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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다.

Written by leejeonghwan

December 26, 2002

1. 준세이.

“약속할 수 있니?”
“무슨?”
“내 서른살 생일,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기로, 어때?”

스무살 때 일이다.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었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었던 사람. 그 사람을 잊지 못하면 나는 다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짚는 일은 참 쓸쓸하고 고통스럽다. 기억은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또렷해진다.

아오이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그림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오래된 미술품을 복원하는 일을 배웠다. 잃어버린 시간을 돌이키면서 죽은 그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덕지덕지 내려앉은 오랜 시간의 먼지를 여러꺼풀 벗겨내고 나면 비로소 화가의 붓끝과 가는 숨결을 마주 느낄 수 있다. 시간과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고 영혼은 서로 소통한다.

시간은 흐른다. 아오이의 서른살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아오이가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오이를 만날 수 없다면,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돌이킬 수 없는 오래된 기억에 매달리고 있다. 그런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

2. 아오이.

(아오이에게는 새로운 남자친구가 있다.)

나는 이 사람의 어디가 좋은 걸까. 올바른 것. 물론 그렇다. 마빈은 올바르고 성실하고 게다가 똑똑하다. 늘 너그럽고 말투도 차분하다. 또 뭐가 있을까. 글쎄, 나는 지금 하나라도 더 많이 생각해내려고 애쓰고 있다. 무엇인가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해.”

마빈은 내가 떠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안심시켜줄 수 없다. 아무데도 안가니까 안심하라고 늘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 걱정말라고 말해줄 수 없다. 누군가가 그리운 것과 애정을 혼동하면 안된다. 나는 아직도 준세이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준세이는 늘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열정, 한결같음. 그리고 행동력.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준세이에게 반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냥 게으르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그리고 1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서른살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3. 만남.

아오이의 서른살 생일, 준세이와 아오이는 결국 만난다. 그러나 과연 정지된 시간이 그때부터 다시 흐르기 시작할까.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았으니 이제 미래를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되돌이킬 수 있으며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아득하다. 어렴풋하고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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