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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소송제를 도입하라.

Written by leejeonghwan

October 23, 2003

주식 투자자들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판결이 나왔다.

사상 최대의 주가조작 사건에 가담했던 회사 사장과 펀드매니저들이 대부분 집행 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난데 이어 주가 폭락으로 손해를 본 투자자들이 이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항소심에서 기각된 것이다. 이번 판결은 특히 일련의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의 범위와 산정기준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문제의 사건은 2000년 7월 코스닥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세종하이테크 주가조작 사건.

서울고등법원 민사1부(재판장 이성룡 부장판사)는 지난 16일 김한수씨 등 주식 투자자 342명이 2000년 당시 세종하이테크 사장이었던 최종식씨 등 작전세력 8명과 대한투신증권 등 6개 법인을 상대로 낸 21억여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최씨 등의 시세조정 행위가 법에 어긋난 중대한 위법행위인 것은 분명하지만 주가가 의미있을 정도로 크게 움직인 것은 3일에 지나지 않고 그밖에 주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는 이상 김씨 등 주식 투자자들에게 손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코스닥 지수가 천정부지로 치솟던 무렵인 2000년 1월, 세종하이테크 주가조작 사건은 당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굵직굵직한 유명 펀드매니저들이 대거 가담해 전체 발행주식 75만주 가운데 15만주를 동원, 2000년 1월, 액면분할 이전 기준으로 11만원이던 주가를 33만원까지 끌어올린 희대의 주가조작 사건이었다. 그해 4월 작전세력들이 주식를 털고 나가면서 주가는 15만원까지 떨어졌고 뒤늦게 따라들어간 개인 투자자들은 큰 손해를 봤다. 당시 피해자는 4000여명, 피해금액은 36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 사건은 그해 7월 검찰에 의해 적발되면서 코스닥 신규등록 종목의 이상 급등 현상에 종지부를 찍는 한편 발행시장을 얼어붙게 하는 등 시장에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그해 3월 코스닥 지수는 283.44까지 치솟았다가 5월 115.46까지 고꾸라졌다가 7월 들어 150선에서 힘겹게 반등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무렵 터져나온 이 희대의 주가조작 사건은 시장에 찬물을 끼얹었고 코스닥 지수는 걷잡을 수 없이 하락, 그 뒤로 150선은커녕 한번도 100선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세종하이테크 주가조작 사건은 우리나라 주식시장 역사에 길이 기록될 참담하고 부끄러운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당시 작전세력들의 면면이었다. 이 회사 사장이었던 최종식씨는 세종하이테크가 코스닥 등록된 직후 당시 한양 증권 명동지점 부지점장이었던 이강우씨에게 주가를 끌어올려달라는 청탁과 함께 15억원을 건넨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이씨는 이 돈으로 당시 한국투자신탁 주식운용부 차장이었던 임홍렬씨에게 세종하이테크 주식 4만주를 사들이는데 대한 사례금으로 3억원을 건네는 등 6명의 펀드매니저에게 각각 1~3억원씩을 건넸다. 당시 주가조작에 가담했던 증권사와 투자신탁회사는 한국투자신탁증권을 비롯해 한양증권, 대한투자신탁, 랜드마크투자신탁, 국민은행, 삼성투자신탁 등 6개 회사에 이른다. 이씨와 이씨에게 청탁을 받고 자신이 운용하고 있던 펀드를 이용, 주식을 사들이고 사례금을 챙긴 6명의 펀드매니저들도 모두 구속 기소됐다.

임씨는 당시 2천억원 규모의 펀드를 운용하던 한국투자신탁의 대표 펀드매니저였다. 심지어 임씨와 함께 구속 기소된 당시 대한투자신탁의 주식운용부 차장 백한운씨는 4년 연속 우수 펀드매니저로 선정됐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했다. 억대 연봉의 펀드매니저였던 백씨의 당시 운용규모는 6500억원에 이르렀다. 고객의 돈으로 작전에 가담하고 그 대가로 사례금을 챙긴 펀드매니저들의 모럴헤저드,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그해 12월 모두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났고 이듬해 1월 항고심에서도 이씨만 실형을 선고 받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당시 증권가에서는 “한건하면 대박, 못해도 집ㅤㅎㅒㅇ유예”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주가조작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관대했다. 증권거래법에 따르면 이같은 시세조종 범죄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미국의 경우는 최고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중범죄다.

