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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와 백차, 청차, 홍차, 흑차.

Written by leejeonghwan

May 28, 2012

삼국지는 유비가 2년 동안 돗자리를 짜서 번 돈으로 차를 사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유비가 차를 살 돈이 부족해서 보검에 붙은 보석을 떼서 줬다거나 아예 보검을 팔았다거나 장비가 황건적에게 쫓기던 유비의 목숨을 구해줘서 유비가 사례로 장비에게 보검을 줬다거나 판본에 따라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렇게 목숨을 걸고 쫓고 쫓길 만큼 비싸고 귀한 차는 도대체 무슨 차였을까. 요즘 시세로 하면 차 한 단지에 500만원 이상은 하지 않았을까.

유비가 낙양에 가서 사왔던 그 차는 용정(룽징)차라는 설도 있고 보이차라는 설도 있다. 그냥 낙양차라고 번역된 판본도 있지만 낙양(뤄양)은 차 산지가 아니라서 아마 낙양에서 사온 차라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삼국지의 배경이었던 위진남북조 시대에만 해도 지금처럼 차 마시는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 무렵 차는 기호식품이라기 보다는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을 샘솟게 하는 기적의 약초에 가깝지 않았을까.

나는 커피를 거의 안 마시기 때문에, 어쩌다 커피숍에 가도 마실 게 마땅치 않았다. 취재원들을 커피숍에서 만날 때면 그나마 에스프레소를 시키거나 과일주스나 녹차라떼 정도? 주말 오후 사루비아다방에서 일을 하면서 이런 저런 차를 마시다 보니 어디 한 번 차를 제대로 공부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미묘한 맛과 향의 차이를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하고 보니 차를 좀 더 즐기면서 마실 수 있게 됐다.

차는 차나무 잎을 달이거나 우려낸 물을 말한다. 차나무는 국화군 진달래목 차나무과의 식물이다.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a Sinensis). 잎의 크기에 따라 대엽종과 중엽종, 소엽종으로 나뉘는데 원산지는 중국의 쓰촨성과 윈난성, 구이저우성에서 미얀마와 인도의 아삼 지방으로 이어지는 산악지대로 추정된다고 한다. 열대성 기후지역인 중국 서남부와 인도 북부에서 대엽종이 잘 자라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북쪽에서는 중엽종과 소엽종이 잘 자란다.

녹차니 홍차니 하고 색깔을 붙여 부르는 건 발효(산화) 정도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다. 찻잎을 따서 시들리고 덖거나 찌고 비비고 건조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맛과 향의 차가 된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녹차는 소엽종 찻잎을 따서 고온에서 덖거나 쪄서 살청(殺靑)을 한다. 살청은 푸른 기운을 뺀다는 말인데 산화를 중단시키는 효과가 있다. 산화 정도에 따라 녹차<황차<백차<청차<홍차<흑차로 구분한다. (깎아놓은 사과의 갈변현상을 생각하면 쉽다.) 여기서 말하는 발효는 사전적인 의미의 미생물 발효와 좀 다르다. (보이차는 미생물 발효니까 또 다르지만) 정확하게는 찻잎의 폴리페놀 성분인 탄닌(카테킨)이 산화효소인 폴리페놀 옥시디아제에 의해 산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탄닌이 데아플라빈이나 데아루비킨으로 변하면서 떫은 맛이 줄어들고 색이 누렇거나 붉게, 또는 검붉게 바뀐다. 항산화 물질인 폴리페놀은 활성산소를 억제해 항암과 노화방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산화를 굳이 발효라고 부르는 건 산화 과정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이전에 붙여진 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화라는 말이 갖는 어딘가 부정적인 느낌을 피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산화는 말 그대로 산소와 결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산화된 폴리페놀이 항산화 물질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항산화 물질이라고 할 때 항산화는 호흡과정에서 생기는 과잉 활성화 산소를 제거해 세포의 산화(노화)를 막는다는 의미다.

(White, Green, Oolong, Black, Puerh. http://www.flickr.com/photos/linnybinnypix/6105319320)

녹차가 떫으면서도 푸른 찻잎의 기운이 살아있다면 백차는 깊은 산 속 약수처럼 맑고 깊은 맛이 느껴진다. 잘 우려낸 청차는 이슬이 내린 화려한 꽃 향이 난다. 홍차는 나무껍질 향에 좀 더 무거운 느낌이다. 우유랑 타서 먹거나 설탕을 넣어서 먹기도. 흑차는 좀 더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가볍게 마시기에는 청차가 좋고 기운을 북돋우기에는 백차, 나른한 오후 정신을 차리기에는 홍차가 어울린다고.

