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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보고 배워라” 대통령의 난감한 ‘자뻑’ 개그.

Written by leejeonghwan

March 29, 2009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가 금융위기로 이어지고 세계적인 신용경색과 경기침체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은행들은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았다. “은행들이 무리한 외형 경쟁으로 단기외채를 늘려 금융 불안을 초래했다”, “은행이 돈줄을 좨서 가계와 기업의 돈맥경화가 심해졌다”, “은행이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서지 않아 경기회복이 지연되고 있다”, “은행은 정부 지원을 요구하기에 앞서 자구 노력부터 보여야 한다” 등등 온통 은행 비판뿐이다.


그러나 과연 은행의 과도한 실적 경쟁이 모든 문제의 원인일까. 비판은 쏟아지지만 과연 대안은 있나. 누가 은행이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가계와 기업 대출을 늘리도록 강제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산건전성을 확보하도록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위기가 반복되지 않도록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은행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판은 공허하고 아무런 구체적인 대안 제시도 없다.

IMF 외환위기 이전 29개였던 은행이 지금은 11개로 줄어들었다.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평화은행, 광주은행, 경남은행 등이 우리금융지주로 합병됐고 조흥은행과 충북은행, 강원은행, 신한은행, 동화은행, 제주은행 등이 신한금융지주로 합병됐다. 하나은행과 충청은행, 보람은행, 서울은행 등이 하나금융지주로 합병됐고 국민은행과 대동은행, 장신은행, 주택은행, 서울은행 등이 KB금융지주로 합병됐다.

이밖에 한미은행과 경기은행이 씨티뱅크 서울지점과 합병해 한국씨티은행이 됐고 제일은행은 뉴브릿지캐피털에 넘어갔다가 다시 스탠더드챠터드에 넘어가 지금은 SC제일은행이 됐고 외환은행은 론스타펀드에 넘어갔다가 매물로 나와 있는 상태다. 나머지 대구은행과 전북은행, 부산은행, 기업은행 등은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은행 숫자는 줄고 덩치는 훨씬 커진 셈이다.

숱하게 지적돼 왔던 바지만 우리나라 은행들은 지난 10년 동안 부동산과 건설업 대출을 늘려 왔다. 그 결과는 부동산 가격 폭등과 과도한 가계 부채. 그리고 세계적인 신용경색이 실물경제의 충격으로 이어지고 은행들이 돈줄을 조이면서 실물경제의 위기가 다시 금융 불안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한겨레의 지적처럼 “햇볕이 좋을 때는 우산을 빌려주겠다고 설치더니 비가 올 때는 우산을 뺏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한겨레 2월27일)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은 우리나라 은행들이 이미 대부분 외국인 손에 넘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KB금융지주는 외국인 지분 비율이 55.6%, 하나금융지주는 64.8%, 신한금융지주는 47.4%, 외환은행은 72.9%, SC제일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은 100%에 이른다. 국내 은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은행은 예금보험공사가 73.0%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우리금융지주 밖에 없다. 우리금융지주의 외국인 지분은 9.3%다.

이들 외국인 주주들은 주가가 뛰어오르고 더 많은 이익을 내고 더 많은 배당을 받는 것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리고 월급쟁이 행장들은 이들의 기대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국내 주주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은행의 사회적 책임 따위는 뒷전으로 밀려난지 오래다. 이들은 주주 가치 극대화를 최우선의 경영 목표로 내걸고 단기 실적에 치중하는 대신 엄청난 규모의 연봉과 스톡옵션을 그 반대급부로 받는다.

적절한 규제는 필요하겠지만 은행들에게 공연한 사회적 책임을 주문해 봐야 지금의 지배구조와 시스템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이들에게 중소기업들에게 대출을 늘리라고 강요할 수 있나. 저소득 계층에게도 신용대출을 확대하라고 강요할 수 있나. 부동산 대출을 줄이고 제조업 투자를 늘리라고 강요할 수 있나. 은행들은 지금 단기적인 이익에 매몰돼 사회 전체의 장기적인 이익 기반을 잠식하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주주가치 극대화 부르짖던 잭 웰치의 반성.

