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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고종석 오보 사진과 30년 전 고숙종 사건의 교훈.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2, 2012

내 얼굴이 신문 1면에 났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이 바로 일곱 살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범인이다”라는 사진 설명과 함께.

한 신문의 실수로 졸지에 성폭행범으로 얼굴이 팔린, 이 청년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죽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오보 사실을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처음 알린 친구에 따르면 “제 친구는 생매장 당하게 생겼는데 정정기사도 안 된다, 실수다라는 말만 들려오니 친구 입장으로선 안타까울 뿐”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오후 5시께야 오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조선일보는 2일 온라인 머리기사로 올린 정정보도문에서 “고종석(성폭행범) 주변 인물의 미니 홈페이지 등을 검색하던 중 CCTV 화면 등에 나오는 고종석과 닮아 보이는 인물 사진을 찾아냈다”면서 “고종석에게 직접 확인을 시도했으나,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일반인은 물론 취재진의 접촉이 차단돼 본인 확인을 못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고종석을 직접 대면한 경찰관에게 본지 기자가 확보한 사진을 보여주고 ‘(고종석이) 맞구만. 확실하구만’이라는 등의 증언까지 확보한 뒤 서울 지역 일부 지역에 배달되는 최종판에 게재했다”고 설명했다. 다음날 사진의 주인공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고종석을 접촉해 고종석으로부터 직접 “사진 속 인물은 내가 아니라 주변 인물”이라는 답변을 듣고 사진이 잘못 게재된 것을 확인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취재팀은 1일 새벽 1시경까지 고종석을 호송한 경찰, 고종석을 조사한 경찰 및 수사관계자, 고종석이 드나든 PC방에서 고종석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 고종석을 제보한 것으로 알려진 주민 등 10여명으로부터 ‘고종석이 맞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했다는 의미겠지만 범인의 이름만 공개된 상태에서 주변 사람들의 추측만으로 닮은 사람을 범인으로 특정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조선일보는 “2009년 경기 남서부 연쇄 살인범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국민 알 권리와 공익을 위해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는 범인이 확실하면 수사 단계부터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강호순 사건 이후 신문윤리강령을 개정해 흉악범 얼굴 사진 공개 여부를 언론사의 개별 판단에 맡기고 있다. 조선일보는 강호순과 조두순, 김길태 등의 얼굴을 공개했고 이는 상당수 언론사에서 관행으로 자리잡는 추세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공개가 다시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신상공개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증거가 분명하고 범행을 시인한 흉악범의 얼굴은 공개돼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알 권리 이야기도 나온다. 중앙일보는 “흉악범 얼굴 가리는 건 인권 앞세운 위선”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흉악범에게 인권은 사치라는 주장과 함께 사형제를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강호순 사건 당시 “피의자의 신상은 알 권리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정보라고 보기 어려우며 신상을 공개한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언론사들이 보도 경쟁에 매몰되다 보니까 피의자 신상을 공개한 언론사는 남보다 앞서 공개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그렇지 않은 언론사는 스스로 뒤쳐진 느낌을 받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심지어 보수 성향의 자유선진당에서도 “흉악범의 개념과 범주가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치안유지에 대한 국민적 불안이 고조된다는 점을 악용해 피의자 단계부터 신상을 공개하겠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라며 “범죄예방과 사회안정은 정부와 공권력이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책무인데 이것을 얼굴과 이름 노출로 달성하려는 시도는 참으로 전근대적인 인권 후진국가에서나 나올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논란이 뜨거웠던 3년 전과 비교하면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이 얼마나 둔감해졌는지 실감할 수 있다. 조선일보가 엉뚱한 사람의 사진을 공개한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근본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이런 억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고 피의자 인권 보호가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 와중에 불심검문을 강화하겠다며 설레발을 치고 있다.

언론인권센터 윤여진 사무처장은 2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이같은 오보는 정정보도 차원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송을 통해 구제 받아야 한다”며 “언론사마다 흉악범죄자의 얼굴공개에 대한 기준이 다른데, 하루빨리 공통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피의자 신상공개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1981년 윤 노파 살해 사건이다. 살인사건 용의자로 붙잡혔던 고숙종씨는 범인이 분명해 보였다. 당시 신문들은 “물증이 나와도 범행을 시인하지 않는 세상에 둘도 없는 끈질긴 여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고씨의 현장검증 사진을 모자이크도 없이 게재했다. 이 사진들은 신문지면에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고씨는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5년 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 승소했다.

이런 기사도 있었다. “한편 고씨는 이날 하오 6시15분께 수사본부의 사건전모 발표현장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검은색 반짝이 원피스차림에 흰 운동화를 신은 고씨는 체념한 듯 시종 흰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채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나를 어서 죽여달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고씨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이 모든 고백이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참고 : 살인범 얼굴 공개의 무모함 http://benedict.tistory.com/209)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고숙종 사건과 관련, ‘기자 조갑제의 세계’에서 이런 평가를 남긴 적 있다. “경찰은 헌법이 보장한 ‘확정 판결 이전의 무죄 추정’ 원칙을 파괴하고 피의사실 공표죄를 스스로 범하는 해괴한 기자회견을 마련했고, 언론은 스스로의 판단력을 포기, 경찰의 판단에 편승해, 한 여인에게 정신적 뭇매를 가했던 것이다. 확정판결 이전에 피의자나 피고인을 범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기자가 스스로 판사가 되려는 행동이다.”

이런 준엄한 비판을 쏟아냈던 조갑제씨가 조선일보의 희대의 사진 오보 사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고종석은 성폭행범이 분명해 보인다.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한 흉악범인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지, 범죄 예방에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30년 전 고숙종 사건 때도 본인이 자백을 했고 명백한 증거도 나왔지만 나중에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다. 고숙종의 얼굴 사진은 불안과 분노를 부추겼지만 사건의 해결이나 유사 범죄의 예방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조선일보가 성폭행범 고종석이라며 사진을 내 건 개그맨 지망생이라는 이 청년은 이번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됐지만 그 피해자가 다음에는 우리 중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와 무죄 추정의 원칙은 고종석의 인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고종석의 인권이 지켜질 때 우리의 인권도 지켜진다. 언론의 여론재판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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