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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비자금 사건을 보는 방법.

Written by leejeonghwan

October 22, 2003

” 라면 상자에는 2억원, 그보다 좀 더 큰 사과 상자에는 3억원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2억~3억원씩 1억원 단위로 담긴 상자를 승용차 조수석과 뒷좌석, 트렁크 등에 나눠서 18~19개씩 실어다 건네줬습니다. 그렇게 5차례, 모두 200억원이었습니다.” (전동수 현대디지털엔터테인먼트 사장의 증언)

200억원이면 1만원권 지폐 200만장, 100만원씩 묶어놓아도 2만다발이다. 라면 상자 하나에 차곡차곡 잘 쌓으면 200다발이 들어간다고 한다. 헌돈 1억원의 무게가 12kg이 넘으니까 한상자의 무게는 25kg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 200억원이면 모두 100상자, 2.5톤 트럭 한대를 가득 채울 분량이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대충 이렇다.

2000년 1월 신라호텔 커피숍에서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을 만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대북 사업은 잘 되느냐”고 묻는다. 별명이 ‘열마디’일 정도로 말수가 적은 정몽헌은 “어렵습니다”고만 대답한다. 권노갑은 “민주당이 잘 돼야 대북 사업도 잘되지 않겠느냐”며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정 회장이 좀 도와달라”고 말하고 정몽헌은 머리를 조아리며 “네, 알겠습니다”고 대답한다. 이어 권노갑은 자금 관리인인 김영완씨가 시키는대로 하라며 자리를 뜨고 김영완은 정몽헌에게 3천만달러를 요구한다.

이 상황은 한달뒤에 똑같이 재연된다. 2000년 2월 권노갑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말을 한 뒤 자리를 뜨고 김영완은 총선 준비 문제로 200억원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자리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네사람 가운데 두사람은 이제 우리나라에 없다. 정몽헌은 죽고 김영완은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남아있는 두사람, 이익치와 권노갑의 주장은 크게 엇갈린다. 권노갑은 이익치의 주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권노갑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돈은 3천만달러와 200억원,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모두 600억원에 이른다. 현대 비자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역시 이익치의 증언에 따르면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도 2000년 4월 프라자호텔 커피숍에서 현대 그룹의 대북사업이 잘 되도록 도와주겠다며 150억원을 건네받았다. 이익치는 정몽헌의 지시를 받고 1억원짜리 양도성 예금증서 150장을 봉투에 담아 건넸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박지원은 이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박지원은 이 양도성 예금증서를 사채시장에서 현금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의 발단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8년 금강산 유람선 사업을 계획하던 현대아산은 여행 경비를 한사람 앞에 1300달러로 할 계획이었는데 정부가 나서서 1000달러로 낮추라고 요구했다. 부담을 줄여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다녀올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대신 정부는 유람선에 카지노와 면세점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아산은 울며겨자먹기로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지부진 지켜지지 않았고 막상 사업이 시작되고 뚜껑을 열어보니 금강산 유람선 사업은 하루 3억원 이상 적자가 나는 골치덩어리가 됐다. 한달이면 적자가 무려 100억원, 1년이면 1천억원을 넘어설 판이다. 이 정도면 대북 사업에 모든 것을 올인했던 현대 그룹과 정 회장으로서는 안달이 날 법도 했다. 몇백억원 뒷돈이라도 먹여서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야 했다.

게다가 2000년 4월 무렵, 현대 그룹은 북한에 3억5천만달러를 주기로 약속해놓고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 상황이었다. 금강산 유람선 등 대북 사업을 의욕적으로 시작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북한의 요구는 꽤나 부담스러웠다. 현대 그룹은 당시 북한에 보낼 돈은커녕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 유동성 위기에 그룹 전체가 흔들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칫 제 2의 IMF 사태, 제 2의 대우그룹 부도 사태로 번질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돈이 없어 쩔쩔매기는 당시 김대중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정상회담을 해줄테니 1억달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한들 어떻게 쥐도 새도 모르게 당장 1억달러를 만들 수 있겠는가. 제대로 절차를 밟아서 남북교류 협력기금이라도 받았으면 좋겠지만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야당에서 딴지를 걸게 뻔했다. 문제는 여기서 더 커졌다.

현대 그룹은 정부 관계자 누군가의 부탁 또는 요구를 받고 정부가 보내기로 했던 1억달러까지 덤태기를 써서 모두 4억5천만달러를 만들어 북한에 보낸다. 현대 그룹은 아마도 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산업은행에서 그 큰 돈을 대출 받는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을 모아보면 그 누군가는 아마도 박지원일 가능성이 크다.

