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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좌파’를 다시 읽다.

Written by leejeonghwan

June 1, 2004

성광야학 독서토론회 12번째 기록.

1992년, 대학에는 패배의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 있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서관이나 강의실로 숨어들었다. 대학 1학년이었던 나는 딱히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고 그렇다고 넘쳐나는 자유를 마냥 즐길만큼 분방하지도 못했다. 치열하지도 못했고 아무런 지향도 신념도 없었다. 이념의 부재를 1992년은 다른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했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흘러갈 뿐이었다.

‘B급좌파’에서 김규항은 말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정신세계의 가장 치명적인 특징은 자본주의를 기정사실화하는 일이다. 물론 그런 현상은 전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사회주의 자체의 실패로 규정하려는 우파 한국인들의 욕망에 좌파 한국인들이 비굴하게 합의한 결과다.”

돌아보면 1992년의 패배감을 극복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럭저럭 얼치기 지식인 흉내로 무력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던 나는 1997년 성광야학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무엇인가 희망하게 됐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와서 돌아보면 분명히 그렇다.

1990년대를 많은 사람들은 1980년대의 격렬한 기억으로 버텨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은 다만 체념하고 순응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때 우리는 달리 저항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B급좌파’는 그 쓸쓸하고 암울했던 1990년대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다.

“어머니는 당신 아들이 좌익 인텔리가 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좌익도 인텔리도 되지 못했다. 좌익인 듯할 뿐 좌익이 아니며 인텔리인 듯할 뿐 인텔리가 아니다. 글만 쓰면 파시스트를 저주하고 중산층을 까고 지식인을 비꼬고 근로대중을 한없이 지지하지만, 그 글은 방구석에 앉아 세상을 재단하는 부도덕을 깔고 있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실패했다. 이제 늙고 병든 어머니는 아들의 곤궁함에 노심초사하면서 출근한 며느리를 대신해 조용히 아이를 본다. 어머니는 더 이상 불의나 비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해 매일 그 불의와 비굴과 교접한다. 돈이 된다면 재벌에도 몸을 팔고 파시스트에게도 웃음을 판다. 다만 이따금, 아주 이따금씩만 더러운 꼴에 생지랄을 할 뿐이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김규항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1990년대 우편향의 바람에 편승해 서글플만치 졸렬하게 우리의 정신을 청산했다. 엉거주춤 B급의 좌파로 머물러 투덜거리고 대안 없는 불만을 쏟아놓을 뿐이다.

‘B급좌파’는 ‘씨네21’의 권말 칼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연재됐던 글을 모아 만든 책이다. 그때만해도 김규항의 글쓰기는 무척 새로웠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것들을 김규항은 부인하고 비판했다.

좌파로 산다는 것은 우리 안의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우리가 옳다고 받아들였던 것들과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발상을 전환하고 비판하고 바꿔나가는 과정이다. 인권과 노동과 여성 문제, 조선일보 문제, 기득권과 특권층, 그리고 계급의 문제, 지역 감정, 소수자와 소외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잃지 않는 일이다. 꿈을 잃고 매몰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성찰하고 저항하고 치열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 오롯히 맑게 깨어서 지향하고 신념해야 한다.

몇 부분을 발췌한다.

“파시즘은 우리 안에도 남아있다. 파시스트 치하에서 몇십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파시스트와 닮아갔고 파시즘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다. 구제금융을 부른 국가가 그 원인을 국민의 과소비라 둘러대면 국민은 가슴을 치며 금가락지를 빼들고 방송국에 간다. 국민의 대다수인 근로대중들이 30여년을 경제개발 현장에서 뼈빠지게 고생만 하던 사람들이 요 몇년 아이들과 놀이동산 몇번 가고 갈비도 사먹고 한 것이 구제금융의 원인인가.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를 한없이 비굴하게 만든다.” 37페이지.

“이 나라의 더러운 역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그들 덕분에 나는 적을 보며 비분강개 하는 일보다는 우리 안의 위선을 조롱하는 일을 더 즐기는 비틀린 사람이 됐다.” 52페이지.

“사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 63페이지.

“쇼가 무르익을수록 볼거리가 쌓여갈수록 불편함도 같이 쌓여간다. 자본주의를 거부하기로 한 내가 자본주의의 꽃을 감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전세계 피압박 영화를 지지하기로 한 내가 가해 영화의 자축연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93페이지.