녹차는 산화 정도가 10% 미만으로 가장 낮다. 덖는다는 말은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힌다는 의미인 듯, 이걸 가열살청이라고 하고 수증기로 쪄서 익히는 걸 증제살청이라고 한다. 일본의 녹차가 좀 더 푸른 빛을 띠고 떫은 맛이 강한 건 증제살청 방식으로 짧게(30~60초) 열을 가해 산화 시간을 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녹차는 가열살청 방식으로 만든는데 이 과정에서 산화가 좀 더 진행돼 약간 황녹색을 띤다.

백차는 대엽종 찻잎으로 만드는데 긴 시간 동안 시들려서 살청 없이 산화를 시킨다.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산화되기 때문에 산화 정도가 15% 정도로 낮다. 시들리는 과정을 위조(萎凋, withering)라고 한다. 백차는 시들린 다음 바로 건조에 들어가지만 청차(우롱차)는 흔들기(요청, 搖靑)를 한 다음 덖고 비벼서(유념, 柔捻) 풍성한 향을 만들어 낸다. 청차의 산화 정도는 가공 방식에 따라 15~75%까지 다양하다. 백차는 약발효차, 청차는 반발효차라고 부른다.

홍차는 완전발효차다. 홍차와 녹차를 같은 식물의 잎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지만 홍차는 산화 정도가 85%, 완전발효차라고 부른다. 홍차는 살청 없이 시들려서 비빈 다음 천천히 산화를 시킨다(살청을 하는 홍차도 있다고 한다). 언뜻 백차와 비슷한 것 같지만 산화 과정을 따로 둔다는 게 다르다. 24~25℃의 적당한 온도와 95%의 높은 습도에서 산화 속도를 높여주는 게 관건이다. 산화 과정은 2~5시간 정도, 산소 공급이 충분해야 한다고 한다.

홍차는 중국홍차와 인도홍차, 스리랑카(실론)홍차가 있다. 푸젠성 우이산에서 난 정산소종을 맛과 향에서 최고로 치지만 특유의 솔잎 훈연 향 때문에 평가가 엇갈린다고. 윈난성 대엽종으로 만든 전홍은 화려한 꽃 향을 낸다. 영국이 중국과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발굴한 대체 산지가 인도 아삼지방이다. 머스캣 향이 독특한 다즐링티는 홍차의 샴페인이라고 불린다. 아삼티는 무겁고 깊은 몰트 향을 낸다. 영국에서는 홍차를 흑차(Black tea)라고 부른다.

(Green, black, white, pureh and oolong teas. http://www.thestar.com/living/food/article/931528–would-you-send-over-the-tea-sommelier-please)

청차와 홍차는 산화 방식이 다르다. 청차는 시들리고 흔들어서 찻잎에 스트레스를 주면서 천천히 산화를 시킨 뒤 적절한 시점에 덖어서 살청을 한다(산화를 중단시킨다). 반면 홍차는 찻잎을 강하게 비빈 다음 살청 없이 산화를 시킨다. 황차도 있다. 황차는 덖고 비비고 건조하는 과정이 녹차와 비슷하지만 건조한 찻잎을 다시 퇴적해 후발효(미생물 발효)시키는 민황(悶黃, yellowing) 과정이 추가된다. 녹차와 흑차의 중간 정도가 되는 셈이다.

흑차는 후발효차라고 부른다. 발효라는 말이 애초에 산화를 잘못 오해해서 만든 말이라서 진짜 발효라는 의미에서 후발효차라고 부르는 듯. 흑차는 살청을 하고 난 뒤 비비고 건조시킨 뒤 오랜 숙성과정에서 진짜 발효를 시킨다. 온도 20℃, 습도 85%에 두고 발효시키는 과정을 악퇴(渥堆)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찻잎에 흑국균이라는 곰팡이가 핀다. 흑국균은 찻잎의 지방과 단백질, 팩틴을 분해해서 특유의 향과 함께 달고 부드러운 맛을 만든다.

윈난성 대엽종으로 만드는 보이(pureh)차가 대표적인 흑차다. 보이차는 보이생차(생병 또는 청병)와 보이숙차(숙병)로 나뉘는데 보이생차는 180℃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덖어서 천천히 건조시킨(쇄청, 晒青) 다음 단단하게 눌러서(긴압, 緊壓) 만든다. 언뜻 녹차와 비슷해 보이지만 쇄청은 살청과 달리 효소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아 계속해서 발효가 진행된다. 보이생차가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흑차가 되는데 이 과정을 압축시켜 만든 것이 보이숙차다.

