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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Written by leejeonghwan

December 17, 2012

며칠 전 이재영 전 민주노동당 정책국장이 세상을 떠났다. 어제가 발인이었다고 한다. 벌써 10년 전인데 그를 인터뷰했던 기억이 난다. 무척이나 까칠하면서도 원칙적이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아직 국내에서 이름을 얻기 전, ‘사다리 걷어차기’를 펴낸 장 교수를 인터뷰하고 사회적 대타협에 대한 기획 기사를 썼다. 장 교수는 재벌의 경영권 위협이 약한 고리라고 봤다.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강제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게 장 교수의 이론이었다. 그 무렵 진보 진영의 의견을 묻기 위해 이재영 국장을 만났다. 그는 시니컬한 반응을 쏟아냈다.

“외국 자본에 넘어갈 수 있으니 경영권을 보장해 주자고? 재벌이 그동안 한 짓을 그냥 묻어두자는 건가. 나는 재벌의 도덕성도 경영능력도 인정할 수 없다. 재벌의 소유와 경영 독점을 해체하고 장기적으로는 국민주 형태로 소유 분산을 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직접 참여하게 되면 재벌이나 외국 자본의 기업 지배를 동시에 막을 수 있고 노동자들의 권한과 함께 책임감도 높일 수 있다.”

정확한 워딩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 무렵 유행처럼 번졌던 북유럽 복지국가 시스템, 이른바 스웨덴 모델에 대해서도 이 국장은 냉소적이었다. “고삐 풀린 재벌이 독점자본이 됐고 이들의 독점가격이 복지비용을 높여 복지국가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높은 세금으로 복지를 구현하는 스웨덴 모델의 기본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통제불가능한 수준까지 재벌을 풀어줬기 때문이다.”

해묵은 논쟁이지만 그의 과격한 주장은 여전히 서슬퍼렇게 살아있다. 그가 언젠가 토론회에서 발표했던 보고서를 찾아 다시 읽었다. “1980년대, 1990년대의 경제위기와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잘 ‘방어’돼 왔던 스웨덴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21세기에 이르러 어떤 위기 또는 전환점에 봉착한 것으로 보이며,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완만한 복지 축소를 통한 국가(기업) 경쟁력의 제고를 목표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민당의 전략대로 경제성장을 통한 사회복지 시스템의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할지는 의문스럽다. 지난 20여년의 상대적 경기침체가 복지 시스템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근본적 위협은 스웨덴의 복지시스템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① 사적 시장에서 ② 공적으로 조성 축적된 재원이 ③ 공공복지시스템을 통해 ④ 사적으로 소비됨. 즉, 시장이 이 시스템의 핵심! 시장변화에 따라 복지수준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독점가격 → 복지급여 상승 → 재정부담의 악순환. 독점자본은 독점가격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조직적 저항(H&M의 이전 협박과 감세), 시장포화에 따른 공공영역으로의 진출(프리미엄연금) 등의 문제점을 낳으며 복지시스템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스웨덴사민당의 ‘복지를 위한 성장’ 전략은 복지시스템 위협의 근원인 독점자본에는 손을 대지 않고 복지수요 자체를 축소하려는 대증요법이다. 이게 바로 잘쯔요바덴의 덫이다.”

“스웨덴 사민당의 세가지 딜레마. 딜레마 1: 사민당의 복지축소 전략은 유효수요 축소로 이어질 것임. 딜레마 2: 사민당의 고성장(적정성장이 아닌) 전략은 빈부격차 심화로 이어지고 보호적 복지 수요를 오히려 늘릴 것임. 딜레마 3: 사민당은 ‘복지를 위한 성장’을 선거 캠페인으로 제기. 하지만 사민당의 정책 차별성 약화는 지지층 이탈로 이어지고, 1991년의 ‘역사적 패배’를 재연하게 될 수 있음.”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최장 집권의 사민당 + 최고 조직율의 노조 + 광범한 중산층]이라는 강력한 복지동맹이 정치적으로 급격히 붕괴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잘 ‘방어’된 스웨덴의 복지시스템은 이제 완만한 축소기로 접어든 것으로 보이며, 그것에 대한 방파제는 사회민주당이나 노동조합보다는 국민의 폭넓고 오래된 ‘복지경험’일 것으로 여겨진다.”

“스웨덴은 발렌베리 산하 14개 기업이 스웨덴 전체 주식시장의 40%를 넘고, 10대 기업의 매출액이 GDP의 65%(한국은 29%, OECD 23개국 평균 33%)를 차지한다. 고축적-대량생산-대량소비라는 똑같은 산업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용지출이 적고(복지 수준이 낮고) 규모가 더 큰 미국이나 한국 같은 국가경제와 경쟁할 수 있을까. 사회복지국가가 자본주의체제와 대립하는가는 알 수 없지만, 독점자본체제와는 대립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복지국가 모델에 매료돼 있었지만 이재영 국장의 독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지금보다 한참 어릴 때지만 저런 사람이 진짜 좌파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런 사람이 있어서 진보정당이 그나마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가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될 줄 몰랐다. 언젠가 다시 인터뷰도 하고 묻고 배우고 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의 아이디어가 오랫동안 한국 진보진영을 이끌 거라고 믿는다.

(좋은 곳으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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