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계급 대타협을 모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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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만찬에서 돌아온 다음날인 5월 27일, 재벌 총수들은 일제히 투자 확대와 고용 창출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그룹이 올해 투자 계획을 17조4천억원에서 19조3천억원으로 늘리는 등 2006년까지 3년간 7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을 비롯해 LG와 현대자동차, SK그룹이 밝힌 향후 3~5년 투자 계획은 무려 162조원을 넘어섰다. 삼성그룹은 특히 협력업체 지원에 1조1천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날 노조 사무실에 모여 TV 뉴스를 지켜보던 월드텔레콤 노동자들은 울분을 터뜨렸다. “삼성이 협력업체를 지원한다고요?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하세요.” 금선화 노동조합 지회장의 이야기다. 흥분한 그는 말끝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다른 노동자들도 모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노조 사무실은 플래카드와 피켓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무겁고 답답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 회사 노동자들은 벌써 넉달째 이렇게 일손을 놓고 있다.

이들은 지난 1월 8일 아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보니 공장이 텅 비어있었다. 밤사이 누군가가 와서 공장의 설비를 모두 뜯어간 것이다. 경영진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회사는 사실상 폐업에 들어갔고 텅빈 작업대 위에는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지금은 전기까지 끊긴 상태다. 이 회사 노동자 400여명은 그렇게 일자리를 잃었다.

1995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삼성전기의 협력회사였다. 이 회사가 만드는 DVD 부품은 전량 삼성전기에 납품됐다. 이번에 철수된 공장의 생산 설비도 상당부분 삼성전기에서 들여온 것이다. 노조가 입수한 문건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지난해 12월 중국 칭다오로 DVD 공장을 이전하면서 협력회사들에게도 이전을 강요해 왔다. 그러다 노조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걸로 예상되자 밤 사이에 들어와 설비를 철수해 간 것이다.

노조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이 회사에 공급한 원자재 단가를 계속 높여왔고 결국 지난해에는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절대적으로 삼성전기에 의존하고 있던 회사로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 열악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최근의 해외 이전 압력도 마찬가지였다.

“빨아먹을만큼 빨아먹다가 더이상 먹을게 없게 되니까 털고 떠난거죠. 중국 가면 우리 월급 70만원 주는거 보다 훨씬 싸게 부릴 수 있을 테니까요.”

청주에서 몇손가락 안에 꼽히는 회사였던 월드텔레콤은 결국 그렇게 무너졌다. 4월 7일에는 코스닥 등록도 취소됐다. 이 회사 노동자들은 삼성그룹이 협력회사를 지원하겠다고 큰소리 치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뭘 어떻게 지원하겠다는 것일까.

이날 재벌 그룹들이 발표한 떠들썩한 투자 계획에 정부는 화끈하게 화답했다. 서슬퍼렇던 공정거래위원회도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5월 27일, 공정위는 재벌그룹의 금융계열사 주식의 의결권 제한을 1년 유예하고 2008년까지 단계적으로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내년부터 당장 축소하고 맞서는 단호한 입장에서 크게 물러선 것이다.

강철규 공정위원장은 이날부터 재벌 총수들과 잇따라 회동을 갖고 파격적인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LG그룹에 대해서는 지주회사가 다른 회사 지분을 5% 이상 보유할 수 없도록 한 이른바 ‘5% 룰’을 완화하겠다고 약속했고 SK그룹에 대해서는 소버린자산운용의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에 맞설 수 있도록 외국인 투자기업 지정에서 제외시켜주기로 약속했다.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으로 타격을 받을 걸로 예상됐던 삼성그룹도 공정위의 완화된 규제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재벌이 발표한 투자 계획은 연초 사업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까지 나온 숫자를 끌어모아서 그럴듯하게 포장만 했을 뿐이다. 결국 재벌의 생색내기 ‘립 서비스’에 정부가 화끈한 규제 완화로 보답한 셈이다. 입만 열면 개혁을 외치는 노무현 정부의 개혁 의지는 딱 여기까지다. 노무현 정부는 재벌에 굴복했고 재벌 개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전자레인지 공장을 태국으로 이전한데 이어 냉장고와 에어컨 공장도 중국과 태국, 멕시코 등으로 속속 이전하고 있다. 이들 제품의 경우 이미 해외 법인 생산량이 국내 생산량을 추월했다. LG전자도 세탁기 공장을 중국과 인도, 베트남으로 이전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협력업체들의 도산과 노동자들의 실직이 이어졌다.