“그들은 왜 53년 미국의 메카시즘을 광풍이며 마녀 사냥이라고 하면서 오늘의 한국의 광풍과 마녀사냥을 요구하는 걸까. 그것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세상을 판단하는 신념 체계가 아니라 가진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혹은 더 많이 가지려는 동물적인 욕망 체계기 대문이다.” 96페이지.

“교회는 물질축복은 성실한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이 되라 했지만 교회는 세상의 더러운 죄를 들어와서 씻어라 하지 않는가.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동산과 벌판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했지만 교회는 성전을 짓고 찬란하게 치장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 가르치지 않는가.” 115페이지.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정보만으로 당대 현실을 파악할 때 혹은 그게 모두라고 단정할 때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알리는 일 말이다.” 122페이지.

“여느 사람들이 사도세자나 장희빈의 사생활을 역사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프랑스 혁명사나 러시아 혁명사를 배우고 여느 사람들이 이문열이나 김진명을 독서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구태여 촘스키나 부르디외니 하는 사람들을 읽는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122페이지.

“당대의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이 책상에 앉아 고유한 지식을 탐구하는 모습은 머리가 텅 빈 미인이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고기와 관련한 것이다. 나를 포함하자면 한국 지식인들은 천민자본주의라는 푸줏간에 걸린 썩은 고기들이다.” 124페이지.

“더욱 희한한 일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한국에서 이른바 정신세계를 창조하고 배분하고 적용한다는 지식인들만은 적잖이 탈근대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근대도 이루지 못한 나라에서 탈근대를외치는 코미디언들이다.” 132페이지.

“0.75 평짜리 감방은 내 짐작보다 더 좁았다. 이런 곳에서 수십년을 지내고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체제의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신념을가진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곳에 수십년씩 가두는 국가에 우리가 걸 수 있는 신뢰는 어떤 것일까.” 133페이지.

“아저씨 힘들지 않으세요. 초등학교 일학년짜리 남자아이가 제 키를 넘기는 창에 간신히 얼굴을 대고 묻는다. 괜찮아. 아저씨는 조금 있다 나가. 우리 아빤 광주 교도소에 있는데. 아빠가 뭘 잘못했지? 아빤 착한 일 해서 잡혀가셨어요. 고개를 떨구는 저 아이가 익힌 세상의 이치는 착한 일 하면 잡혀가는 곳이다.” 135페이지.

“문제는 그 신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만만치 않은 지적 능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그 신문이 다른 보수신문들과 다른게 뭐냐 반문할 때 맥이 풀린다.” 139페이지.

“그들은 천천히 그 초콜릿을 씹으며 시민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의 인수합병을 자축한다.” 152페이지.

“그들은 시민운동단체에 얼마간 돈을 내고 한겨레를 구독하며 홍세화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노래방에서 아침이슬을 부르고 한편으론 신문에 팔짱을 끼고 돼먹지 못한 얼굴로 대문짝처럼 서있는 펀드매니저들에게 정신을 판다. 그들은 지울 수 없는 그들의 사회의식의 흔적을 마스터베이션하며 삶을 위무한다.” 163페이지.

“검약한 삶을 넘어 자기 헌신의 기쁨마저 생략한채 오로지 남을 섬기다가 완전한 고독감 속에 사라져 가기에는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았다.” 187페이지.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하늘이 준 보편적 인권을 믿지 않는다.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한 계급에 주어진 권리는 다른 계급에 억압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권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이며 그의 인권운동은 더이상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다.” 200페이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우리의 선택은 대개 우리가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던 것 같다.” 203페이지.

“의사들의 폐업이 사회 성원들로부터 어떤 연대도 얻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처한 사회적 억압에 비해 그들이 선택한 해결 방법이 터무니 없었기 때문이다.” 223페이지.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한 졸렬한 시도였을뿐 그 실패가 자본주의를 기정사실화하는 일로 연결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늘날 천민자본주의의 발톱에 사로잡힌 우리가 자본주의를 기정사실화 하는 일은 너무나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중세시대 사람들이 중세사회를 기정사실화 하는 일이 그랬듯 말이다. 그러나 인간과 관련한 모든 것, 인간의 영혼마저 돈으로 사고 파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일은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존엄에 관한 문제다. 중세를 넘어서는 일이 선한 중세를 바라는 기대가 아닌 중세를 반대하는 꿈에 의해 이루어졌듯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일은 선한 자본주의를 바라는 기대가 아닌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꿈에 의해 이루어진다. 역사는 언제나 사로잡힌 현실에 반대하는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 전진한다.” 236페이지.

