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인간 연산’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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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연극을 봤다.)

“만년에는 더욱 황음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 (烙: 단근질 하기), 착흉(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 가운데.



뒤늦게 정현왕후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얻기는 하지만 연산군의 어머니는 그동안 내내 폐비 윤씨라는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불렸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궁궐에서 ㅐㅉㅗㅈ겨나 결국 사약을 받고 죽어야만 했던 비운의 왕비. 연산군이 뒤늦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피비린내 나는 복수는 어쩌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음모였다. 연산군의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은 것부터 연산군이 어머니를 죽인 신하들을 찾아 죽이는 것까지 모두 권력을 둘러싼 어두운 음모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고 음모에 휘말려 들고 결국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복수를 한다고 한들, 잘못된 역사가 바로 잡힐까.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는데 몇사람 목숨만으로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수선했던 정치 상황이나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 탓으로 돌리기에도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당신은 누가 뭐래도 한 나라의 왕 아니었던가.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온통 적의에 둘러싸여 있었던 당신에게 역사는 가혹하기만 했다. 당신은 왕이었으면서도 너무 가볍고 너무 무력했다. 조선의 국운은 아마 당신의 대에서 굴절되고 크게 기울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500년이나 지난 뒤에 이 연극이 과연 당신의 서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을까. 당신을 용서하지는 않지만 이해하고 기꺼이 동정하려는 이 연극이 말이다.

연산군 즉위 12년 되던 해, 1506년 9월 성희안과 박원종, 유순정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나고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이 왕에 오른다. 이른바 중종반정이다. 연산군은 어머니처럼 궁궐에서 쫓겨나고 그해 병으로 죽는다.


(대본에서 몇 문장을 발췌합니다. 정말 신나는 부분.)

연산 = 흥, 내가 왜 공자 말을 따르느냐. 내가 중국놈이냐?!
대신5 = (통곡) 아이고. 나라를 망치는 말을 어찌 그리 함부로 합니까.
연산 = 유감스럽게도 내 말이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6 = (울면서) 유감스럽게도 신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하의 성품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학문이 완성되지 못했으니 허물이 있을 것은 당연한 이치. 신등의 말을 따르십시오!
연산 = 그래, 나는 아직 어린 몸으로 선대의 왕업을 이어받고 조정대신들의 이해와 백성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어야 할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내 덕이 원만치 못하고 행실이 수양되지 못하여서인지,아니면 나와 신들의 심정이 막혀서 그런지, 아니라면 어린 임금의 기세를 미리 꺾어 자네들 손아귀에 쥘려는 더러운 힘의 논리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권세 있는 자들이 그 권세를 잃기 싫어 내 정사를 고의로 방해하려는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나와 자네들은 이렇게 적대적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죽어 시샘도 질투도 수렴 청정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내 어머니, 그런 어머니 재 한번 올려주겠다는 것이 그리 큰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데 있는 것 같다!

무대는 일시에 긴장의 기운

대신1 = 전하, 지금 전하의 말씀은 일일이 사초에 기록되고 만대에 보존되옵니다. 말씀을 조심하소서!
연산 = (버럭) 너네들이야 말로 세치 혀를 조심해라! 입은 화가 들어오는 문이오, 세치 혀는 언젠가 자신의 목을 베는 칼이 될지니라.

싸늘해진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이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 비판할 줄만 알고, 정작 책임지지 못하는 혓바닥들이 난무하는 세상은 바람직하지 못하지. 이 나라는 공자도 죽은 임금도 더 이상 책임지지 않는다. 내가 책임진다. 이 말을 사초에 기록해라. 나는 더 이상 공자의 제자가 아니다. 나는 조선의 왕이다.


연산 = 그래, 굿을 하자. 누구 보란듯이 여기서 떡 벌어지게 대왕굿을 한판 벌여 보자. 사헌부에 가서 일러라. 임금 볼기 칠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자원 = 무당을 불러 올깝쇼?
연산 = 무당은 필요없다. 내가 왕 무당이다.
처선 = 아이고, 임금 그건 아니되옵니다. 임금께서 천한 무당노릇을 하시면.
연산 = 그것도 다 공자 아들놈들이 꾸민 수작이지. 언제부터 무당이 천한 인생이 되었느냐. 조선을 창세하신 단군왕검 할아버지가 무당이셨다. 신라 성골, 진골도 무당이요, 글 배운 놈들은 고작해야 그 밑구녕 육두품이 아니었더냐. 고구려 동명왕 신라 혁거세, 백제 온조대왕 모두 무당이셨고, 미륵이셨다!

글 배우고 칼찬 놈들이 설치면서 이 세상은 타락했다. 하늘의 기운을 가리고 저승의 통로를 막은 놈들이 아웅다웅 헐뜯고 씹고 뒷통수를 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자, 내가 무당이고, 내가 미륵이다. 자원아, 저기 어전 뒷뜰 대밭에 가서 푸른 대 하나 뽑아 오너라.


연산 = 풍악을 울려라. (자원에게 대를 받는다.) 내 오늘 죽은 귀신들 원도 한도 없이 극락가도록 다 풀어주마. (인수대비와 정귀인, 엄귀인이 나인들을 대동하고 나온다.) 아이구, 저기 산 귀신들도 왕림하시는구나. 어서 오십시오, 할망마마. 오늘 소자가 굿 한판 올리겠습니다. (대신들도 힐끔힐끔 고개를 내민다.) 궁궐 강아지에서 쥐새끼들까지 다 나와서 구경해라. 오늘이 바로 단군 할아버지 왕도를 회복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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