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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사랑’을 읽다.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11, 2003

좁다란 나무 침대에 나르치스가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에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갠 채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모습은 마치 송장과도 같았다. 그는 눈을 뜬 채 아무 말도 없이 골드문트를 쳐다보았다. 비난도 하지 않고 명상에 잠겨 어떤 다른 시대와 세계 안에 들어가있는 것처럼 친구를 알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나르치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절실한 일인가?” 나르치스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15분쯤 시간이 있어. 밤 기도가 시작될 시간이거든.”

그는 수척한 몸을 일으켜 아무것도 깔지 않은 나무 침대 위에 앉았다. 골드문트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며칠 밤을 새워 야위고 지친 얼굴, 방심하고 있는 듯한 시선, 나르치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약초 채집을 나갔다가 집시 여인 리제를 만난 골드문트는 수도원으로 돌아와 나르치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골드문트는 지금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수도원을 떠나려고 한다. 그래서 철야 기도를 앞두고 짧은 휴식 시간 동안 고요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나르치스를 흔들어 깨운다.

“제겐 목표가 없다고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나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에게 가기는 합니다만 아닙니다.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무언가가 나를 부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나르치스는 오랜 명상과 단식, 철야 기도에 쓰러질듯 지친 모습이다. 신앙과 진리 탐구에 젊음과 열정과 사랑과 미래, 모든 기대를 쏟아붓고 날마다 시들어 가는 친구에게 골드문트는 여자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겠다고 말한다. 나르치스를 닮고 싶었던 골드문트는 결국 나르치스가 여러차례 설명했던 것처럼 자신과 나르치스가 얼마나 다른가 깨닫는다. 골드문트는 그렇게 수도원을 떠나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한다.

헤르만 헷세의 소설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었다. ‘지와 사랑’, 원제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다. 이 책은 다섯번 정도 읽고 학교 숙제 등으로 세번 정도 독후감을 썼다. 새삼스럽게 다시 이 책을 들추는 것은 문득 내가 그리워하고 동경했으나 결국 버리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지나간 기억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골드문트는 평생 나르치스를 그리워하고 나르치스의 삶을 동경한다. 나르치스와 자신이 다르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렇다. 나르치스는 지금도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예배실에서 투명하고 창백하게 여위어 가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명상하고. 아마도 이제는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높은 정신 세계에 성큼 다가가 있으리라.

그때 나르치스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나를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나르치스와 다른 삶을 살게 됐다.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너와 같은 종류의 사람, 강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 영감을 받은 사람, 몽상가, 시인, 연애하는 사람, 그와 같은 사람은 우리들 다른 인간, 즉 정신적 인간보다는 대개 우월해. 너희들의 본성은 모성적이지. 너희들은 충실한 것 속에서 생활하며, 너희들에게는 사랑과 힘과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제공되어 있어. 우리들 정신적인 인간은 가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충실한 것 속에 살고 있지 않고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어. 충실한 생활, 과실의 즙, 사랑의 뜰, 예술의 아름다운 나라는 너희들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은 대지이지만 우리들의 고향은 관념이야. 너희들의 위험은 감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위험은 진공의 공간에서 질식하는 것이야. 너는 예술가지만 나는 사색가일 뿐이야. 그리고 네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을 때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어. 나에게는 해가 비치고 있으나 네게는 달과 별이 비치고 있고 너의 꿈속에는 소녀가 나타나지만 나의 꿈속에는 소년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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