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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평전, ‘중국지’.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6, 2012

마오쩌둥은 1966년 6월, 세 번째 부인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대란(天下大亂)은 천하대치(天下大治)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남긴다. “세상이 한 바탕 큰 난리를 겪어야만 큰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의미다. 문화대혁명의 격랑을 헤쳐 나가는 마오의 심리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눈길을 끄는 건 마오가 “중대한 문제에서 내 본심을 여겨가며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는 것은 내 일생에 처음”이라며 “불안하다”고 털어놓은 부분이다.

최근 출간된 마오쩌둥의 평전 ‘중국지’는 이 편지를 두고 “젊은 날 혁명가로서 불굴의 신념과 기개, 전쟁터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투쟁했던 마오의 흔적은 한 터럭도 찾아볼 수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인생 정리를 지척에 둔 73세의 무한 권력자가 내려놓고 비워야 할 권력에 대해 끝없는 집착을 드러내고 정변에 불안해 하는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허허로움을 더한다”는 평가도 의미심장하다.

마오도 절대 권력은 절대 패망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심연에 빠진 마오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57년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2천만명 이상이 굶어죽은 뒤였다. 자급자족적 공산주의를 건설한다면서 철강 생산을 독려했지만 품질이 낮아 아무데도 쓸 수 없었다. 농업 생산이 급감해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했지만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마오는 대약진운동의 책임을 지고 주석에서 물러나야 했다.

펑더화이 부주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당내에 일단의 좌경 편향성이 두드러졌다. 이를 테면 허풍이 생겨났다. 과학을 대신한 열정만으로 일거에 전국의 모든 사람이 돈 없이 밥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지방에서는 며칠 사이에 수없이 많은 집들을 철거해버렸고 짧은 시일 안에 문맹을 퇴치하겠다고 주장하는 등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소자산계급의 열광으로 나타났다.”

‘중국지’를 쓴 현이섭씨는 “역사는 만약을 허용하지 않지만 만약 이때 마오가 펑더화이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했다면 중국의 퇴보적 역사발전과 문화대혁명의 처참한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애석한 생각이 든다”고 평가하고 있다. 펑더화이는 결국 호된 비판을 받고 부주석에서 물러나고 마오는 흔들리는 권력을 잡기 위해 수정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게 문화대혁명이었다.

조반유리(造反有理). 마오를 지지하는 학생들이 조반하지 않으면 수정주의가 된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보내자 마오가 답신에 쓴 말이다. 반역에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다. 마오는 “나는 그대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는 말로 실권을 잡고 있었던 류사오치 주석과 덩샤오핑 총서기 등에 맞서라고 부추긴다. 전국적으로 이른바 홍위병들이 들고 일어났고 마오는 다시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글을 써서 이들을 자극한다.

문화대혁명의 절정은 1966년 8월18일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서 열린 군중대회였다. 마오는 전국에서 몰려든 100만 홍위병들 앞에서 사열을 받았다. 초록색 군복을 입은 마오가 연단에 서서 손을 들어 인사를 하자 홍위병들은 펄쩍펄쩍 뛰며 환호하고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홍위병들은 혁명조반이라는 명분으로 일반인들의 가택을 수색하고 가산을 몰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반동으로 매도해 때려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조반파들은 공안기관의 무기고를 탈취해 곳곳에서 극렬한 유혈 충돌을 빚었다. 그러나 마오는 “노동자 계급의 내부에 근본적인 이해 충돌은 없다”며 조반파의 만행을 방치했다. 중국 법원은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공식적으로 문화대혁명 기간에 72만9511명이 박해를 받았고, 이 가운데 3만48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추산된다. 연구 결과에 따라 최대 300만명이 죽었다는 분석도 있다.

문화대혁명의 경제적 손실은 5000억위안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약진 운동의 피해 규모를 더하면 6200억위안으로 불어난다. 중국 정부가 건국 이후 30년 동안 기반시설에 투자한 총액보다 큰 천문학적인 규모의 금액이다. 경제상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잃어버린 10년의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중국의 발전을 후퇴시켰다는 비판도 쏟아진다. 경제 발전의 호기를 놓치고 야만의 시대로 퇴보했다는 비판이다.

“혁명은 밥을 사는 일이 아니다. 글을 짓는 것이 아니다. 그림 그리고 수를 놓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우아하고 점잖고 고상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온화, 선량, 공경, 검약, 양보 등의 미덕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 혁명은 봉기다. 하나의 계급이 다른 하나의 계급을 엎어버리는 격렬한 행동이다. 농촌혁명은 농민계급이 봉건지주계급의 권력을 뒤집는 것이다.” 마오의 이 말은 많은 농민들의 좌우명이 됐고 문화대혁명을 이끄는 이론적 바탕이 됐다.

