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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없는 선거를 또 치를 참인가.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18, 2012

영화 매트릭스에서 데자뷰 현상은 시스템 오류의 신호다. 처음 가는 곳인데 어딘가 낯이 익거나 언젠가 이런 상황을 경험한 것 같은 느낌, 기시감은 기억의 착각이나 신경세포의 혼란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개의 시각경로를 따라 두뇌에 전달되는 정보의 시차가 0.025초 이상 벌어질 경우 별개의 경험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학설도 있고 신경 세포의 정보 전달 과정에서 유사한 패턴을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우리는 반복되는 역사에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할 때가 많다. 지난 4월11일 우리는 KBS와 MBC, 두 공영방송이 정치권력에 완전히 장악된 상태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정권 교체의 열망이 뜨거웠고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열풍이 거셌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나꼼수는 찻잔 속 태풍일 뿐, 조중동과 지상파의 카르텔을 넘지 못했다는 반성이 뒤늦게 쏟아졌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은 나꼼수 진행자인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의 8년 전 막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이명박 심판은 김용민 심판으로 변질됐다. 막말 파문은 모든 이슈를 집어삼켰다. 조중동의 어젠더는 그대로 지상파 방송으로 흡수됐다. 파업 중이던 KBS와 MBC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낙하산 사장들이 점령하고 있던 두 공영방송은 본질을 호도하고 쟁점을 희석하고 정치 무관심을 확산시켰다.

선거를 이틀 앞두고 민간인 불법사찰 문건이 무더기로 공개됐는데 조중동 등 보수언론은 문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작성된 것이라는 반박에 무게중심을 뒀다. 야권은 불법사찰과 합법감찰은 다르다며 반박했지만 불법사찰 이슈의 파괴력은 급격히 수그러들었다. 야권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와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등의 구호를 내걸었지만 큰 울림을 얻지 못했다.

올드 미디어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보수 언론의 의제 설정 기능은 여전히 강력하다. 선거를 앞둔 3월10일부터 4월10일까지 한 달 동안 지상파 뉴스 시청률을 분석한 결과 KBS와 MBC의 평균 시청률은 각각 19.0%와 5.3%였고, 최고 시청률은 KBS가 25.4%(4월9일), MBC가 6.9%(3월13일)였다. 4월9일 KBS 뉴스를 본 시청자들은 TNmS 분석 결과 446만 명에 이른다. 여기 비하면 나꼼수는 새발의 피였다.

다섯 달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KBS와 MBC 모두 파업을 접었지만 파업 참가 인원의 상당수가 아직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현장을 뛰어다녀야 할 기자들이 브런치 교육을 받거나 건설 현장사무소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MBC PD수첩 작가들이 전원 해고되는 사상 초유의 일도 벌어졌다. 정부 비판적인 취재 아이템이 삭제되거나 방송이 통째로 불방되는 사태도 계속되고 있다.

낙하산 사장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는 김재우 이사장을 연임시켰고 KBS는 5공화국 시절 땡전뉴스의 주역이었던 이길영 전 KBS 감사를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이명박 정부는 공영방송의 편향성 논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는 12월19일 대통령 선거 때까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비판 여론을 겁박하면서 정부 여당에 유리한 구도를 끌고 가겠다는 의도다.

KBS와 MBC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인민혁명당 발언 논란을 제대로 중계하지 않았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의 미확인 루머를 확대 재생산하는 과정에서는 최소한의 저널리즘 원칙 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공영방송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다. 뉴스 없는 선거는 지난 4월의 경험으로도 충분하다. 더 늦기 전에 공영방송의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한다. 이런 KBS와 이런 MBC로는 공정한 대선을 치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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