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사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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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 출근 길에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던 참이었다. 옆에 서 있던 아저씨가 포장마차 주인 아저씨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어제 TV토론 보니까 문재인 말이야. 대통령 되면 건강보험을 5000원씩 올리겠다는 거야. 한심한 민주당 ××들. 안철수는 딱 재정지출을 줄여서 하겠다고 하는데 문재인 이놈들은 세금 올릴 생각이나 하고. 안 되겠더라고.”

건강보험 개인 부담 100만원 상한제는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공약 가운데 하나다. 진보진영의 제안을 문재인은 받고 안철수는 안 받았다. 이 지점에서 안철수의 전망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났다.

무상의료 좋은 걸 누가 모를까. 문제는 재원 조달이다. 그러나 안철수는 적당히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공약을 주워 담으려 하지 않았다. 진보진영에서는 5000원만 올리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안철수는 그것조차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거나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해서 거부했다. 그런 단호함이 안철수를 문재인과 구분 짓게 만들었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을 뛰어넘는 상식과 합리(또는 그렇게 보이는 것), 그게 안철수의 힘이었다.

실제로 안철수의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옳은 것이 늘 이기는 게 아니다. 그게 선거고 그게 정치다. 상당수 국민들은 개인 부담 100만원 상한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포장마차에서 만난 아저씨들처럼, 문재인은 손쉬운 증세를 선택한 반면 안철수는 판을 뒤집고 낡은 정치를 개혁하려 한다는 구도로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 반대의 상황이었더라도 문재인을 비난하면서 안철수는 지지하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현상은 정치 냉소와 정치 혐오에서 출발했지만 팬덤화하는 경향마저 보였다.

안철수가 새로운 정치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도 많았지만 사실 안철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낡은 정치를 바꿔야 한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지지자들이 열광했으니까. 실제로 안철수가 문재인보다 좀 더 왼쪽으로 가지 않은 이상 내놓을 수 있는 비전이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안철수의 공약 상당 부분이 문재인과 비슷하거나 좀 더 중도적인 성향을 보였던 것도 이 때문이지만 상당수 지지자들에게 그런 건 큰 의미가 없었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그나마 첨예하게 대립했던 이슈 가운데 의원 정족수를 줄이자는 제안은 새로운 정치라는 구호에는 잘 맞아떨어졌지만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해법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문재인은 TV토론에서 “의원 정족수 조정이라는 문구가 의원 정족수를 줄이자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딴죽을 걸었고 안철수는 “줄이지 않으면 늘리겠다는 말이냐”고 되물었다. 안철수는 이날 문재인의 태도에 분노와 회의를 느꼈다고 주변에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철수는 결국 사퇴를 했다. 안철수의 사퇴 기자회견을 TV로 지켜보던 문재인 캠프에서는 “백의종군하기로 했다”는 말에 “이겼다”는 함성이 흘러나오다가 안철수가 “새 정치의 꿈은 잠시 미뤄지겠지만”이라고 말하자 급격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한다.(새 정치는 나만 할 수 있다는 의미였을까.) “이제 야권 단일화 후보는 문재인”이라고 말했지만 안철수는 이날 기자회견을 굳이 ‘아름다운 양보’로 포장하지 않았다. 웃는 얼굴로 문재인의 손을 들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안철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향후 선거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모르지 않았겠지만 모든 비난과 책임을 문재인에게 떠넘기고 훌쩍 떠나 버렸다.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몽니를 부리는 모습은 언뜻 무책임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철수를 비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재인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면 꺼질까 건드리면 다칠까 안철수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건너온 다리를 불살라버렸다”던 안철수는 역시 정치인이었다. 공은 이제 문재인에게 넘어갔다. 다음달 19일 정권 교체에 실패하더라도 그건 안철수의 책임이 아니다. 문재인은 안철수의 도움 없이 박근혜를 이길 수 없고 문재인이 실패하면 안철수의 부재가 더욱 부각된다. 극단적인 가정을 하자면 정권 교체에 실패하더라도 안철수에게는 기회가 된다. 안철수는 아직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했지만 박근혜 5년이 더욱 안철수를 갈망하게 만들 것이라는 계산도 가능하다.

안철수의 지난 반년은 철저하게 계산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안철수는 미루고 미루다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지난 두 달여 동안 문재인 보다 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고 지지자들을 강하게 결속시켰다. 실체야 어떻든 안철수는 새로운 정치의 상징으로 유권자들의 표심을 뒤흔들었다. 안철수의 신비주의 전략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안철수는 철저하게 기성 정치와 거리를 두면서도 정작 구체적인 비전을 언급하지 않았다. 후보 등록 마지막 시한까지 시간을 끌면서 문재인이 단일화 경선을 포기하도록 만든 것도 훌륭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안철수의 지지율은 문재인을 압도할 정도로 크게 앞서지 못했고 그나마 TV토론 이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철수의 새 정치 담론은 정치 바깥에 있을 때만 가능했다. 안철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금요일 저녁, 안철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지지율이 5% 포인트만 앞섰더라도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끝까지 버티면서 문재인을 압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필요하다면 민주당에 입당해서 당권을 장악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는 막판 스퍼트에 실패했고 버티면 버틸수록 명분을 잃게 될 상황이었다. 삼자 구도로 대선을 치를 경우 그 책임을 혼자 뒤집어 쓸 거라는 판단도 했겠지만 그 보다는 지금 물러나는 게 정치인 안철수의 미래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당 기반이 없는 안철수로서는 그나마 잘 싸웠고 적절한 시점에 잘 물러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 안철수의 미래는 지금부터다. 지지자들의 열망을 저버렸다는 비판도 큰 부담이다. (안철수의 지지율이 안철수 개인이라기 보다는 안철수 현상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중도포기를 그렇게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옳았는지 의문이다.) 안철수가 정치인으로 살아남으려면 이번 대선 국면에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발휘하고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문재인과 공동 운명체가 될 수도 있고 문재인이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적당히 한 발 걸치면서 책임을 문재인에게 떠넘기는 전략을 선택할 수도 있다.

안철수의 집권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안철수 지지자들 상당수는 다시 정치 냉소와 정치 혐오의 부동층으로 돌아설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 안철수도 마찬가지다. 안철수는 이제 기성 정치권의 한복판에 들어왔다. 그가 꿈꿨던 새로운 정치 역시 낡은 정치의 바깥이 아니라 함께 부딪히면서 힘의 논리와 명분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안철수는 참신했지만 메시아는 아니었다. 안철수에게 기대했던 마법은 747 공약에 대한 환상만큼이나 허망했다. 국민들이 낡은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낡은 정치를 뛰어넘으려면 구체적인 비전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인 안철수가 풀어야 할 무거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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