영국 파이낸셜타임즈는 지난 15일 “주주가치 극대화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주주가치 극대화는 세계에서 가장 바보 같은 발상”이라는 잭 웰치 전 제네럴일렉트릭 회장의 발언을 소개했다. 이 신문은 “상품의 질을 개선하고 소비자들을 기쁘게 해야 수익과 주가상승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이번 경제위기가 보여주듯 주가를 끌어올리려는 노력과 안정적인 수익 확보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크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또 “주주가치 극대화 이론은 주가에 거품이 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면서 “지난 10년 동안 목격했듯 거품이 낀 증시에서는 양떼처럼 몰려다니기만 하면 이득을 볼 수 있지만 거품이 꺼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잃는다”고 지적했다. 25년 전 주주가치 극대화를 처음 주창했던 웰치는 “주주가치 극대화를 CEO의 주요 목표이자 경영 전략으로 삼는 것은 정신 나간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웰치의 뒤늦은 후회 역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주주가치 극대화가 정신 나간 일이라고 하지만 어떤 CEO가 감히 주주들과 맞설 수 있단 말인가. 은행들이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단기수익에 매몰돼 자산거품을 조장하고 경제 전체를 볼모로 수익률 게임을 벌이다가 위기가 닥치면 결국 정부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결국 정부의 개입 없이는 근본적인 해법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런 맥락에서 27일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이명박 대통령의 “한국은 어떻게 금융위기를 해결했나”라는 제목의 특별 기고문을 꼼꼼히 따져 읽을 필요가 있다. 이 대통령은 “한국은 자산관리공사라는 특화된 독립기관을 설립해 부실 채권을 처리하고 동시에 예금보험공사로 하여금 금융기관의 자본 확충 업무를 맡도록 했다”면서 “부실자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모든 형태의 금융 보호주의는 배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이 제안한 6가지 원칙은 ▲시장의 신뢰 회복을 위한 과감하고 단호한 조치 ▲은행자본 확충과 부실채권 정리의 동시 적용 ▲부실자산 정리의 정치적 수용과 도덕적 해이 최소화 ▲ 시한이 명기된 원상회복 전략과 인센티브 ▲정부의 투명한 부실정리 주도와 민간자본 참여 ▲부실자산 처리 과정의 금융 보호주의 배격 등이다. 이 대통령은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한 과감하고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해법이었으면서 동시에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한계 요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막대한 규모의 혈세를 쏟아 부어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들을 살려낸 뒤 이를 민영화 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재벌 대기업의 독과점 구조는 더욱 강화됐다. 수출이 늘어났고 기업들 실적도 개선됐지만 양극화는 갈수록 심화됐고 내수 경제는 붕괴했다.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은행의 대형화와 겸업화를 독려해 왔다. 은행들 덩치가 커졌고 자산 건전성도 눈에 띄게 개선됐고 수익도 늘어났고 주가도 올랐고 외국인 지분 비율율도 늘어났지만 그 결과 우리 경제의 역동성은 오히려 둔화됐다. 정부는 자본시장통합법으로 이른바 금융 빅뱅을 밀어붙일 계획이다. 이미 무너졌거나 무너지고 있는 미국의 리먼브러더스나 씨티그룹 등 한물 간 투자은행의 모델을 답습하고 있는 형국이다.

일단 지원부터 하고 사후정산? 시장의 눈치를 보는 이명박 정부.

이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배우라고 외치는 것은 꼴 사납고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대통령은 정부가 실패한 시장의 뒤치다꺼리를 가능한 빨리 화끈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어떻게 그 책임을 묻고 그 성과를 사회적으로 배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단 지원부터 하고 사후정산을 하는 방식이 더 유용하다는 황당무계한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대책 없이 은행 탓만 하는 언론이나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자뻑’ 모드에 돌입한 정부나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유일한 해법은 은행의 부분 국유화 또는 사회화, 그리고 금융 공공성의 복원이다. 공적자금을 시의적절하게 투입하되 정부가 그 대가로 유효한 지분을 확보하고 주주로서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은행이 주주들의 이해에 복무하기에 앞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적절히 규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울러 동시에 지난 10년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무분별한 규제완화, 시장개방, 공공부문 축소 등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필요하다. 우리는 외환위기 극복이 곧 성장이라는 도식에 빠져 외환위기 이후에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주도적으로 수용했고 그 결과 성장의 한계를 맞고 또 다른 위기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위기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면 위기는 반복되고 심화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해법이 아니라 위기의 본질이다. 금융 공공성과 은행의 사회적 책임이 공연한 구호에 그칠 뿐이라면 그런 비판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위기 이후에 어떤 시스템을 만들 것인가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정부는 시장의 수호자가 아니라 때로는 시장을 배반하고 시장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 그게 이 대통령의 월스트리트저널 기고가 ‘자뻑’ 개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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