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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개의 시선’을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18, 2003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 제작한 영화다. 영어 제목은 ‘If you were me’, ‘네가 나라면’이다. 여섯명의 감독이 풀어낸 여섯개의 문제 의식. 우울하지만 많은 걸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다수에 속해 있을 때 우리는 소수가 얼마나 고통받고 얼마나 소외받는가 알지 못한다. 다수는 소수를 억압하면서 소속을 확인하고 만족을 얻는다.

1. 그녀의 무게.

여직원을 뽑는 면접. 면접관은 모두 느끼한 표정의 아저씨들이고 상고 졸업반인 여학생들은 물건처럼 그들 앞에 진열된다. 커피 심부름 하는데 고등학교 성적은 필요가 없다. 성격도 따질 이유가 없다. 얼굴과 키와 몸무게가 유일한 변별 기준이 된다. 외모의 차별은 어디에나 만연돼 있지만 스무살에 사회 첫발을 내디딜 이들에게 그런 현실은 가혹하고 냉혹하다.

현실이 이렇다면 학교 선생님이 이들에게 살을 빼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살을 빼서 취업을 해라. 그래서 커피 심부름이든 뭐든 하고 돈을 벌어라. 다른 대안은 없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는 흔히 웃음거리일뿐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겪는 서러움을 한번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낄길거리고 웃는 뒷자리의 여자애들이 나는 몹시 신경쓰였다.

임순례 : “외모의 기준을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으면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자기 확신이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다.”

2. 그 남자의 사정.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야 알았다. 주민1, 주민2, 주민3, 주민4, 주민5, 주민6, 주민7, 그리고 A씨. 모두가 익명의 그늘에 숨어 있는데 A씨만 실명으로 드러나 있다. A씨가 지나갈 때 엄마들은 아이에게 말한다. “저 아저씨 옆에 가면 안돼, 알았지?”

A씨는 청소년 성 매매 범죄를 저지르고 벌금형과 함께 신상이 공개됐다. A씨의 ‘A’는 아마도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따왔을 것이다. ‘주홍글씨’의 헤스터 프린은 남편이 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간통(adultery)을 뜻하는 ‘A’자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라는 형벌을 받는다.

청소년의 성을 돈으로 사는 범죄는 경제적 능력을 가진 남성이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린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파렴치한 범죄다. 다른 범죄, 이를테면 매춘과 달리 청소년 성 매매 범죄는 상대의 경제적 무능력을 악용하는, 사실상 강간이나 마찬가지다. 가중 처벌해야 한다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신상공개가 과연 최선인가 하는 문제는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가중 처벌이 필요하다면 벌금이나 수형 기간을 두배, 세배, 그래도 부족하다면 10배로 늘리면 되지 않을까. 신상공개는 19세기 이래 사라진 수치형의 일종이다. 이를 테면 현대판 ‘주홍글씨’인 셈이다.

신상공개는 사회의 심리적 만족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죄를 벌하되 사람을 벌하면 안된다는 법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신상공개는 범죄를 예방하고 억제하는 아무런 효과도 없으면서 다만 A씨에게 창피를 주고 사회인으로서의 A씨의 지위와 역할을 송두리째 박탈하는데 그치고 있을 수도 있다.

정재은 : “무시돼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인권까지 보호하는 사회야 말로 진정 발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3. 대륙횡단.

좁은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애인 승강기는 무척 시끄럽고 느리다. 사람들은 길을 가로 막고 선 승강기를 비켜 지나가면서 동정의 눈빛을 보낸다. 승강기 위에 올려진 그는 그 눈빛을 묵묵히 모두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계단을 모두 오르기까지의 시간은 그래서 까마득하게 길다.

온몸이 뒤틀린 뇌성마비 장애인 김문주씨는 어느날 광화문 네거리를 횡단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카메라는 높이 떠서 비틀비틀 거리로 나서는 김씨를 잡는다. 승용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멈춰섰다가는 신경질적으로 비켜 지나가고 그렇게 대륙의 절반을 조금 지나칠 무렵 경찰들이 달려와 김씨를 붙잡는다. 김씨는 바닥에 드러눕고 울부짖는다. 김씨의 대륙횡단은 그렇게 좌절됐다.

여균동 :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다른 사람이 내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연습을 하기 바란다.”

4. 신비한 영어나라.

아이의 혀 밑바닥을 잘라내는 수술을 시키는 엄마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영어 발음을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설마 하고 넘겼는데, 이 영화는 그 끔찍한 수술 장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감독은 눈을 똑바로 뜨고 보라고 말한다. 아이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댄다. 어느순간 소리도 사라진다. 숨이 멎을 것처럼 끔찍하다.

이 영화가 짚어내고 있는 것은 영어 공부에 대한 집착이라기 보다는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부모의 기대와 욕심이다. 아무리 아이의 미래를 위한 옳은 선택이라고 한들 너무 잔인하다. 아무리 부모라고 한들 이럴 권리는 없다.

박진표 :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눈뜨고 못볼짓을 자행한다. 눈을 크게 뜨고 영화를 끝까지 봐주길 바란다. 가장 큰 인권침해는 자식의 인생을 먼저 결정해 버리는 오만함이다.”

5. 얼굴 값.

주차장 매표소에 예쁜 언니가 앉아 있다. ‘이런데 있을 애가 아닌데.’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얼굴은 반반한데 왜 이런데서 일하느냐.” 예쁜 언니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쁜 언니는 자꾸 틱틱거린다. 손님은 급기야 화를 낸다. “야, 얼굴값 하는 거냐. 손님한테 그게 무슨 태도냐.”

예쁜 언니는 괜한 편견 때문에 피곤하다. 마지막 반전을 기대하시라.

박광수 : “주차장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주인공처럼 우리도 편견과 편견 속에 쳇바퀴를 도는 건 아닐까.”

6.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뭐가 좋다고 도대체 뭘 얼마나 벌겠다고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 한국까지 왔을까. 네팔 사람 찬드라는 어느날 공장 기숙사를 빠져나와 라면을 먹으러 갔다가 지갑과 함께 길을 잃는다. 네팔 사람은 한국 사람을 많이 닮는다. 찬드라는 정말 시골에서 올라온 아줌마처럼 생겼다. 경찰은 한국말을 떠듬떠듬하는 찬드라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한다. 찬드라는 정신병원에 넘겨져 그곳에서 6년4개월을 갇혀지낸다. 아무도 찬드라가 외국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무관심은 그렇게 무섭다.

이건 실화다. 그리고 찬드라는 실존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찬드라처럼 사회에서 버림받고 격리되어 어딘가에 수용된다. 사회는 그들이 밖으로 나오는 걸 좀처럼 용인하지 않는다.

박찬욱 : “이건 특정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능, 그리고 그로 인한 슬픔을 그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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