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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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발단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규항은 2002년 4월 <씨네21>에 쓴 ‘그 페미니즘’이라는 칼럼에서 이른바 주류 페미니즘을 비판했다.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로 구성된 주류 페미니즘이 사회적 억압과 그 출발점인 계급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이유였다. 주류 페미니즘이 “성적 억압의 보다 분명한 피해자인 하층계급 여성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비판의 핵심은 최보은의 박근혜 사유론과 맞닿아 있었다. 최보은은 “참정권 행사를 여성의 이해관계에 기반해서 바라보자”며 사실상 박근혜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고 김규항은 “그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남근주의를 넘어서기는커녕 흉내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칼럼은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김규항은 한번 반박을 하긴 했지만 그뒤 2년 동안 아예 페미니즘 문제에 침묵했다.

논쟁의 재연은 지난달 <한겨레>에 실린 김규항 인터뷰에서 비롯했다. 주장은 2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겨레>는 김규항을 건드려 여성운동이 박근혜 연대론이나 현정은 지지운동 등 일련의 보수화 움직임에 대해 왜 침묵하느냐는 비판을 끌어냈다. 김규항은 “진보적이어야 할 여성운동이 보수 수구와 절충될 수는 없다”며 “중산층 엘리트 여성운동의 지나친 주류화”를 비판했다. “남성들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주의자들 사이의 정서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규항의 인터뷰는 페미니즘 인터넷 신문 <일다>의 조이여울 편집장이 <한겨레>의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됐다. 조이여울은 “그들은 여성운동이 ‘부르주아 엘리트’ 운동이라는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시킬 때만 ‘여성민중’을 논한다”고 비판했다. “김규항이 여성운동의 미래와 여성민중을 걱정하는 것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 인권을 걱정한다는 것만큼이나 가증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였다. 조이여울은 <한겨레>에 대해서도 “여성운동에 물을 먹였다”고 비판했다.

이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김규항은 중산층 여성운동을 비판하지 않는 여성운동의 보수성을 비판했고 조이여울을 비롯한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그런 비판을 여성운동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이 논쟁은 결국 엉뚱하게도 여성운동과 가부장주의의 대결 양상으로 확산됐다. 김규항은 이 논쟁에서 ‘그들’ 가운데 한명이 되고 결국 여성운동 바깥으로 배제됐다. 한때 ‘노력하는 마초’를 자처했던 그가 스스로를 ‘슬픈 마초’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언뜻 순교자처럼 보인다.

쉽지 않은 판단이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이렇다. 김규항에게는 이른바 주류 페미니즘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 김규항은 여성운동에 진지한 고민도 관심도 없는데다 게다가 남성이기 때문에 그의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다. 김규항의 주류 페미니즘 비판은 결국 성차별주의로 전락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김규항은 여성운동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폄훼하고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한겨레> 신기섭 기자는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네가지 유형을 소개하고 있다. 첫번째는 페미니스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허식가(the poseur)’다. 이들은 나름대로 관심도 많고 할 말도 많다. 사람들에게 페미니스트로 보여서 얻게 될 혜택은 많지만 잃을 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깊은 반성이 따르지 않는 페미니즘은 이들에게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 이들은 페미니즘을 부분적으로 동의하고 이해한다. 두번째는 직접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이에 자부심을 갖는 내부자(the insider)다. 이들은 가부장주의를 혐오할만큼 페미니즘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부심에서 비롯한 이들의 문제의식은 자기 비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세번째 유형은 가부장제의 이익을 누리고 있는 동시에 억압을 느끼는 인본주의(humanism)다. 이들은 기꺼이 페미니즘을 받아들이지만 결국에는 남성의 권력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관심은 가부장제의 폐해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마지막 유형은 자기학대자(the self-flagellator)다. 이들은 깊은 지식과 이론을 갖추고 있으며 죄책감과 성차별적 충동을 깊이 반성한다. 문제는 자기 탐닉에 빠져 생산적인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데 있다. 이들은 인본주의자나 내부자로 물러나거나 아예 여성운동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남성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기는 쉽지만 그는 여전히 가부장제의 수혜자고 그가 속한 남성 집단은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기꺼이 누린다. 김규항은 스스로 ‘내부자’라고 생각했겠지만 최근의 논쟁을 돌아보면 ‘허식가’나 ‘인본주의자’로 오해되거나 매도됐다. 김규항은 여성 해방을 계급 해방과 같은 맥락에서 보고 여성운동와 진보운동의 연대를 주장했지만 그 진정성을 의심 받았다. 그의 비판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지만 그 자격이 문제가 됐다. 언뜻 그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페미니즘을 비판할 자격이 없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성운동은 흔히 페미니즘의 이론적 근거를 여성의 경험에서 찾는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억압과 고통의 구체적인 경험,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한 성찰과 그러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저항의 과정에서 힘들게 얻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논리로 남성들은 페미니즘의 논의에서 배제되고 페미니즘은 결국 여성들만의 페미니즘으로 고착된다.

그러나 <남성 페미니스트>는 누군가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요소가 객관적인 성적 정체성과 결합된 경험에 대한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신념과 실천 그리고 태도라고 주장한다. 여성으로서 페미니즘을 인식하고 이해하는게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페미니즘의 핵심은 젠더, 즉 사회적 성별에 뿌리를 둔 권력이 없어져야 한다는데 있다. 이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는 여성일 수도 있고 얼마든지 남성일 수도 있다.

김규항은 ‘노력하는 마초’나 ‘페미니즘 지지자’로서가 아니라 당당하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선언하고 페미니스트로서 논쟁에 뛰어들었어야 했다. 여성운동을 비판했던 김규항은 그 비판에서 벗어나 여성운동의 바깥에 서 있었다(김규항은 나중에 이 부분을 시인했다). 자괴감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결국 김규항은 이 논쟁에서 여성운동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가부장주의 마초일 수밖에 없었다. 미묘한 입장의 차이지만 비판의 맥락은 분명히 다르다. 그가 정말 여성운동을 걱정했다면 그는 페미니스트가 돼야 했다.

데이비드 커헤인이 제안한 남성 페미니스트의 세가지 요건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자신을 윤리적으로 복합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로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의지고 두번째는 비판에 대한 개방과 지속적인 자아성찰이며 세번째는 활동가들의 우정과 공동체 의식이다.”

이 책의 주장은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김규항을 비롯한 남성 페미니스트들에게 유용한 충고다. “여성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당신의 삶을 더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매우 불편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개인사와 정체성을 재해석하며 또한 새로운 형태의 실천을 허용하고 요구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놓인 당신의 자리를 재해석한다.

참고 : 여성주의와 진보운동의 연대. (이정환닷컴)
참고 : 2년째 계속되는 ‘그 페미니즘’ 논쟁. (이정환닷컴)
참고 : 중산층 페미니즘 또는 보수적 여성운동의 비판. (이정환닷컴)
참고 : 편지와 답장. (김규항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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