전기전자산업 뿐만 아니다. 효성이나 코오롱, 태평양물산 등도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고 사상 최대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조선업계도 중국에 부품 공장을 늘리는 추세다. 포스코와 현대자동차 등도 중국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제조업의 공동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중이다.

대기업은 더이상 고용을 창출하지도 다른 산업에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기술과 핵심부품의 해외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신규 설비투자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기업들마다 사상 최대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결국 한계가 분명한 고용없는 성장의 착시현상일 뿐이다.

월간 『말』은 지난 6월호, “대안없는 한국경제, 삼성전자만 ‘잡으면’ 된다”라는 기사에서 삼성 그룹의 지배구조를 인정해주고 사회공헌기금 등 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도록 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기업이 직접 고용을 늘리지 못한다면 그에 걸맞은 사회적 비용을 분담하고 기업과 사회가 공존하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른바 스웨덴식 사회 대타협 모델도 그 대안의 하나로 거론됐다. 살스세바텐 협약이라고도 부르는 사회 대타협 모델은 1938년 스웨덴의 사회민주당 정권이 발렌베리 그룹 창업주 일가의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기업이 일자리 창출과 기술 투자에 앞장서고 최고 85%의 높은 소득세를 내는 등 사회적 공헌에 합의한 과정을 말한다.

이 기사는 재계는 물론이고 정치권까지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연합뉴스가 “진보진영에서도 경제난을 맞아 기업관이 바뀌는 것이 아니냐”고 보도한 것을 비롯해 한국경제신문과 서울경제신문 등 경제신문들도 일제히 이 기사를 비중있게 다뤘다.

특히 전경련이 대주주로 있는 한국경제신문의 보도 태도가 여러모로 눈길을 끌었다. 이 신문은 월간 『말』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정부가 삼성전자의 지배구조를 인정해줄 수도 있다는 부분에 비중을 뒀다.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적극적인 고용창출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기사의 핵심을 은근슬쩍 뒤바꾼 것이다. 심지어 정부와 기업의 ‘빅딜론’이라는 단어까지 만들어 내면서 기사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해석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 기사는 재벌개혁의 방향과 관련한 다양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재벌과 타협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과 재벌을 움직여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자는 현실적인 입장이 맞섰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재벌 해체’라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한발도 물러날 태세가 아니다.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국장은 “외국 자본에게 넘어가기 전에 재벌의 소유와 경영 독점을 해체하고 장기적으로는 국민주 형태로 소유 분산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이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직접 참여하게 되면 재벌이나 외국 자본의 기업 지배를 동시에 막을 수 있고 노동자들의 권한과 함께 책임감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국장이 스웨덴 모델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재벌의 도덕성과 경영 능력 부재다. 과거 삼성자동차의 실패나 SK의 분식회계를 비롯한 총체적 경영 부실의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국장이 보기에 재벌의 지배 구조를 인정해주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자는 주장은 이런 비합리적 경영의 폐해를 묵인하자는 말 밖에 안된다.