“주5일 노동으로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집을 마련하는데 반생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교육과 의료가 무료며 도무지 세상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다른 이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광활한 자연 곁에서조용히 살아간다는, 벤쿠버의 무색무취한 삶은 이민에 대해서라면 어린 시절의 반감만 존재하던 나를 뒤흔들었다.” 256페이지.


토론을 정리하면서 문득 ‘B급좌파’의 한계를 다시 생각했다. 김규항은 겸허한 계몽주의자를 지향했고 결국 지식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판단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좌파가 모두 지식인일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당연히 없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부딪혀야겠지만 얼치기 계몽주의자 흉내를 내는건 더 고약한 일이다.

독서토론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서토론회에 함께 참여할 학강들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책을 골라서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동혁이나 서진이, 은혜에게 ‘B급좌파’의 주제들은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동혁이는 읽기는 읽었지만 아예 무슨 말인가 하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책을 읽기 전까지 그들에게 좌파는 빨갱이나 다름없는 불온한 느낌을 주는 단어였다. 박노해와 강준만도 처음 듣는다고 했다. 이제 막 세상에 뛰어든 대학 1학년들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언뜻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아예 이념적 지평이 다른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제가 다양했던만큼 깊이있는 토론은 쉽지 않았지만 앞으로 모임에서 비슷한 주제를 다시 다룰 기회가 있을 거라고 본다.

은혜는 먼저 김규항의 교회 비판을 불편해 했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목사님은 열심히 믿으면 물질 축복 받는다고 하는데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기 보다 어렵다고 했단 말이야. 나는 이 생각만 하면 돌아버려.”

비슷한 문장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은혜는 이런 문장들이 교회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모순은 결코 아니고 다만 부자에 대한 경계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김규항은 개인의 구복과 구원에 매몰되는 우리나라 교회 문화를 비판하고 있지만 그런 유형화한 비판은 위험하다. 부분적으로는 옳더라도 결국 쉽고 무책임한 비판이고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최근 ‘그 페미니즘’ 논쟁에서도 김규항은 비슷한 무모함과 오만함을 보였다.

서진이는 파시즘이 뭐냐고 물었다. 파쇼는 묶는다, 또는 단결이나 결속의 의미다.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반자유주의, 반합리주의, 엘리트주의의 경향을 띄고 극단적인 경우 나치즘이나 제국주의, 극우민족주의로 흐르기도 한다.

김규항은 제대로 지적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파시즘은 흔히 권력이나 체제의 과신과 만용, 또는 그에 대한 순응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래서 파시즘은 여전히 우리의 과제다.

폭주족을 끔찍히 싫어하는 은혜는 ‘폭주족을 위한 변명’에도 거부감을 보였다. 그러나 이 글은 그냥 가벼운 농담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세상에는 폭주족보다 훨씬 나쁘고 못된 놈들이 많다는, 그래서 오히려 폭주족은 그냥 귀여운 애들 아니냐는 가벼운 농담 말이다.

의외로 ‘개새끼들’의 반향이 컸다. “제 자식 대신 남의 자식 군대 보내는 더러운 아버지들”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1일 감옥 체험 이야기를 다룬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김규항은 잠깐 감옥을 체험할 뿐이었지만 양심수들은 신념 하나로 수십년을 감옥에서 버틴다. 그 가짜 감옥 안에서 진짜 양심수들의 어머니들을 만나는 일은 꽤나 참담한 일이었을 것이다. 보통 우리는 그들과 그들의 막막한 절망을 잊고 살지 않는가.

서진이는 집에서 조선일보를 10년 넘게 보고 있다. 사람들이 조선일보가 나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어디가 어떻게 나쁜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극우 성향의 신문이 색깔을 감추고 할 말을 하는 신문이라고 떠들어 댄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극우 논리에 물들어 간다. 그냥 안보는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지만 쉽지 않은 문제다.

병수가 말한 것처럼 ‘B급좌파’를 통과하는 하나의 큰 생각은 위선에 대한 혐오다. 위선을 늘 체험하면서도 그 위선을 혐오하고 넘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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