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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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계백은 살아남아서 적에게 치욕을 보느니 지금 죽는게 낫다며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나선다. 영화 끝 무렵, 계백이 김유신의 칼에 목이 잘려죽는 순간, 영화는 계백의 부인이 죽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을 하든가 말든가, 나라가 쳐 망게불든가 말든가, 그것이 뭣인디 니가 내 새끼들을 죽여분다 살려분다 그래야!”

쨍하고 가슴에 아픔이 느껴진다.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울컥, 눈물을 흘렸다.

“호랭이는 죽어서 가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혔다. 제발 깨끗하게 가잔께.”

“뭣이 어쩌고 어쩌? 아가리는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제. 호랭이는 가죽 땜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지는 거여, 이 인간아.”

계백은 황산벌에서 5천명의 병사들과 함께 김유신이 몰고온 5만명의 병사들에 맞서 싸운다. 당과 신라의 욕심이 맞물려 오월동주, 일단 가장 힘없는 나라부터 무너뜨리기로 하고 시작한 전쟁. 한 나라의 역사가 여기서 끊길 판이다. 억울하고 서러운 전쟁이다. 굳이 이름 때문에 죽지 않더라도 기꺼이 목숨을 다해 싸울 명분은 충분하다.

성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성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머릿수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얕은 잔꾀로 마냥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천 수만의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명예로운 승리 또는 명예로운 죽음에 대한 확신이다. 그 확신이 사라질 때,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한낱 개죽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 성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황산벌’은 꽤나 균형잡힌 시선으로 백제와 신라를 바라본다. 관객들은 계백도 김유신도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 백제는 결국 그렇게 500년 역사를 마무리하고 신라는 당과 손잡고 삼국통일에 성공한다. 희화화하기는 했지만 ‘황산벌’의 역사관은 놀랄만큼 날카롭고 정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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