이들에 대한 민사 손해배상 소송까지 기각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자칫 개인 투자자들은 주가조작으로 입은 손해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판결이다.

지난해 2월 1심에서 법원은 김한수씨 등 주식투자자 280명이 이들 작전세력들과 이들이 소속된 투자신탁회사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1억1250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당시 법원은 한국개발원 교수들에게 감정을 의뢰, 시세조종이 없는 상태에서 기준주가를 산정하고 기준주가와 매입가의 차이를 계산, 피해액을 산정했다. 손해배상액은 투자자들의 책임을 일부 인정 피해액의 70%로 산정됐다. 당시 최철 부장판사는 “김씨 등 투자자들에게도 회사의 경영상태나 재무실적 등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원고의 과실책임을 인정했다. 당시 이 판결은 사상 최대의 주가조작 사건에 걸맞는 사상 최대의 주가조작 배상판결이었다.

그러나 지난 16일 법원은 이 사건의 항소심에서 결국 원심을 뒤엎고 김씨 등 주식투자자들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고등법원 민사1부 이성용 부장판사는 “1심 재판에서 산정한 손해배상액 감정결과는 액면분할이 주가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고 추정기간을 지나치게 짧게 설정하는 등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세종하이테크는 작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무렵인 2000년 2월 11일 액면분할 계획을 발표한다. 그날 주가는 18만6천원에서 20만8천원까지 상한가로 치솟고 개인투자자들은 앞뒤 안가리고 이 회사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코스닥 열풍이 한창이던 당시만 해도 액면분할 발표는 유동성이 늘어난다는 이유만으로 주가를 끌어올리는 호재가 됐다. 심지어 액면분할 테마까지 형성할 정도였다. 이 부장판사는 당시 세종하이테크 주가의 이상 급등이 단순히 주가조작 뿐만 아니라 이같은 액면분할 효과나 당시 시장 분위기 등 외부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결국 재판부는 작전세력이 주가를 흔들었던 석달 남짓한 동안 주가가 정상적인 주가보다 통계적인 의미를 가질만큼 높았던 날은 3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세조종의 배상책임을 규정한 증권거래법 188조 5항에는 배상액의 산정방식에 대한 규정이 없다. 재판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은 다음 세가지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먼저 투자자가 실제 지급한 금액과 처분 가격의 차이를 산정하는 ‘실손해 산정방식’, 그리고 시세조종 행위가 없었을 경우 매수할 수 있었던 가격과 실제 매수한 가격의 차이를 산정하는 ‘정상주가 차액 산정 방식’, 마지막으로 시세조종 행위를 중단하기 직전과 중단한 이후의 주가의 차이를 선정하는 ‘선순환 종료시 주가 차액 산정방식’ 등이다. 그러나 첫번째 방식은 처분시점이 언제인가에 따라 손해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고 세번째 방식은 시세조정 기간에 매수와 매도가 끝난 매매에 대해 적용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재판부는 결국 매수시점 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정상주가 차액 산정방식’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부분에서는 1심 재판부에 동의하면서도 정상주가를 계산하는 부분에서 판단이 엇갈렸다. 그리고 실질적인 손해를 입증하지 못한 투자자들은 결국 한푼도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됐다. 문제가 된 액면 분할은 2000년 2월11일 공시 때는 상한가까지 주가를 끌어올렸다가 정작 액면분할 이후 거래 첫날인 그해 4월10일에는 하한가까지 주가를 끄집어 내렸다. 재판부가 주목한 부분도 이 부분이다. 작전세력의 부정한 손을 타기는 했지만 세종하이테크 주가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은 결국 호들갑스러운 투자자들 탓이라고 보는 게 맞다. 뛰는 말에 올라타랬다고 액면분할의 호재만 믿고 앞뒤 안가리고 뛰어든 투자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 작전세력이 끼어들어 한몫을 단단히 챙겼다고 한들 피해자들은 이들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결국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 본인이 져야한다는 결론이다.