Tiananmen and flag of the PRC 2010 April @wikicommons.

‘중국지’는 마오의 불굴의 혁명가로서의 면모와 타락한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담아낸다. “적을 공격할 때 10개의 손가락을 상처 내봤자 손가락 하나를 확실하게 절단하는 것만 못하다. 같은 이치로 적의 10개 사단을 흠집 내봤자 1개 사단을 몰살시키는 것만 못하다.” 마오의 섬멸전 전술전략은 중국 혁명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잡은 뒤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활용된다.

스물다섯에 중국 공산당을 창립하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 서른넷에 주석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정은 웬만한 드라마나 대하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장제스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 군대의 추격을 피해 장장 9600km를 걸어서 탈출한 장정은 세계를 경악시켰다. 운하를 건너고 설산을 넘고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368일의 고난의 행군. 8만6000명 가운데 8500명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그 험난했던 역정을 설명해준다.

마오가 이끄는 홍군이 창사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화도 흥미롭다. 완벽 방어를 한 적군에 맞서 마오는 전국 시대의 화우충진 전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물소의 꼬리에 폭죽을 매달아 불을 붙이면 소들이 돌진해 적군의 방어망을 뚫을 수 있다는 발상에서였는데 폭죽 소리에 놀란 소들이 아군 진영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의 뿔에 받히거나 깔려 죽는 병사들이 부지기수였고 결국 맨몸으로 적군에 돌진했다가 성문 앞에서 널브러지고 말았다.

병사의 10분의 1을 잃으면서 추위와 배고픔에 쫓기는 고된 여정이었지만 이 때 지은 마오의 시는 기백이 넘친다. “높은 하늘에 엷은 구름 흘러가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아득히 멀어 보이지 않네.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사내 대장부가 아니지. 손가락을 꼽아보니 2만리 노정일세. 류판산 봉우리에 홍기가 서쪽 바람을 받아 펄럭이니, 오늘 내 손에 있는 긴 끈, 어느 때 적장을 결박지을 수 있을 거나.”

마오의 전략전술은 다음의 16자결 대련으로 응축된다.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한다(敵進我退). 적이 멈춰 진을 치면 우리는 교란한다(敵駐我擾).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한다(敵疲我打).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敵退我追). 유격전에 승산이 있다. 빠르게 진격하고 퇴각한다(大步進退). 적을 깊숙이 유인한다(誘敵深入). 병력을 집중한다(集中兵力). 각개 격파한다(各個擊破). 운동전으로 적을 섬멸하자.”

마오는 장제스에 쫓겨 궁벽진 만리장성 언저리 산베이 지역으로 도망가면서 두보의 시를 읊기도 했다. “번거로운 삼고초려 천하계책 받들어 두 대를 거쳐 보필한 늙은 신하의 마음.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 먼저 가니,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 흘려 옷깃 적시게 하네.” 마오는 제갈량을 애도하는 이 시에 감정 이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 번이나 기산을 공략했으나 결국 실패했던 제갈량이 남 같지 않았던 것일까.

에드거 스노는 ‘중국의 붉은 별’이란 책에서 장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넜다. 그 산맥 가운데 5개는 만년설로 덮여있었다. 그들이 통과한 성이 12개, 점령한 도시와 마을이 62개, 돌파한 지방 군벌군의 포위망이 10개였다. 한니발의 알프스 원정이나 모스크바에서 대패한 나폴레옹군의 퇴각 따위는 여기에 비하면 휴일의 소풍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사적으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내전은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진영의 대리전 양상을 보였다. 결국 장제스는 질 수 없는 전쟁을 졌고 마오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겼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도 시대정신을 판독하지 못해 부패하고 민심을 얻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1945년 8월 일본이 퇴각한 뒤 마오는 3년여의 전투 끝에 장제스를 몰아내고 1949년 3월 베이징에 입성했다.

흥미로운 건 현대 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 못지않게 권력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암투를 관찰하는 일이다. “오로지 나의 펑 대장군뿐이네”란 시를 써서 건네기도 했던 장정의 동지, 펑더화이가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수정주의자로 내몰려 퇴출된 뒤 홍위병들에 붙잡혀 폭행과 조리돌림을 당하는 과정은 소설과도 같다. 펑더화이는 암으로 죽고 난 뒤에야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된다.

