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신의 기원’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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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다. 나는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의 한자와 그 문화적 차이에 관심이 있다. 다만 일본 사람이 쓴 책이라 우리나라 사람들과 이해하는 맥락이 좀 다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내가 이해하는 맥락으로 ‘일본 정신의 기원’을 다시 써보기로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나라와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중국 사람은 ‘사람’을 ‘人’이라고 쓰고 ‘렌’이라고 읽는다. 우리는 ‘人’을 ‘인’이라고 읽는다. 그러나 사실 ‘인’은 ‘렌’의 잘못된 발음이다. 우리는 ‘인’이라고 말하면 ‘인’이 ‘人’인가, ‘因’인가, ‘印’인가, ‘忍’인가 도무지 알 수 없다. 다만 앞뒤 문맥을 따져서 ‘사람’을 뜻하는 ‘인’이겠거니 할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 사람이 ‘人’을 ‘인(렌)’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인’은 중국 사람에게 사람을 뜻하는 ‘人’의 발음 기호일뿐이다.

중국 사람에게 ‘인(렌)’은 사람을 뜻하지만 우리에게 ‘인’은 ‘人’으로 바뀌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의 뜻을 갖게 된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버려두고 ‘인’이라는 중국의 말을 가져다 썼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일본은 ‘人’을 두가지로 읽는다. 음을 따라 ‘징(じん)’이나 ‘닝(にん)’이라고 읽기도 하고 뜻을 따라 ‘히토(ひと)’라고 읽기도 한다. 한번 풀어서 설명하면 일본 사람은 ‘人’이라고 써놓고 ‘사람’이라고 읽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테면, ‘문화인’은 ‘文化人’이라고 쓰고 ‘분카징’으로 읽고 ‘어른이 되다’는 ‘人となる’라고 쓰고 ‘히토토나루’라고 읽는다.

우리는 ‘人’은 ‘인’이라고 읽을뿐 ‘人’을 바로 ‘사람’이라고 읽지 않는다. ‘사람’의 뜻을 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읽을 때는 ‘인’이라고 읽는다. 그게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이다. 일본은 한자를 들여오면서 ‘사람’을 ‘人’으로 쓰기로 했지만 우리는 ‘사람’을 버려두고 ‘人’을 ‘인’으로 읽기로 하고 ‘사람’ 대신 ‘인’을 쓰기로 했다.

몇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일본은 ‘山’을 음을 따라 ‘상(さん)’이라고 읽기도 하고 뜻을 따라 ‘야마(やま)’라고 읽기도 한다. ‘山’이라고 써놓고 ‘야마’라고 읽는 것은 우리가 ‘山’을 ‘뫼’라고 읽는 것과 같다. ‘산’은 중국의 ‘샨’라는 발음을 흉내낸 것일 뿐 스스로 아무런 뜻도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뫼’를 몰아내고 스스로 의미를 갖게 됐다.

일본은 ‘月’을 음을 따라 ‘카츠(がつ)’나 ‘케츠(げつ)’라고 읽기도 하고 뜻을 따라 ‘츠키(つき)’라고 읽기도 한다. 일본은 한자를 들여오면서 ‘달’을 ‘月’로 쓰기로 했지만 우리는 ‘달’을 버려두고 ‘月’을 ‘월’로 읽기로 하고 ‘달’ 대신 ‘월’을 쓰기로 했다. ‘월’은 중국의 ‘유어’라는 발음을 흉내낸 것일 뿐, 스스로 아무런 뜻도 없다.

일본어에서 음을 따라 읽는 음독은 보통 다른 말과 결합되는 합성어를 읽을 때 쓰고 뜻을 따라 읽는 훈독은 독립된 단어를 읽을 때 쓴다.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히기 때문에 일본 사람도 한자를 읽는데 흔히 혼동을 겪는다. 명함에 쓰여진 한자를 어떻게 읽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니다.

한자는 중국 사람에게 표의문자면서 동시에 표음문자다. 한자는 우리에게는 표의문자고 일본 사람에게는 표음문자다. 우리는 ‘사람’의 뜻을 담아내려고 ‘人’이라고 쓰고 일본 사람은 ‘히토’를 글로 적으려고 ‘人’이라고 쓴다.

