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라는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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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판에 경제민주화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그 실체 없는 유령은 대선 후보들의 구호로 남발되다가 적당히 용도 폐기되는 분위기다. 박근혜 대통령을 막는다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 나름 진보를 자처하던 사람들도 판세분석에 매몰돼 정책대결은 뒷전이다. 순환출자를 금지하면 정말 국민들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하면 재벌이 해체되고 일자리가 늘어날까. 이 당연한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는 사람이 없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기존 순환출자는 그대로 두고 신규 순환출자만 금지한다는 입장이다. 출총제 부활에도 반대한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이에 맞서 기존 순환출자는 3년 유예기간을 둬서 해소하도록 하고 3년 뒤부터 의결권을 제한한다는 공약을 내놨다. 출총제도 부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근혜가 상대적으로 미온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금산분리나 일감 몰아주기 규제, 경제범죄 처벌 강화 등에서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누구도 재벌개혁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순환출자 금지와 출총제 부활이 한국경제의 문제를 푸는 만능의 해법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한쪽에서는 적당히 발을 걸치면서도 기득권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신호를 흘리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개혁의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재벌개혁은 서로에 대한 차이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소모되고 있다. 재벌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편승하면서 진짜 중요한 이슈를 은폐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10대 재벌그룹 가운데 순환출자 구조를 갖는 7개 그룹이 순환출자를 해소하려면 9.3조원이 든다. 삼성그룹이 1.2조원, 현대자동차그룹은 6.2조원이나 된다. 특히 현대차그룹의 경우 3년 안에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데 문재인이 과연 3년 뒤에 정몽구 일가의 의결권을 전면 제한할 수 있을까. 경영권 위협 운운은 다분히 엄살이라고 치더라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출총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완화됐다가 이명박 대통령 들어 더욱 완화됐다. 박근혜는 물론이고 문재인 역시 그때는 왜 하지 못했느냐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당 내부거래 금지는 노무현 때 후퇴했다가 그나마 이명박 때 다시 강화됐다. 순환출자 금지 역시 노무현 시절부터 논쟁이 많았지만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 재벌 눈치를 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인 김상조 한성대 교수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출총제 부활이나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재벌세 도입 등 강력한 정책들을 산발적으로 내놓는다고 재벌개혁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단순히 순환출자 금지를 하느냐 마느냐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때는 내가 가장 과격했는데 지금은 중간 정도 되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만큼 급진적이되 현실성 없는 공약이 넘쳐난다는 의미다.

순환출자를 끊는다고 해서 당장 재벌이 해체되지는 않는다. 일찌감치 순환출자를 정리하고 지주회사로 전환한 SK그룹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지분이 0.04%, 회장 일가 지분을 모두 더해도 0.06% 밖에 안 되지만 계열사를 통한 내부 지분율은 48.8%에 이른다. LG그룹도 구본무 회장의 지분이 1.26%, 회장 일가 지분은 3.91% 밖에 안 되는데 역시 내부 지분율이 33.25%나 된다.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흔히 재벌체제를 이야기할 때 오너 일가가 소수주주들의 이익을 가로챈다고 비판하지만 지주회사로 바뀌면 오너 일가와 소수주주들의 이해가 일치하게 된다. 계열사들에 일감을 몰아주고 하청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고질적인 관행은 지주회사로 전환한 뒤에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주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지주회사를 주주자본주의의 가장 진화된 형태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재벌개혁이 절실한 과제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재벌개혁만 하면 양극화가 해소되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성장률도 높아질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정치적 말장난이다. 재벌을 건드려서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재벌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경제가 살아날 거라고 믿는 것 만큼이나 허망하다. 박근혜나 문재인이나 막연한 구호 이상의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경제민주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장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라고 정리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는 자유방임의 시장이 민주주의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필요하다면 정치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재벌 개혁도 중요하지만 고용 없는 성장과 소득 불평등 문제 해결 없는 경제민주화는 의미가 없다. 복지 전망이 없는 경제민주화는 거짓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돌보지 않는 경제민주화는 위선이고 기만이다.

순환출자 금지나 출총제 부활, 금산분리, 지주회사 요건 강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정규직화, 그리고 노동자의 경영 참여 확보다. 이런 변화는 대선 공약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방치하면서 재벌만 개혁하면 이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재벌의 이익을 억제하면 죽어가던 중소기업들이 살아날까. 정책이 실종된 선거, 언론의 호들갑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은 진보진영의 무기력과 방관이다.

그나마 김소연 무소속 후보의 비판이 눈길을 끈다. 김소연은 지난달 28일 SBS 라디오와 인터뷰에서 박근혜를 겨냥해 “비정규직도 차별 없이 같이 일하면 공정하게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비정규직을 계속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후보 말대로 비정규직을 절반으로 줄이더라도 나머지 450만은 여전히 비정규직,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면서 “그런 식으로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기륭전자 노조 위원장 출신의 김소연은 궁극적으로 정리해고 폐지를 주장한다. 정리해고 이전에 자산매각과 근로시간 단축, 순환휴직 실시, 전환배치, 전직 등 해고 회피 노력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세제를 개편하고 투기자본을 몰수해 노동자와 서민의 부채를 탕감하고 무상교육, 무상의료 시행과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김소연의 주장이 박근혜와 문재인보다 더 허황된가. 그렇지 않다.

청소 노동자 출신의 김순자 무소속 후보는 비정규직 철폐 법안과 함께 노동시간을 주 35시간으로 줄이자는 공약을 내놓았다. 김순자는 CBS 라디오와 인터뷰에서 “주 35시간, 너무 줄이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맞받아쳐 진행자를 머쓱하게 했다. 김순자는 “6년 일하고 1년 쉬는 유급 안식년 제도를 도입하자”면서 “교수님들은 안식년을 쓰는데 우리는 왜 못하느냐, 누구나 쉬면서 일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박근혜와 문재인도 비슷한 공약은 넘쳐난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여기에 박근혜는 비정규직 비율을 30%에서 10%로 줄이겠다고 하고 문재인은 임기 내에 절반 이하로 줄이겠다고 한다. 그러나 김순자는 “김대중·노무현 10년, 그리고 이명박 5년, 15년 동안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해 놓고 지금도 무슨 없는 법을 가지고 와서 어떻게 하겠다, 나는 그런 거 진정성이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 논쟁은 한국정치 퇴행의 징후다. 박근혜·문재인의 공허한 구호보다 김소연·김순자의 절박한 외침이 차라리 경제민주화에 훨씬 가깝다. 박근혜 대통령을 막는 것 못지않게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도 절박한 시대적 과제다. 이기기 위해 투표하는 게 아니라 질 걸 알면서도 옳은 가치에 투표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느리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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