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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않으면 먹힌다… 무너진 업종 장벽, 생존이 걸린 가입자 쟁탈전.

말 그대로 전쟁이다. 지상파와 케이블, 통신사들이 시장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서로의 가입자를 빼앗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접시 없는 위성방송이 한참 논란이더니 셋톱박스 없는 디지털TV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내년 1월1일 지상파 디지털 전환이 코앞인데 케이블 디지털 전환 이슈도 끼어들었다. N스크린이라는 이름으로 통신사들까지 방송 시장을 넘본다. IPTV와 모바일TV까지 치고 받으면서 유료방송 시장이 그야말로 들끓고 있다.


지난달 30일 김장실 새누리당이 주최한 토론회는 이런 갈등이 폭발하는 자리였다. 김 의원이 최근 아날로그 케이블을 디지털로 전환하도록 돕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이 법안에 셋톱박스 없는 디지털TV, 클리어쾀을 허용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저소득 계층을 대상으로 20~30개 정도 채널을 묶어 저렴한 가격에 디지털 방송을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발상이지만 양방향 서비스가 불가능한 반쪽짜리 디지털 방송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클리어쾀은 지상파와 케이블이 거세게 충돌하는 이슈다. 지상파 방송사들 입장에서는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직접 수신 가구를 늘리는 게 절박한데 이런 저가 디지털 케이블 상품이 출시되면 디지털 전환의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10% 수준인 지상파 직접수신 비율이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클리어쾀이 케이블 사업자들을 지원하는 특혜라며 반발하고 있다.

케이블 사업자들 상황도 절박하다. 우선 가입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케이블TV방송협회에 따르면 8월 말 기준으로 케이블 가입자는 1489만명. 2009년 1505만명을 찍은 뒤 해마다 20만명 이상 줄어드는 추세다. 반면 IPTV는 올해 말 기준으로 643만명, 위성방송도 370만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케이블 사업자들이 저가경쟁에 뛰어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나마 남은 10%의 지상파 직접수신 가구라도 붙잡겠다는 전략이다.

케이블 사업자들은 가뜩이나 접시 없는 위성방송, DCS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DCS는 인터넷 회선을 통해 위성방송을 전송하는 서비스를 말하는데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 8월 KT의 DSC 서비스가 위법하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일단 케이블 사업자들의 반발을 수용한 모양새지만 업계에서는 DCS 전면 허용은 시간문제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해외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많고 시민단체들도 시청자 선택권을 명분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케이블 사업자들이 규제 완화에 목을 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방송법 시행령은 케이블 사업자가 전체 케이블 가입자 수의 3분의 1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케이블 사업자들은 IPTV처럼 전체 유료방송 가입자 수 기준으로 완화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시행령 개정안이 통과되면 가입자 수 제한이 490만명에서 770만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벌써부터 매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군소 케이블 사업자들의 인수합병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케이블이 저가 클리어쾀으로 가입자를 붙잡으려 한다면 지상파는 무료 MMS에 기대를 걸고 있다. MMS는 디지털 전환 이후 남는 주파수 대역을 활용해 여러 채널을 동시에 전송하는 방식을 말한다. KBS는 9번 채널을 9-1, 9-2, 9-3, 9-4로 쪼개 고화질 방송 1개 채널과 일반 화질 3개 채널로 내보내는 실험 방송을 하고 있다. 정치적 특혜라는 논란도 있지만 지상파 방송사들의 오랜 숙원 사업이다.

업계 판도를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클리어쾀이 허용되면 케이블 가입자들 이탈을 막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지상파 직접수신 가구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케이블 사업자들에게 클리어쾀이 기회라면 DCS는 위기 요인이다. DCS가 도입되면 케이블을 끊고 IPTV 서비스로 옮겨가는 가입자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통신이 케이블을 쫓고 케이블이 지상파를 쫓는 양상이다.

