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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익과 김진숙, 그리고 정은임.

Written by leejeonghwan

May 29, 2011

“동지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가 129일 동안 농성을 벌이던 고공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난 뒤, 그가 아이들에게 바퀴달린 운동화를 사주고 싶었으나 못 사줬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졌다. 그 소식을 들은 동지가 다른 동지들과 돈을 모아 그의 세 아이들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줬다고 한다. 그런데 8년이 지난 지금, 바로 그 사람이 다시 그 크레인 위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고 있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그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게 지난 1월6일, 오늘로 143일째가 됐다. 그는 스물한살에 한진중공업에 용접공으로 입사해서 스물여섯에 해고를 당하고 20여년째 해고노동자로 살고 있는 한진중공업 노조 조합원이다. 바람이 불면 휘청휘청 흔들리는 35m 높이의 아찔한 크레인 위에서 그는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요즘은 동지들이 올려보내 준 스마트폰으로 트위터(@JINSUK_85)에 글도 남긴다.

그는 “김주익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하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올라갔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자리가 되도록 아직도 85호 크레인 주위를 맴돌고 있을 김주익씨의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언젠가 ‘쎄시봉’을 보고 남긴 글이다. “그들의 노래는 감미로웠다. 미풍처럼 실려나오던 자유의 바람이 나도 참 좋았다. 18살에 객지에 나와 하루 13시간씩 일하며 타이밍으로 버티던 벌겋게 충혈된 눈에도 그들은 여전히 감미롭고 편안해 보였고 나는 그게 서러웠다. 해고되고 경찰서, 대공분실, 자리만 바꿔가며 징역을 살 때 몸과 영혼에 가해지는 학대가 일상이 된 시절에도 그들은 참 편안해 보였고 그땐 화가 좀 났던 것 같다.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

그가 쓴 ‘소금꽃나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하종강 선생님이 며칠 전 강연에서 김주익과 김진숙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그들을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 아래 옮기는 글은 8년 전,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정은임의 영화음악’ 오프닝 멘트로 했던 말이다. 첫 번째는 김주익 열사가 죽고 난 며칠 뒤, 두 번째는 그의 아이들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선물해 준 김진숙 지도위원의 이야기.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멀리서나마 응원합니다.

2003년 10월 22일.

새벽 3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정은임의 영화음악, 2003년 10월22일 오프닝 멘트,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여기를 클릭.

2003년 11월 18일.

19만3천원. 한 정치인에게는 한끼 식사조차 해결할 수 없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입니다. 하지만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 한보시기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에게는 며칠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는 큰 돈입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에게는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서조차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한, 짐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아이들에게 휠리스를 사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일하는 아버지, 고 김주익씨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이 19만3천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19만3천원. 인라인스케이트 세 켤레 값입니다.

35m 상공에서 100여 일도 혼자 꿋꿋하게 버텼지만 세 아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한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준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 정치인도 아니구요. 그저 평범한, 한 일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유서 속에 그 휠리스 대목에 목이 메인 이 분은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휠리스 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은,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의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빌리 엘리어트’ T-Rex, ‘Cosmic Dancer’.

영화 ‘빌리 엘리엇’ 중에서 T-REX의 음악, ‘Cosmic Dancer’ 띄워드렸습니다. 강정숙씨, 양정선씨, 김도균씨 잘 들으셨어요? 신청하신 곡이었는데요.

영화를 보면요. 빌리가 왕립 발레학교 오디션을 보려갈 때 여비가 없으니까 다른 파업노동자들이 돈을 걷어서 여비를 많이 만들어주죠? 참 없는 사람들이 더 없는 사람들을 스스로를 생각하는 모습들, 가슴이 참 찡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강동훈씨,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 오늘, 많은 노동자들이 죽고있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런지요.’하시면서 사연 보내 주셨네요. 참, 정말 아이러니칼하죠? 그들 옆에 섰던 대통령이 그들을 노동귀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동귀족이라고 지탄받는 대기업 한진중공업의 노조지부장이었죠? 고 김주익씨. 고 김주익씨가 남긴 지갑 한 번 볼까요? 파업으로 회사에 손실을 입혔다고 재산을 다 가압류 당하구요. 그에게 남은 돈은요. 세 아이들의 인라인스케이트도 사줄 수 없는 돈. 13만5080원이었습니다. 어떤가요? 귀족다운가요?

정은임의 영화음악, 2003년 11월18일 오프닝 멘트,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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