진보진영의 이같은 완고한 입장에 대한 대안연대회의의 반응은 한마디로 안타깝다는 것이다. 정승일 대안연대회의 정책위원은 “외국계 자본이 호시탐탐 국내 기업들 경영권을 노리고 있는데 지금 재벌을 깨서 어쩌겠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정 정책위원은 “주주 자본주의의 폐해에 맞서야할 민주노동당이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안연대회의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하준 캠브리지대학 교수도 민주노동당의 종업원 지주제 논의와 관련, “주주가 되고 자본가가 돼서 경영권을 행사하자는게 어떻게 어떻게 진보냐”고 반박했다. 장 교수는 “그건 억울하면 돈 벌라는 자본주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안연대회의 주장의 핵심은 장기적인 전망으로 고부가가치 투자를 하고 외국 자본의 침탈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은 사실상 재벌 뿐이라는데 있다.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재벌의 이익과 지배권을 보장하는 대신 재벌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자는 논리다. 성장의 동력을 재벌에서 찾는 이들은 정부가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대안연대회의와 반대 입장에는 참여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나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등이 있다. 대안연대회의가 재벌의 투명성이 충분히 확보됐다고 보는 반면 이들은 아직 멀었다고 반박한다. 이들에게 이른 바 ‘재벌 체제 옹호론’은 재벌에게 아부하고 재벌을 망치는 이론이다.

김기원 교수는 “기업과 총수를 구분해야 한다”며 “총수의 준범죄적 행위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기업의 돈을 내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박했다. 재벌 개혁의 방향은 합리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지 대안연대회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협박이나 구걸을 통해 비합리적인 투자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지난해 SK사태를 거론하며 “재벌이 외국 자본에 넘어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통해 합리적인 지배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상조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의 연관효과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근거로 대기업과 소재부품 중소기업의 연관효과가 1970년대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소수 재벌의 선도적 투자가 과연 진정한 위기 극복과 경쟁력 강화의 대안이냐”고 반문했다.

한편 이주영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책임조사역의 주장은 이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

“만약 사회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노조의 경영 참여부터 법제화하면서 기업 소유권을 노동자들에게 이전시킨다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기업에게 사회공헌기금을 부과하고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거둬서 분배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건 계급 타협을 시작하기도 전에 폐기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는 스웨덴 모델의 성공 관건을 계급 대타협에서 찾는다. 1932년 집권에 성공한 사회민주당은 근로소득에 대해 강도 높은 누진세를 적용했지만 자본과 기업소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세금을 매겼다. 1950년에 도입한 연대임금제도도 결국 대기업에 유리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대기업은 임금을 깎는 만큼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규모를 더욱 늘려나갔다. 철저하게 규모의 경제에 치중한 자본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월간 『말』의 제안은 다분히 오해되고 왜곡된 측면이 있다. “삼성전자만 ‘잡으면’ 된다”는 제안의 배경에는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으로부터 양보화 화합을 끌어내고 그렇게 삼성을 움직이면 다른 기업들도 따라오게 돼 있다는 현실적인 논리가 깔려 있다. 월간 『말』은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이 회장 일가의 지배구조를 용인해줄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사실상 그게 지금 정부가 내걸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고 한국적 계급 타협의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적 계급 타협은 기업이 이익의 일부분을 선심이라도 쓰듯 내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공헌기금은 결코 구걸이 아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본과 노동 계급이 공존하는 대안을 찾는 한 방법이다. 그래서 월간 『말』의 주장은 스웨덴 모델의 맹목적인 추종과는 다르다. 기업은 장기적으로 비정규직과 실업, 더 나아가 사회적 분배 문제까지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필요하다면 사회적 타협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현실적으로 일정 부분 타협하지 않고서는 자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

최근 사회공헌기금 논의와 관련, 한 중소기업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맨손으로 창업, 자수성가한 그는 100억원대의 자산가다.

“은퇴하고 나면 마누라하고 자식들하고 먹고 사는데 30억원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나머지 70억원은 얼마든지 사회에 내놓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요즘처럼 정부나 노동자들한테 등 떠밀려서 억지로 내놓으라면 절대 못냅니다. 막말로 니들이 나 돈 버는데 보태준 거 있냐 이거죠.”