세종하이테크는 지난 92년 세종산업으로 시작해 97년 세종으로 사명을 바꿨다가 코스닥 등록을 앞둔 99년 7월 세종하이테크로 다시 바꿨다. 주가조작 사건을 겪고 난 뒤 2001년 소너스마린에스에이가 최대주주가 되면서 다시 소너스테크놀로지스로 사명이 바뀌었다가 최대주주가 다시 인지컨트롤스로 바뀌면서 인지디스플레이로 바뀌었다. 10년 사이 이름을 다섯번이나 바꾼 기구한 운명이다. 10월22일 현재 주가는 주가조작 당시의 10분의 1 수준인 1만6350원에 머물러 있다.

이정환 뉴시스 사회부 기자 top@leejeonghwan.com

그래프 / 2000년 세종하이테크 주가조작 사건 당시 주가 움직임.

그래프 위에 설명을 써주세요.

12월14일 코스닥 신규 등록, 16일 연속 상한가.
1월13일 13만1천원 바닥 부근에서 주식 매집 시작 .
2월11일 액면분할 발표, 상한가.
3월31일 31만8천원 천정 부근에서 주식 매도 시작.
4월10일 액면분할 후 첫 거래, 하한가.

상자 / 집단소송제가 대안이다.

세종하이테크 사례에서 보듯이 주가조작에 가담한 작전세력들은 구속 기소되고도 대부분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나거나 고작 벌금을 무는데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가조작의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들의 처벌도 처벌이지만 손해배상이 더 중요하다. 문제는 주가조작 사실이 검찰이나 금융감독원에 의해 적발되기까지는 피해사실을 알 수 없는데다 피해를 알더라도 엄청난 소송 비용을 혼자 감당하기 부담스럽고 정작 소송을 내더라도 피해금액을 입증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세종하이테크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이 항소심에서 기각되면서 지금까지 내려진 가장 큰 주가조작 손해배상 판결은 1997년 11월 대한방직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이 됐다. 2000년 12월 서울고등법원 민사12부(재판장 오세빈 부장판사)는 사건 발생 전 과거 3년간 최고주가를 산출하고 이 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주식을 산 투자자들에게 그 매입가격의 차이만큼을 산정, 주식투자자 12명에게 2억1200여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 판결은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손해배상을 인정한 첫 판결이면서 사실상 유일한 판결이 됐다.

주가조작 배상판결과 관련해 관심을 끄는 제도가 바로 집단소송제다. 집단소 송제가 도입되면 기업의 주가조작이나 허위공시, 분식회계 등으로 손해를 본 소액주주들 가운데 누구든 한사람이 대표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서 승소하면 같은 피해를 본 나머지 투자자는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재판의 결과가 소송을 낸 당사자에게만 적용됐다.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그동안 엄청난 소송 비용 때문에 쉽게 소송을 내지 못했던 소액주주들도 얼마든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물론 기업들은 소송 남발과 주가 하락 등을 이유로 집단소송법의 도입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의 경우 집단소송을 당한 기업의 주식 시가총액이 지난해 기준 1조9000억달러(약 2100조원)나 줄었다는 통계도 이런 맥락에서 인용된다. 지난해 기준 미국에서 제기된 집단소송은 모두 224건으로 전년대비 31%나 늘어났다. 더 곤란한 문제는 판결이 나기도 전에 소송에 휘말렸다는 뉴스만으로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도 흔하다는데 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집단소송제의 도입을 꺼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집단소송제의 도입 여부는 소액주주들의 권익보호와 기업의 이익대변 가운데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집단소송제가 개인 소액투자자들에게 주가조작이나 허위공시, 분식회계 등 기업의 횡포에 저항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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