이 일치하는지 확인을 해야 비로소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동일한 종류의 하드디스크나 USB 메모리를 얼마든지 온라인에서 구입할 수 있는데 자신의 하드디스크 시리얼 넘버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냐”면서 “그게 아니라면 컴퓨터를 살 때마다 뚜껑을 열고 하드디스크에 조각도로 이름이라도 새겨야 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오 교수는 “재판부가 증거 채택을 거부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판을 방해했다며 짜증을 내고 가중 처벌을 했다”고 비판했다.

오 교수는 “검찰이 살인 사건 재판에서 피 묻은 칼을 증거로 제출했다면 지문을 확인하고 상처 부위와 맞는지 확인하고 목격자를 찾아 증거 능력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면서 “그런데 이런 디지털 증거는 압수한 컴퓨터에서 나왔다고만 하면 끝이다, 우리나라 검찰이 그동안 공안 사건을 막무가내로 처리해왔다는 이야기도 되고 디지털 증거의 증거 능력에 대해 고민이 깊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고 설명했다.

검찰의 수상쩍은 행동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원본이라는 하드디스크를 노트북에 연결해 포렌식 프로그램을 작동하는 과정에서 변호인이 외부에 하드디스크가 아니라 노트북 내부의 파일을 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고 판사가 하드디스크 연결을 끊어보라고 지시하자 그때서야 사본 파일이 노트북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돼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파일이 외장 하드디스크에 있는 파일과 동일한 파일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오 교수는 “노트북에 저장된 파일을 읽어 들이면서 외부에 연결한 하드디스크를 읽는 것처럼 법정을 속였다는 이야기인데 판사가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재판을 속행한 건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검찰이 제출한 증거를 폐기하고 기망 행위를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변호인들이 노트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변호인의 노트북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됐고 준비된 다른 노트북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호인이 제기한 의혹은 이밖에도 많다. 법정에서 프레젠테이션으로 확인한 파일과 출력해서 증거로 제출된 문서에서 세미콜론(;)이 콜론(:)으로 돼 있다거나 글꼴이 다르거나 홑따옴표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고 빈 칸 몇 줄이 출력본에서는 말끔하게 정리돼 있기도 했다. 3월1일에 발송한 이메일의 작성일자가 3월2일로 돼 있는 경우도 있었다. 검찰은 인쇄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고 둘러댔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이다.

하드디스크의 외부 반출을 두고도 논란이 있었다.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은 현장에서 하드디스크의 이미지를 뜨고 원본은 남겨두도록 돼 있다. 암호가 걸려 있는 등 부득이한 경우에는 반출이 가능한데 비밀번호가 걸린 USB 메모리에 비밀번호 힌트를 비밀번호로 집어넣었더니 풀리더라는 설명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애초에 암호가 걸려있지 않았던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오 교수는 “대법원 판례에서는 디지털 증거의 압수 시점에서부터 법정에 제출돼 검증이 진행되는 단계까지 모든 절차에서 철저하게 신뢰성이 담보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면서 “왕재산 사건에서 검찰이 제출한 증거의 대다수는 증거능력이 부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교수는 “왕재산 사건은 향후 다른 재판에 참고할 중요한 판례가 될 것”이라며 “디지털 증거의 증거 능력에 대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원은 1심 재판에서 “피고인들이 2005년 하반기에 왕재산을 구성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증인 조아무개씨가 피고인들과 함께 1993년 조직을 구성하고 입북했다는 것 뿐”이라면서 “하지만 조씨는 1990년 중반 이미 피고인들과 관계를 단절했으므로 조씨의 진술만으로 이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반국가 단체 구성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왕재산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의미다.

다만 법원은 “북한을 선전하고 선동하며 국가의 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정보를 수집·탐지하고 반국가 단체인 북한의 공작원들과 회합하는 등 피고인들의 행위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죄책이 몹시 무겁다”며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문건의 내용의 진실성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문건의 존재 그 자체가 범행의 직접적인 수단으로서 직접 증거가 되므로 증거 능력이 없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오 교수는 “검찰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북한 지령 문건 등을 증거로 들이밀면서 적당히 간첩 사건으로 끝내려 했던 것 같다”면서 “그러나 디지털 증거의 증거 능력을 입증하려면 원본 절대 보전의 원칙과 보관 연속성의 원칙, 신뢰성 보장의 원칙 등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2심 재판부가 이런 상황을 인정해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폐기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두고두고 기억될 재판으로 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 교수는 “이 사람들이 정말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협했다면 그에 맞는 처벌을 받아야겠지만 설령 간첩이라고 하더라도 증거 재판주의에 입각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앞으로 이런 디지털 포렌식의 절차와 공정성을 둘러싼 법정 공방이 계속 늘어날 텐데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도 공부를 좀 할 필요가 있다”면서 “왕재산 사건 1심 재판이 반면교사가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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