그는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복귀와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 등으로 사회가 더 혼란스러워졌다고 보고 있다. 사회공헌기금을 둘러싼 논의가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기업이 왜 비정규직이나 실업 문제 같은 사회적 책임을 부담해야 하느냐고 그는 반문한다. 취지는 좋지만 정부가 할 일을 기업에게 떠맡겨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그는 자기 주변 사람들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주변에 보면 다들 이민갈 생각만 하고 있어요. 이민 안가는 사람들도 앞으로 2년 반만 더 기다려 보자는 생각입니다. 40년 동안 가져온 시스템을 노무현 정권이 뒤집을 수 있느냐 하면 글쎄요. 그러니까 일단 다음 정권까지만 참아보자는 거죠. 그래서 다들 현금 쌓아놓고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최근 사회공헌기금을 둘러싼 논의는 딱 이 수준이다. 기업 이익의 일부분을 떼내 사회적 비용을 분담하자는 노동계의 제안에 재계는 기업 차원에서 논의할 부분이 아니라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예 노사협상의 안건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논의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입장의 차이는 좀처럼 좁혀들지 않고 있다. 양보와 화합은커녕 자칫 극한 대립으로 치닫을 분위기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사회공헌기금 논의와 관련, 5월 31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간담회에서 “돈 많이 버는 기업이 사회를 위해 쓰겠다는 건 기업이 정하는 것이지 노사간 협의대상이 안된다”고 단호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도 “사회공헌기금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잘라말했다.

논의는 여기서 더이상 진전이 없다. 경총은 최근 공식 성명을 통해 “준조세 성격의 사회공헌기금 등으로 기업의 세금 부담을 증가시키면 경제가 크게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공헌기금이 투자 감소를 유발하고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논리다.

경총은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회협약의 취지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대기업 노조들이 이와 관련해 진실로 고민한다면 과보호된 정규직의 근로조건 조정과 고용유연성 확보 등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사회공헌기금의 논의는 지난 3월 22일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민주노총 금속연맹 산하 4개 자동차 회사 노동조합이 해마다 순이익의 5%로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하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그동안 개별 사업장 단위의 투쟁에 매몰됐던 노조가 단순한 임금 협상을 넘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나선 것부터 놀라운 변화였다.

순이익의 5%는 지난해 4개 자동차 회사를 기준으로 1천7백81억원에 이른다. 자동차 노조는 이 돈으로 기금을 조성해 비정규직의 보호를 비롯해 기술훈련 등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위한 투자에 쓰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공헌기금이 비정규직 확산과 저임금, 단순노동에 의존하는 산업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석행 민주노총 사무총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제조업 공동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문제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논쟁보다는 실천의 방안을 찾자는 이야깁니다. 제한된 생산량으로도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산업의 패러다임을 근본부터 바꿔야 하고 이를 위해 노조와 회사가 힘을 모아 연대 기금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자동차 노조의 주장은 현실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어떻게 사용자들을 설득할 것인가. 1천7백81억원을 어디에 어떻게 쓰겠다는 것인가. 6월 8일 민주노총 주최로 열렸던 첫 토론회에서도 이런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은 “사회공헌기금의 조성 취지에 대해 공감한다”면서도 “방향과 내용이 좀더 명확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죽하면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까지 나서서 “비정규직 처우개선이라는 큰 그림만 그려져 있을뿐 기금 조성과 운영에 대한 구체적 방안이 미흡하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결국 정부가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이상 사회공헌기금의 논의는 명확한 해답을 찾기 어려울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스웨덴과 비교할 때 아직 노조의 힘이 너무 약하다. 순이익의 일부를 사회공헌기금으로 내놓으라는 노조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우리나라 재벌에게는 이익을 노동자와 공유한다는 인식이 전혀 없다.

스웨덴은 재벌에게 사회 분배의 책임 보다는 고용과 투자의 책임을 강요했다. 그래서 재벌의 소유구조를 파격적으로 인정해주고 고용과 투자를 늘리도록 했다. 스웨덴 모델이 최선의 해답은 아니겠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가장 절실한 것은 고용과 투자의 창출이다. 기업과 사회가 공존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재벌을 움직일 한국적 계급 대타협 모델이 필요할 때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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