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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비밀’과 ’미래를 걷는 소녀’.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21, 2009

‘미래를 걷는 소녀’는 전지현과 이정재가 나왔던 영화 ‘시월애’나 김하늘·유지태의 ‘동감’, 저우제룬·구이룬메이의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다.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들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제목은 비슷하지만 약간 범주가 다르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잔뜩 있으니 아직 영화를 안 봤는데 앞으로 볼 계획이라면 절대 절대 읽지 말 것.

나스메 소세키의 문하생인 토키지로와 공상과학 소설가를 꿈꾸는 미호. 토키지로와 미호는 정확히 100년의 시차를 두고 살고 있다. 그런데 우연히 웜홀을 건너간 휴대전화로 대화를 하게 된다, 뭐 그런 황당무계하고 뻔한 설정이다. 토키지로는 100년 전에나 있을 것 같은 고지식하고 순박한 문학청년이고 미호는 2009년의 상큼발랄한 여고생이다. ‘미래를 걷는 소녀’라는 제목은 ‘미호(未步)’에서 따온 말이다.

토키지로는 당연히 100년 뒤 자신이 유명한 소설가가 돼 있을 것인가를 궁금해 한다. 그런데 미호가 아무리 도서관을 뒤져봐도 토키지로의 이름은 없다. 미호는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토키지로는 미호에게 거울을 선물하면서 가게 주인에게 100년 뒤에 찾으러 올 거라고 말한다. 미호가 거울을 찾으러 갔을 때 웬 할머니가 미호의 손을 꼭 붙잡고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고맙다고 말한다.

이 할머니는 왜 100년 동안이나 이 거울을 보관해 왔던 것일까. 토키지로는 미호와 통화하면서 가게 앞에서 봤던 꼬마 여자애 나나미짱이 그 할머니란 걸 알게 된다. 그래서 할머니를 바꿔준다. 할머니는 나나미짱에게 그 거울을 잘 보관하라고 부탁한 다음 토키지로를 다시 바꿔 달래서 고맙다고 말한다. 뭐가 그렇게도 고마운 걸까. 어린 시절의 자신과 통화할 수 있게 해줘서? 그 궁금증은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풀린다.

미호는 옛날 신문에서 소세키의 문하생이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미호는 다급하게 전화를 건다. “호수에 가면 안 돼.” 무슨 말일까. 갑자기 웬 호수? “내가 호수에 빠져 죽는다고? 이 앞에 호수가 있긴 한데 조심해서 걸으면 되잖아.” 미호는 말한다. “그게 아냐. 너는 여자애를 구하다가 죽을 거야. 그 여자애가 바로 나나미짱이야.” 그러나 토키지로는 결국 나나미짱을 구하러 호수에 뛰어든다.

영화에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생략돼 있지만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나나미 할머니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구성해 보는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거울을 사고 100년 뒤에 찾으러 오겠다면서 맡기고 간 청년, 그가 며칠 뒤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죽는다. 그런데 100년 뒤 그 청년이 전화를 걸어온다. 나나미 할머니는 그제서야 100년 동안 기다려왔던 못다한 말을 한다. “아리가또(고맙습니다)”.

시간여행의 딜레마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데 기본적인 공식은 비슷하다. 미래의 누군가를 만날 수는 있지만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시월애’에서 성현은 2년 뒤 미래의 은주에게 편지를 쓴다. 이 시점에서 성현은 은주를 알지만 은주는 성현을 모른다. 두 사람의 관계는 2년 뒤에야 시작되는데 그 2년 뒤의 은주 곁에는 성현이 없다. 그 2년 사이에 성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샤오위는 마법의 피아노를 치면 20년 뒤의 미래로 갈 수 있다. 문제는 가장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것. 샤오위는 상륜을 좋아하지만 이런 유령 같은 존재로 20년 뒤의 미래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다. 자칫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될 위험도 있다. ‘동감’에서는 아마추어 무선 통신이 등장한다. 소은은 20년 뒤의 미래에 살고 있는 지인이 짝사랑하던 선배와 친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란 걸 알게 된다.

샤오위가 상륜을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소은은 짝사랑하던 선배를 포기하고 무선 통신도 끊는다. 죽을 걸 알면서도 연못에 뛰어든 토키지로처럼 소은은 예정된 미래를 받아들인다. 토키지로의 미래는 미호에게 과거다. 미호가 볼 때 토키지로의 미래는 이미 결정돼 있는데 그걸 알더라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시간여행의 딜레마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주인공의 과거를 예속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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