남아있는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는 클리어쾀에 어떤 채널을 몇 개나 집어넣을 것이냐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지상파를 포함해 공익채널 중심으로 구성하되, 홈쇼핑 채널은 반드시 빠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상파 방송사들을 대표해 토론회에 참석한 김혁 한국방송협회 정책실장은 “보편적 서비스 제공차원에서 지상파 방송사들은 클리어쾀에 재송신료를 받지 않을 계획인데 그러려면 홈쇼핑 채널을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케이블 사업자들이 홈쇼핑 채널에 받는 송출 수수료는 한 가구에 월 2700원 꼴이다. 케이블 입장에서는 수신료를 낮춰 가입자를 잡되 홈쇼핑 수수료로 영업이익을 보전한다는 계산이겠지만 지상파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합의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임성원 케이블TV협회 정책국장은 “홈쇼핑 채널을 빼면 수신료를 올릴 수밖에 없는데 저소득층에게 디지털 방송을 저렴하게 보급한다는 기본 취지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 케이블 업계는 DCS 허용 여부를 두고 KT의 발목을 잡고 있다. 케이블 업계는 DCS를 허용하려면 반드시 법 개정을 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방통위가 양문석 위원 사퇴 이후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데다 국회 의결까지 거치려면 최소 1년 이상 시간이 걸린다. 당장 사업을 시작해야 할 KT 입장에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다. 케이블 업계 내부에서는 장기적으로 DCS를 양보하되 점유율 규제 완화를 끌어낸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상파 재송신 분쟁도 또 다른 변수다. 케이블 업계 1위와 3위인 CJ헬로비전과 씨앰엠이 가입자 한 가구에 280원씩 재송신료를 지급하기로 합의했지만 아직 다른 사업자들과는 논의에 진전이 없는 상태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당장 클리어쾀도 중요한 이슈지만 논의의 주도권을 확보해 재송신료 추가 협상이나 케이블 규제 완화, DCS, MMS 등의 논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홈쇼핑 채널의 매출 기여도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케이블 사업자들은 수신료를 낮게 받으면서 홈쇼핑 수수료로 영업이익을 올려왔는데 이제 IPTV와 위성방송과 그 이익을 나눠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실제로 KT스카이라이프의 홈쇼핑 수수료 매출은 해마다 두 배 이상 급증하는 추세다. 당장 케이블 사업자들의 홈쇼핑 매출이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머지 않아 성장의 한계에 부딪힐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업계에서는 한동안 KT의 위협적인 독주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익희 현대증권 연구원은 “과거에는 케이블 이외의 대안이 없기도 했고 유료방송을 한 군데만 선택해 설치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거실 외에도 안방이나 자녀들의 공부방에 추가로 위성방송이나 IPTV를 설치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면서 “본방 사수보다 다시 보기를 선호하는 젊은 직장인 중심의 1~2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도 IPTV 가입자가 급증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신건식 BS투자증권 연구원은 “콘텐츠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플랫폼적 지위를 갖고 있으면 갑과 을이 바뀔 수 있다”면서 “KT가 IPTV+스카이라이프 가입자를 900만명 이상 확보하면 콘텐츠 공급자 입장에서 KT를 제외하고 콘텐츠를 유통시키기가 불가능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가입자를 모으려면 콘텐츠가 필요하고 저렴하게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는 게 중요한데 그러려면 역시 가입자 규모를 크게 가져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설문에 따르면 지상파 채널 가운데 하나만 나오지 않아도 다른 유료방송 서비스로 갈아타겠다는 답변이 60%가 넘었다. 국내 프로그램 판매의 87.8%가 지상파 콘텐츠고 콘텐츠 구매의 94.7%가 케이블 채널 사업자들이라는 통계도 주목된다. 업종 장벽이 무너지면서 지상파 콘텐츠의 가치가 더욱 부각되고 플랫폼 사업자들의 가입자 쟁탈전도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