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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통신을 생각함.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11, 2003

시인통신이 마침내 허물렸다. 딱히 자주 가는 집은 아니지만 양영권 기자랑 종로에 나갈 때면 꼭 시인통신에 들르곤 했다. 종로 1가 뒷골목, 칙칙한 1980년대의 분위기, 우리는 켜켜히 내려앉은 지나간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묵묵히 술을 들이켰다. 그 시인통신이 최근 재개발 바람에 밀려 결국 허물려 사라졌다.

다음에 들어가 찾아보니 ‘시인통신과 간큰 사람들’이란 카페도 있다. 그런데 회원도 거의 없고 게시물도 없다. 시인통신의 주인이 써놓은 듯한 문패만 덩그라니 걸려 있을 뿐이다. 어디로 옮겨갔을까, 시인통신은.

시인통신은 1980년 교보문고 뒷골목 2평짜리로 시작되었다. 그곳은 주인이 없어도 스스로 커피를 마시고 돈을 놓고 가버릴 정도의 서로의 허물이 없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상황에 따라서 드나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면서 많은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0년 계엄의 서슬한 칼날에 광화문으로 사람들은 몰려들고 그 작은 가게에는 30명 아니 40명씩 끼어앉아 이 나라의 울분과 최루탄에 찌든 사람들에 이야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학생, 기자, 시인, 소설가, 화가, 예술인, 노동운동가. 그 틈에 끼어앉아 있는 수상한 눈초리들. 그러나 그들은 그 작은 공간에서 비비면서 서로를 아꼈다.

돈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계산을 더 많이 했고 없는 사람들은 그냥 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불평과 대꾸조차 없었다. 화장실도 없는 그곳의 철대문 옆은 밤마다 생기는 낙서 투성이였다. 그때 그곳을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철대문으로 통했다.

지금은 모두들 50이 넘고 돌아가신 분들도 너무 많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이곳을 다니는 새로운 3040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금은 철대문집에서 쫓겨나 종로1가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곳은 인테리어를 하지 못한다. 왜냐면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냥 벽에 한지로 부치고 수리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그곳의 낙서들은 20년 전부터 있던 그들의 글이 있기에.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면 낯설다. 그러나 그곳의 역사를 안다면 자신을 그곳의 흐름에 맡기면 우리의 사라지는 정을 느낄것이다. 지금은 1, 2층으로 나누어져 있고 화장실도 있다. 화장실이 생기자 시인통신을 찾던 모든사람들은 너무나 좋아했다. 어린아이처럼.

주말에 사람이 없는것이 시인통신의 특색이다. 평일에 가야 낯익은 많은 사람들을 볼수 있다. 9시가 넘어서 가면 좋다. 이제 모든 분들에게 시인통신의 지나온 이야기들을 하려 한다. 시대를 지나오는 길에 시인통신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카페 ‘시인통신과 간큰 사람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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