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 모델M-1391401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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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모델M-1391401. 대학에 막 입학했던 무렵 학교 컴퓨터실에는 이런 키보드들이 있었다. 그때는 모든 키보드들이 다 그랬다. 철컹철컹 금속성 굉음이 신경이 거슬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경쾌하고 청량한 느낌을 준다. 글자를 입력하고 있다는 명확한 구분감과 강한 탄력. 생각하는 대로 곧바로 손가락이 반응하는 느낌이랄까. 그때는 잘 몰랐지만 20년이 다 돼 가는 지금 와서 다시 봐도 훌륭한 키보드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컴퓨터의 연산속도와 저장용량은 눈부신 속도로 진화했지만 키보드는 오히려 형편없이 퇴보했다. 사람들은 컴퓨터의 사양에 민감했지만 정작 키보드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키보드가 다 똑같지 뭐. 그래서 여러 차례 컴퓨터 세대 교체를 거치면서 초창기의 기계식 키보드들은 사라졌고 요즘은 100만원도 넘는 최고 사양 컴퓨터를 쓰면서 키보드는 8천원짜리 중국산 멤브레인 키보드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지금 IBM 모델M-1391401으로 이 글을 적고 있다. 전설의 키보드라는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다고 나는 새삼스럽게 다시 절감한다. 가볍고 저렴한 멤브레인 키보드가 쏟아져 나오면서 시끄럽고 낡은 이 버클링 방식 키보드들은 대부분 고물상으로 팔려가거나 그냥 폐기처분됐다. 이 키보드는 지금 2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지금 여기에 와 있다. 묵중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울림을 만들어 낸다.

엄밀히 말하면 모델M은 기계식 키보드는 아니다. 스프링이 휘어져서 바닥을 때리지만 모델M 역시 스위치는 멤브레인 방식이다. 멤브레인이란 얇은 막이란 뜻인데 별도의 스위치가 없고 회로가 인쇄된 비닐 막의 특정 부분을 눌러서 접점을 만드는 방식을 말한다. 보통은 러버돔이라는 고무 덮개를 씌워서 반발력을 주는데 바닥을 찍어야 입력이 이뤄지기 때문에 충격이 고스란히 손가락에 전달되고 그만큼 피로감이 쌓이기 쉽다.

모델M은 좀 더 정확하게는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로 분류된다. 볼펜 스프링을 생각하면 쉬운데 세로로 압력을 주면 바로 눌리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툭하고 옆으로 휘어진다. 그 순간 압력의 변화가 생기면서 스위치가 바닥을 찍게 된다. 러버돔을 쓰는 멤브레인 키보드와 달리 바닥에 닿기 전에 입력이 이뤄지고 철컹철컹 하는 명확한 구분감을 주기 때문에 그만큼 오타도 줄어들게 된다.

1984년 IBM에서 처음 출시된 모델M은 1993년 렉스마크로 팔렸다가 1995년 다시 유니콤프로 팔려 나갔다. 아직까지도 비슷한 제품이 나오긴 하지만 1980년 후반 제품을 최고로 친다. 인터넷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서는 포장도 안 뜯은 1988년 신품이 100달러 언저리에서 거래되기도 한다. 단단하고 견고한 플라스틱 하우징과 두꺼운 철제 보강판, 빛이 바랠수록 가치를 더하는 이중 키캡 등은 왜 이 구닥다리 키보드가 최고의 평가를 받는지 설명해준다.

참고 : 아직도 이런 키보드들이 사고팔린다. (클릭키키보드닷컴)

(사진은 플리커에서. 이 글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가지 이유로 이 키보드는 처분했다. 더 좋은 주인에게 사랑 받으면서 오래오래 좋은 글 많이 만들어 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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