대북 송금 사건의 관계자들은 지난 9월 재판에서 모두 실형과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대북 송금이 대통령의 초법적 통치 행위와 관계 없는 불법 행위라는 판단을 내렸지만 구체적인 범죄 경위와 정황을 밝혀내지는 않았다. 대북 송금 사건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정리해보면 현대 그룹이 물밑에서 만들어 여기저기에 건넨 돈은 4억5천만달러와 3천만달러, 그리고 200억원과 150억원, 환율 1300원 기준으로 모두 6590억원에 이른다. 4억5천만달러는 어차피 부실 대출이니, 산업은행과 산업은행의 대주주인 정부가 떠안을 몫이고 200억원과 150억원은 각각 현대상선과 현대건설이 떠안을 몫이다. 3천만달러의 출처와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아직 권노갑과 박지원은 혐의 내용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검찰도 돈이 정몽헌에게 나와 이익치를 거쳐 김영완까지 흘러들어간 사실은 확인했지만 정작 그 돈이 권노갑이나 박지원에게 흘러들어간 정황은 아직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증언을 해줄 김영완의 행방이 묘연하기 때문이다.

권노갑이나 박지원이 이 돈을 정말 받았는가 여부와 관계없이 현대 그룹이 경영 실적과 회계 장부를 조작하고 엄청난 비자금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건넨 것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김재수 현대건설 부사장은 “정 회장의 지시로 건설공사 대금을 가불하는 것처럼 꾸며 150억원의 자금지출결의서를 만들어 1억원짜리 양도성 예금증서 150장을 구입해 이익치 회장에게 전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도 “정 회장의 지시로 용선료와 화물선적비 등 지출이 발생한 것으로 꾸며 허위전산전표를 만들어 현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의 직원들도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다. 죽은 정몽헌의 진술서에도 그렇게 나와있다.

현대건설의 지난해 매출액은 5조4433억원, 영업이익은 1954억원, 당기순이익은 192억원에 이른다. 현대상선도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해 매출액은 5조659억원, 영업이익은 540조 적자, 당기순이익은 1483억원 정도다. 이제 이 회사들의 재무제표를 어디까지 믿어야할까 가늠할 수 없지만 수백억원의 비자금은 이 정도 규모 회사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현대 비자금 사건이 충격적인 것은 이런 엄청난 일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그렇게 돈을 쏟아붓고도 현대 그룹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정몽헌은 갑자기 자살해버렸다. 권노갑의 3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이익치는 정몽헌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익치는 “왜 정 회장의 빈소에 가지 않았느냐”는 권노갑 변호인의 질문에 “개인 사정상 빈소에는 가지 못했지만 나중에 산소를 찾아 성묘를 했다”며 울먹였다.

주가조작 사건 등으로 현대 그룹과 사이가 벌어져 이번 수사 과정에서 검찰에 협조, 결정적인 수사 단서를 제공했다는 추측을 낳고 있는 이익치의 눈물은 이 사건의 성격을 설명해준다. 수백억원의 뒷돈이 건너갔지만 결국 현대 그룹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회장은 죽고 대북 사업은 정당성과 사업성을 모두 잃었다. 어디로 갔는지 돈을 받은 정치인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흔히 건설업과 조선업은 회계가 불투명한 대표적인 산업으로 꼽힌다. 발주에서부터 최종 납품까지 몇년씩 걸리는데다 비용 산정이 어려워 회계장부를 조작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3년 뒤에 완공될 아파트의 매출을 언제로 잡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실적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때 수출의 역군을 자임했던 종합상사들도 이제 대표적인 부실 산업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계열사들끼리 거래를 주고 받으면서 매출을 만들어내거나 해외 매출을 부풀리는 방법으로 그룹 계열사들의 부실을 떠안고 그 부실의 상당부분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음을 현대 비자금 사건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SK비자금 사건도 마찬가지다. 비자금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현대건설과, 현대상선, 그리고 SK글로벌이었다.

검찰은 이익치는 물론이고 김충식과 김재수, 전동수 등 횡령과 뇌물공여 등 혐의가 명백한 현대 그룹 관계자들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거물급 정치인들이 줄줄이 말려든만큼 사안이 워낙 심각한 탓도 있겠지만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기업 비자금의 실체가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다. 드러난 것이 전부라고, 현대와 SK에 국한된 사례라고 도대체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결국 검찰은 비자금 사건의 실체를 건드리지 않고 몇몇 정치인을 구속하는데서 끝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몇몇 정치인들은 법정에서 증거 부족으로 집행유예 정도를 받고 풀려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악순환은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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