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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싫어하는 말 하려면 30일 뒤에 하라?

Written by leejeonghwan

October 7, 2011

감시사회를 말한다 ④ 신고만 받으면 일단 차단, 임시조치 이대로 좋은가.

“듣보잡을 듣보잡이라 부르지 못하고.” 시사평론가 진중권씨가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를 ‘변듣보’로 지칭한 글이 삭제되자 남긴 글이었다. ‘듣보잡’이란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란 뜻의 인터넷 속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명예훼손이 될 수 있는 표현이다. 우리나라에는 임시조치라는 제도가 있어 이런 경우 변 대표가 진씨의 글이 올라있는 포털 사이트에 신고만 하면 문제의 글을 최장 30일까지 차단시킬 수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 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네이버와 다음, 네이트, 싸이월드 등 4개 포털 사이트의 임시조치 건수가 12만4319건에 이른다. 평균 월 5천건 이상의 게시물이 차단 됐다는 이야기다. 미디어오늘이 확인한 결과 지난해에는 네이버에서만 명예훼손이나 초상권 침해 등의 이유로 임시조치된 게시물이 8만5천여건, 다음에서는 5만8천여건으로 불어났다. 월 평균 1만건이 넘는 셈이다.

진씨의 글은 명예훼손 소지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명예훼손 여부를 가리지 않고 상대방의 일방적인 주장과 신고만으로 게시물이 차단된다는 데 있다.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또는 자신에게 불리한 주장이라는 이유로 명백한 사실이나 합리적인 주장을 차단하는 경우도 많다. 피해자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가해자(라는 의혹을 받는 사람)의 권리도 배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터넷 게시물 임시조치의 유형은 다양하다. “동영상 소프트웨어인 곰플레이어가 개인정보를 수집 및 유출한다”는 의혹을 제기한 게시물이 삭제된 적이 있었다. 곰플레이어를 만드는 그레텍이 이 글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신고했기 때문이다. 시멘트 회사들이 유해한 건설 폐기물을 시멘트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최병성 목사의 글이 삭제된 적도 있었다. 시멘트 회사들은 최 목사가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이미 공개된 사실을 옮겨 적었는 데도 임시조치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주성영 퇴진] 만취한 채 민폐를 끼치는 주성영의 싸이월드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주소를 남긴 글도 삭제됐다. 어청수 전 경찰청장의 동생이 투자한 호텔에서 불법 성매매가 이뤄지고 있다는 내용의 동영상이 삭제되기도 했다. 부산 MBC의 방송 내용을 그대로 옮겨 담았을 뿐인데 이 글도 명예훼손을 이유로 삭제됐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2009년 4월 탤런트 장자연씨 사망 사건과 관련,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글을 다음 아고라 토론방에 올렸다가 차단되자 강력히 항의, 다음이 방통심의위에 심의를 요청해 복구됐다. 이처럼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합리적인 문제제기와 토론까지 차단 당하는 경우도 많지만 대개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이 의원의 경우는 오히려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랜드와 뉴코아 노동조합의 파업을 다룬 기사를 인용한 글이 무더기로 임시조치된 적도 있었다. 단순히 기사를 스크랩하고 간단히 몇 줄 의견을 덧붙인 글인데도 삭제됐다가 30일 뒤에야 복구됐다. 2008년 7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의 광고주 불매운동이 벌어졌을 때 광고주 목록을 적은 게시물들이 무더기로 삭제되기도 했다. 이때도 이들 언론사의 신고를 받고 게시물 작성자들에게는 아무런 통보도 없이 접근 제한 조치됐다.

이밖에도 어린이 동화책의 가격을 여러 매장에서 비교해 최저 가격을 알려주는 글이 차단되거나 영화 예매 사이트에 불만을 털어놓은 글이 삭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임시조치가 비판 여론을 묵살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는 숱하게 많다. 경찰의 과잉 진압을 비판하는 글이 초상권 침해를 이유로 임시조치되기도 했고 정치인 관련 게시물이 삭제되는 건 일상적인 일이다.

이처럼 내용의 진위 여부와 관계 없이 신고가 들어오면 일단 차단하고 보는 게 임시조치다. 포털 사이트들은 권리침해 요청이 들어오면 개인정보 노출이나 초상권 침해 등의 경우는 영구적으로 삭제 처리하고 권리침해 여부가 불명확한 경우 30일 동안 접근제한 조치를 한다. 30일이 지나도 복원 신청을 하지 않을 경우는 영구 삭제, 복원 신청이 있을 경우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해 복원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통망법) 44조 1항에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일반에게 공개를 목적으로 제공된 정보로 인하여 법률상 이익이 침해된 자는 해당 정보를 취급한 정보통신 서비스 제공자에게 당해 정보의 삭제 또는 반박내용의 게재를 요청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2항에는 “당해 정보의 삭제 등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지체 없이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이를 즉시 신청인에게 통지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임시조치는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의 게시물을 차단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명예훼손 피해를 보호하려고 만든 제도가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는 셈이다. 단순히 특정 기업이나 제품에 부정적인 내용의 글을 썼다는 이유로 게시물이 접근제한 조치되거나 삭제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당한 문제제기나 비판이 차단되고 여론을 왜곡하는 사례도 많다.

게시물 작성자에게 아무런 사전 통보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포털 사용자들의 글만 손쉽게 차단된다는 것도 문제다.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 게시물의 경우 자의적으로 차단할 방법이 없지만 포털은 신고만 들어오면 아무런 판단 없이 자동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임시조치를 당하더라도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입증해야 하는 등 구제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워 일반인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현행 정보통신망법에서는 포털 사이트들이 권리침해 신고를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방조 책임을 지도록 돼 있다. 임시조치가 면책 요건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한 포털 사이트 관계자는 “포털이 명예훼손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라 신고가 들어올 때마다 접근 제한을 하고 복원 요청이 있을 경우 방통심의위에 심의를 요청하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말했다.

방통심의위 통신분과 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 헌법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표현이 제약될 수 있다고 했지 누군가에 의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되는 표현이 제약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면서 “임시조치 제도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합법적인 게시물들을 일정 기간 동안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명백한 위헌”이라고 말했다.

한편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달 20일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분쟁의 소지가 있는 임시조치 제도를 개선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방통위 발표에 따르면 게시물을 삭제하기 전에 작성자에게 사전 통보를 하도록 하고 이의신청이나 구제절차 등을 추가할 전망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제도를 수정하지 않는 이상 무차별한 게시물 삭제 관행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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