보이차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잘못된 속설이 퍼져있고 그만큼 비싸기도 하지만 일반인들이 진짜 좋은 보이차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고. 곰팡이 핀 가짜 보이차를 비싸게 구입하는 경우도 많다는데 좋은 보이차는 잎이 뭉개지지 않고 살아있고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으며 목 넘김이 부드럽고 상쾌하다고 한다. 잘 만든 진짜 숙성된 보이차를 구할 게 아니라면 제대로 만든 보이숙차를 사거나 차라리 보이생차를 사서 직접 익혀서 먹는 게 낫다고.

산화 정도가 높을수록 더운 차가 된다고 하는데. 불발효차인 녹차는 매우 차가운 차라고 할 수 있다.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 녹차나 백차는 끓인 물을 막 붓기 보다는 70~85℃ 정도로 식혀서 붓는 게 좋다고 한다. 고급 차일수록 낮은 온도에서 짧게 우려내는 게 좋다고 한다. 홍차나 흑차는 뜨거운 물을 붓는 게 어울린다고 한다. 일아일엽의 고급 차일수록 폴리페놀 성분이 많지만 그만큼 카페인도 많다고.

차에 들어있는 카테킨은 기초 대사량을 늘려 체지방을 산화하고 중금속을 제거하고 니코틴을 해독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테아닌은 차에만 함유된 천연 아미노산 성분인데 두뇌의 알파파를 증진시켜 정신을 안정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차에는 커피 보다 훨씬 많은 카페인이 들어있지만 카테킨과 테아닌이 카페인을 중화시켜 체내 흡수를 줄여주기 때문에 카페인의 부작용을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정말 귀하고 좋은 차는 아껴서 먹게 된다. 열이 많고 다혈질인 나는 요즘 백모단(백차)을 하루 1리터 이상 마시면서 정신을 다스린다. 고된 원고 마감 끝에 정말 몸이 늘어질 때는 백호은침(백차)을 홀짝홀짝 마신다. 백호은침은 이른 봄, 흰 솜털이 난 새 순을 따서 만드는데 1kg을 만들려면 7kg의 찻잎이 필요하다고 한다. 깊은 숲속 맑은 약수 같은 정말 좋은 백호은침을 파는 곳은 찾기 어렵다고. 백모단과 백호은침의 가격 차이는 세 배 이상.

백호은침은 특히 십불채(十不采)라고 해서 비 오는 날과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날을 피해 가늘고 마른 싹과 자줏빛 싹, 바람에 상한 싹, 인위적인 손상을 입은 싹, 벌레 먹은 싹, 속이 찢어진 싹, 속이 빈 싹, 병이 있어 구부러진 싹은 따지 않는다고 한다. 김인민 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물인 듯 차인 듯 하고 첫 맛은 물처럼 흘러 넘어가고 끝 맛은 과일단향과 야생화향을 품은, 세상엔 없는 맛있는 물, 어쩌면 신의 음료, 넥타르”일 수도.

달빛에 말린다는 월궁항아도 마셔보고 싶다. 월궁항아는 다른 백차와 달리 후발효를 시킨다. 만드는 방법도 까다롭고 생산량이 많지 않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향이 분분하고 잘 익은 멜론맛과 꿀맛이 어우러진 고혹적인 명품 백차라는데. 대관다론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줄기가 널리 흩어져 뻗은 것이 분명하고 찻잎은 밝고 얇다. 백차는 벼랑과 숲 사이에 가끔씩 생기는데 사람의 힘으로 인위적 재배방법으로는 만들 수가 없는 차다.”

윈스턴 처칠이 즐겼다던 정산소종(홍차)은 담배 생각이 날 때 어울릴 듯. 김인민 대표의 표현처럼 자신을 학대한다는 느낌으로 나른한 오후 위스키 한 잔 대신 마시는 차. 화려한 꽃 향의 운남홍차와는 또 다른 맛. 커다란 봉지에 가득 든 백모단이 다 떨어지면 중후하고 스모키하다는 철관음(청차)이나 여름 소낙비에 젖은 푸른 꽃향기가 난다는 문산포종(청차), 향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는다는(통천향, 通天香) 봉황단총(청차)에 도전해 볼까 싶기도.

포도주를 흔히 신의 물방울이라고 부르지만 차도 좋은 햇볕과 바람, 좋은 비와 구름을 만나야 하는 자연의 선물이다. 좋은 차는 몸을 가볍게 하고 머리를 맑게 만든다. 파릇파릇한 찻잎을 고이 우려낸 차는 삶을 관조하는 여유를 불러오고 역동하는 생명의 힘과 드넓은 대지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찻잎 한 움큼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마법이다.

(사루비아다방 티클래스 수업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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