첫 번째 부인 양카이후이의 마지막 장면도 감동적이다. 마오가 창사성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을 때 감옥에 붙잡혀 있던 양카이후이를 찾아간 기자가 묻는다. “마오와 부부 관계를 끝낸다고만 말하면 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마오를 사랑하는 것은 내 스스로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고귀합니다.” 기자가 다시 말한다. “당신은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자 양카이후이가 하는 말. “우리는 부부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전우입니다. 부부 관계를 끊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믿음에 비춰보더라도 배반행위입니다. 나의 인격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믿음은 절대로 바뀔 수 없습니다.” 양카이후이는 결국 스물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마오는 양카이후이의 죽음을 전해 듣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마오는 1959년 주석에서 물러났으나 린뱌오 등을 사주해 류사오치를 실각시키고 죽기 직전까지 막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문화대혁명이 마오의 권력 유지 수단이었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진 건 한참 뒤의 일이다. 한때 후계자로 불렀던 린뱌오가 마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마오와 갈등을 빚고 소련으로 망명하던 도중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도 영화 같은 스토리다.

텐안먼 광장에서 100만 홍위병을 호령했던 마오가 1976년 텐안먼 사건으로 물러났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한때 숙청당할 위기에 몰렸던 덩샤오핑이 마오가 죽고 난 뒤 정권을 잡고 문화대혁명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학살과 소요사태의 책임이 마오에게 있다고 인정한 것도 권력무상을 실감하게 한다. 덩샤오핑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자제하면서 공은 공이고 과는 과라고 선을 그었다.

마오의 71세 생일 때 일이다. “나는 늙었다, 얼마 있다가 마르크스를 보러 갈지도 모른다”고 말을 꺼낸 마오는 “전국 기층의 3분의 1의 영도권이 나의 수중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수정주의의 출현은 자산계급이 정치무대에서 흥기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회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마오는 “자본주의의 길로 가는 영도자는 노동자들의 피를 빠는 자산 계급분자가 됐다”면서 “이들은 투쟁의 대상이고 혁명의 대상”이라고 비판했다.

마오는 죽기 직전까지 권력을 탐했다.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신념을 거슬러 대중을 선동하고 전장에서 함께 살아 돌아왔던 동지들을 내쳤다. 평생 혁명을 팔았지만 민중의 피로 얼룩진 혁명은 길을 잃었고 그의 사후 중국은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붉은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마오에게서 미완의 혁명의 향수를 느끼지만 이 책은 말년의 마오가 결국 욕망으로 가득 찬 탐욕스런 늙은이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마오가 진시황을 평가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기록을 살펴보면 마오는 1926년 강연에서는 진시황의 악정을 견디다 못해 깃발을 들고 일어선 농민들의 투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1958년 연설에서는 진시황을 옹호한다. “그는 단지 460명의 유가를 땅에다 묻었지만 우리는 4만6000명의 지식인을 묻었다. 우리가 반혁명분자를 진압할 때 일단의 반혁명 지식분자들을 죽이지 않았나. 우리를 진시황이라고 욕하는 것은 독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르크스와 진시황을 결합해야 한다”거나 “민주와 집중을 결합해야 한다”면서 진시황의 절대 권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진시황이 공자보다 더 위대하다”고도 했다. “중국의 지난날 봉건군주들 중에서 그를 초월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수천 년 동안 욕을 얻어먹고 있다. 욕을 먹는 것은 두 가지다. 460명의 지식인을 죽이고, 책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말년의 마오는 진시황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지’는 용쟁호투편과 대란대치편으로 나뉜다. 용쟁호투편이 구국제민(救國濟民)과 새로운 중국 건설을 열망하는 중국공산당의 생성과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벌이는 혁명투쟁을 그렸다면 대란대치편은 건국 이후 균열하는 노선상의 이념갈등과 권력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다툼을 파고든다. 음모와 배리, 잔혹 무비한 권력투쟁과 숙청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해 혁명을 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1980년 해직 기자 출신으로 한겨레 기자와 편집부국장을 거쳐 미디어오늘 사장을 지냈던 현이섭씨는 장장 원고지 7000매 분량의 이 책에서 “권력의 노예가 되어 동지를 주살하는 권력의 부나비들과 그들의 하수인인 인간 사냥꾼들이 벌이는 권력놀음은 인간 존재를 부정하게 한다”면서도 “비정한 권력의 세계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 인간애는 여전히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지적한다.

중국지 / 현이섭 지음 / 인카운터 인물과사상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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