우리나라에서 한자는 여전히 낯설다. ‘인’은 ‘사람’과 같은 뜻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인’은 이미 우리말이지만 그 뿌리는 결국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렌’이다. 우리는 ‘사람 = 인’, ‘달 = 월’, ‘뫼 = 산’이라는 등식으로 한자를 이해한다.

그러나 일본 사람에게 ‘人’은 그냥 ‘히토’다. 우리가 ‘사람’을 글로 표현하려고 ‘人’을 가져오고 중국 사람을 따라 ‘인’이라고 읽은 것과 달리 일본 사람은 ‘히토’를 글로 표현하려고 ‘人’을 가져오고 그냥 ‘히토’라고 읽었다. 일본에서는 ‘징’이 ‘히토’를 몰아내지 않았다. 중국에서 들어온 개념은 ‘징’으로 쓰고 일본 고유의 개념은 ‘히토’라고 쓰면 되니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신들의 황혼’에서 이를 두고 “한자가 일본을 정복하는 대신 일본에게 정복 당했다”고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정신의 기원’에서 “일본은 외래적인 한자를 내면화했다”고 말한다. 일본은 일본어를 글로 표현하려고 한자를 가져다 썼다. 우리가 한자를 들여와 중국 발음으로 읽으려고 애썼던 것과 다르다. 일본은 한자를 마음대로 읽는 것은 물론이고 한문도 일본어 문법과 어순에 맞도록 마음대로 뜯어고쳤다. 결국 중국 한문을 제대로 읽는 일본 사람은 거의 없게 됐지만 일본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많았다.

우리는 거꾸로 중국 한문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일본보다 많았지만 아예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 한자를 모르면 개념을 알 수 없고, 이를 테면 ‘人’이라는 한자를 모르면 ‘인’이 무엇을 뜻하는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읽고 쓰는 것은 물론이고 듣고 말하는데도 한계가 지워졌다. 동시에 우리 고유의 개념은 한자와 한문에 눌려 조금씩 사라졌다.

우리는 번역 없이 한문을 읽었지만 일본은 철저하게 번역을 하고 철저하게 일본화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일본화하는 과정에서도 한자는 철저하게 외부에 머물렀다는데 있다. 이를 테면 똑같이 ‘히토’라고 읽지만 ‘ひと’는 일본 고유의 개념, ‘人’은 중국의 개념, 둘은 명확히 느낌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카타카나도 마찬가지다. ‘빵’은 카타카나로 ‘パン’라고 쓰고 ‘빵’이라고 읽는다. 히라카나로 ‘ばん’라고 써도 같은 발음이지만 결코 그렇게 쓰지 않는다. 카타카나로 쓰여진 ‘パン’은 ‘빵’이 외래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히라카나와 한자, 카타카나, 일본은 세종류의 표기법으로 말과 개념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일본은 그래서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빠르다. 객체는 객체화할 때 비로소 인식된다. 객체를 무리하게 떠안으려 하지 않고 철저하게 객체화하는 일, 일본 정신의 기원은 이 바탕에서 이해해야 한다. 고진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자.

“예컨대 한자나 카타카나로 수용된 것은 결국엔 외래적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받아들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외래적인 관념은 아무래도 한자나 카타카나로 즉 표기에서 구별되는 이상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관념들은 본질적으로 내면화되는 일도 없고 또 저항도 받지 않는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저 옆으로 치워질 뿐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에는 외래적인 것이 모두 보존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말을 ‘詞(사, ことば)’와 ‘辭(사, じ)’로 나눈다. ‘詞’와 ‘辭’는 개념이 되는 말과 개념이 안되는 말, 한자로 쓸 수 있는 말과 쓸 수 없는 말의 구분이다. 결국 ‘辭’는 ‘테(テ)’, ‘니(ニ)’, ‘오(ヲ)’, ‘와(ハ)’ 같은 조사들이다. 아무런 내용도 없지만 미묘한 감정과 정서를 담은, 노리나가는 이것이 바로 일본 정신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일본에 유교나 불교 같은 지적이나 도덕적인 차원에서 고유한 것은 없다. 다만 그런 지적이고 도덕적인 원리에 부정되고 은폐되는 작은 감정이 바로 일본 정신이라는 이야기다.

류노스케는 말한다. “우리의 힘은 파괴하는 힘이 아니다. 변조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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