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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견문록.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2, 2009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이탈리아를 찾았을 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 첫 머리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새벽 3시에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나를 붙잡아둘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만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여행가방과 오소리 가죽 배낭만을 꾸린 채 홀로 역마차에 몸을 싣고 7시 30분에 츠보타에 도착했다. 안개가 자욱이 끼고 아름답고 고요한 밤이었다.”

일찌감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어울리지 않게 정치에 입문해 보냈던 10년, 상상력과 감수성이 무뎌지고 있다고 느끼던 무렵이었다. 생일 아침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와 로마에 도착하던 날, 괴테는 “모든 것이 내가 벌써부터 상상했던 그대로인 동시에 모든 것이 또한 새롭다”며 벅찬 감격을 털어놓았다. “천 개의 화필로도 다하지 못할 것을 한 자루의 펜으로 어찌 다 묘사할 수 있으랴”라며 개탄하기도 했다.

“북방에 있으면 누구나 몸과 마음이 그곳에 사로잡혀 있어서 이런 지방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에 나는 이 길고 고독한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어찌할 수 없는 욕구에 이끌려 이 세계의 중심지를 방문한 것이다. 정말이지 지난 몇 년 동안은 마치 병이 든 것 같았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곳(로마)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며 이곳에서 지내는 것뿐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해 스위스 베른과 루체른, 인터라켄을 거쳐 이탈리아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에 이르는 보름 동안의 짧고도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다. 부슬부슬 비가 오던 이른 아침, 텅 빈 콜로세움에 올랐을 때 나는 막연하게나마 223년 전, 괴테가 쏟아냈던 흥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천 년을 견뎌낸 유물, 괴테와 나는 같은 자리에서 서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가치들을 생각했다.

서기 72년에 착공해 80년에 준공된 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은 로마 제국의 거대한 권력을 상징한다. 최대 7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무렵 영국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의 인구는 고작 2만명 수준, 로마는 200만명이 넘었다고 하니까 그 엄청난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괴테가 지적한 것처럼 콜로세움은 경기장을 가득 메운 군중이 스스로를 발견하고 그 규모에 경탄하고 동시에 권력에 순응하게 되는 역설적인 시스템이었다.

검투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결투, 굶주린 사자들의 울부짖음, 군중의 거센 함성, 로마는 2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끌어안고 지나간 영화와 권력의 무상함을 웅변하고 있었다. 콜로세움과 포로로마노에서 바티칸 시국 쪽으로 800m쯤 걷다 보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만난다. 2천년 된 콜로세움이 당당하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것과 달리 웨딩 케이크라는 비난을 받는 이 조야한 디자인의 기념관은 90년도 안 돼서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안타깝지만 바티칸 박물관에서도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서도 스페인 계단과 트레비 분수 앞에서도 나는 제국주의의 과시적 욕망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기 위한 목적에서 필요 이상으로 거대하고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이 건축물들은 민주적 시장 경제가 등장하기 이전, 무소불위한 제왕적 권력과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가뜩이나 콜로세움은 그래서 아름답지만 더욱 처연했다.

혐오스러우면서도 부럽고 끊임없이 절망하면서도 가슴 깊은 곳의 영감과 열정이 꿈틀거리는 듯한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수탈과 착취로 쌓아올린 거대 권력의 부산물들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를 송두리째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괴테는 “세계의 역사는 모두 이 땅에 연결돼 있어서 내가 로마 땅에 발을 들여놓은 그날부터 나의 제 2의 탄생, 진정한 재생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피렌체로 떠나기 전날 밤, 달빛이 깃든 콜로세움을 다시 찾았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찾아 1만km 이상을 날아 이곳까지 왔는지 비로소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할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지만 실제로는 콜로세움이 건설되고 귀족들이 향락에 빠져들면서 로마는 절정을 맞고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밤이 늦도록 나는 콜로세움을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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