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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3 : 레볼루션’을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19, 2003

1. 복습.

촛불에 손을 가져다 대면 뜨겁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그러나 이 뜨거운 촛불이 현실이 아니라면, 다만 뜨겁다는 느낌을 주는 신호, 두뇌의 자극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이상 뜨거움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촛불은 실재하지 않고 손은 실제로 타지 않으니까. 현실의 당신은 머리와 척추에 전기줄과 빨대를 꽂은채 커다란 유리병에 담겨져 잠들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의식은 시스템이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을 피곤하게 배회한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이상 당신은 이 현실과 가상의 현실을 구별할 수 없다.

“왜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을까.”

현실은 왜 이렇게 비현실적일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면, 상쾌한 아침과 맑은 바람과 투명한 햇볕과 향긋한 크림스프와 달콤한 키스와 슬픔과 분노와 그리움과 절망이 모두 가상의 현실이라면.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비가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꼬마아이 : 숟가락을 휘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 대신 진실을 깨달아야 해요.
네오 : 진실이 뭐니?
꼬마아이 : 숟가락은 없어요. 휘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죠. 숟가락에 집중을 하세요. 당신의 마음을 휘면, 숟가락도 휘어져요.

잡혀온 사람들은 커다란 유리병에 담겨 머리와 척추에 전기줄과 빨대를 꽂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의식은 로봇이 만든 가상 현실 시스템, 매트릭스를 흘러다니고 몸은 유리병에 무기력하게 누워 로봇들이 쓸 에너지를 마음껏 빨리운다. 그런데도 가상의 현실은 오히려 아늑하기만 하다.

“이 스테이크는 존재하지 않아. 내가 이것을 내 입에 넣을 때, 매트릭스는 나의 머리에 신호를 보내. ‘맛이 있다’고.”

2. ‘리로디드’의 가정.

숟가락이 없다는 걸 알면 숟가락을 휠 수 있다. 그러나 숟가락은 없지만 매트릭스는 분명히 있다. 숟가락을 부정할 수는 있지만 매트릭스를 부정할 수는 없다. 2편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서는 매트릭스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네오가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매트릭스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현실일뿐이다. 결국 진짜 싸움은 매트릭스 바깥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2편의 끝부분에서 네오는 시온을 공격하는 센티넬을 손으로 멈춰세운다. 그때부터 관객들은 혼란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네오의 초능력이 매트릭스 바깥에서도 먹히는 것일까.

(영화를 아직 안봤는데 앞으로 보실 생각이라면 여기까지만 읽으세요.)

나는 2편을 보고 난 다음 몇가지 가정을 세웠다.

뒤통수에 전극을 꽂고 누워 매트릭스에 연결돼 있을 때 우리는 매트릭스가 만들어 내는 디지털 신호를 사고하고 이해하고 기억한다. 디지털 신호를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소프트웨어를 플로피 디스크에 복사하는 것과 정확히 같다.

매트릭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네오는 시스템의 입장에서 보면 시스템의 균형을 위협하는 이를 테면 악성 바이러스다. 매트릭스 안에서 네오가 숟가락을 휠 수 있었던 건 숟가락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오의 능력은 매트릭스의 신호를 의식적으로 왜곡하고 시스템의 균형을 넘어서는 명령을 직접 만들어 내는데 있다. 네오가 매트릭스의 소스에 들어가 의인화한 시스템의 설계자를 만났다는 건, 시스템의 소스 코드가 네오의 두뇌에 그대로 복사됐다는 걸 의미한다.

네오가 매트릭스 바깥에서 센티넬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시스템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 또는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이 커다란 시스템이 결국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데 있다. 가상의 현실, 매트릭스를 움직이는 시스템과 매트릭스의 바깥에서 센티넬과 기계 도시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정확히 같다. 매트릭스의 안과 바깥은 모두 하나의 시스템에 묶여 돌아간다.

3. ‘레볼루션’의 사전 지식.

매트릭스는 수많은 프로그램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프로그램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하게 시스템의 통제를 따른다.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프로그램은 네오와 스미스가 유일하다. 스미스는 처음에 네오와 같은 악성 바이러스를 잡도록 만든 이른바 백신 프로그램이었다. 그때는 스미스도 시스템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1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네오는 스미스를 해킹하고 스미스의 프로그램에 자신의 일부를 덮어쓰기 한다. 물론 거꾸로 스미스가 네오의 프로그램을 복사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핵심은 바이러스를 잡으려던 백신 프로그램이 결국 바이러스가 됐다는데 있다.

스미스는 네오처럼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는 방법을 알게됐고 이를 기꺼이 즐긴다. 오히려 네오와 달리 순수한 프로그램인 스미스의 능력이 네오를 넘어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스미스가 네오에게 애증을 갖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스미스는 심지어 사람의 몸을 빌려 매트릭스 바깥으로 뛰쳐나오기도 한다. 네오가 매트릭스안에서 시스템의 소스 코드를 복사 또는 기억해 나온 것처럼 스미스는 베인의 두뇌에 자신을 덮어쓰기 한다.

사람의 몸을 갖게 된 스미스는 세상이 얼마나 낯설었을까. 매트릭스는 완벽하긴 하지만 매트릭스의 신호와 실제 몸이 느끼는 오감은 꽤나 다를테니까.

4. 매트릭스 3 : 레볼루션.

겉멋과 의미없는 복선을 모두 거둬내고 나면 줄거리는 간단하다. 시온은 결국 센티널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질 위기에 놓인다. 네오는 트리니티와 함께 시스템의 중심부로 간다. 컴퓨터로 치면 중앙처리장치, CPU다. 그곳에서 네오는 시온의 운명을 놓고 시스템과 담판을 벌인다.

네오는 베인과 싸우다 눈이 멀지만 눈을 감고도 시스템의 구조와 센티넬의 움직임을 모두 느낄 수 있거나 이미 알고 있다. 시스템의 소스 코드가 네오의 두뇌에 모두 복사돼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시스템이 한 사람의 두뇌에 담길 수 있다는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시스템의 고민은 이제 네오가 아니라 스미스다. 그래서 네오와 시스템은 서로 협상의 여지가 있다. 스미스는 이미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 매트릭스의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스미스를 없앨 수 있는 것은 결국 결자해지, 쉽지는 않겠지만 네오 뿐이다. 네오는 스미스를 없애주는 것을 조건으로 시온에 대한 센티넬의 무자비한 공격을 멈춰줄 것을 제안한다. 시스템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시온은 나중에라도 다시 공격할 수 있지만 매트릭스는 한번 무너지면 끝이니까. 시스템은 그래서 네오와 타협한다.

맑은 꿈이라는 게 있다. 꿈이라는 걸 알고 꾸는 꿈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 네오처럼 총알을 피할 수도 있고 하늘을 날 수도 있다. 네오와 스미스의 싸움도 맑은 꿈처럼 결국 상상력의 싸움이다. 상상력의 싸움은 극한으로 치닫기만 할뿐 좀처럼 끝을 보기 어렵다.

숟가락이 없다는 걸 알면 숟가락을 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휘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마음일뿐이다. 마찬가지로 네오나 스미스나 서로의 존재하지 않는 육체를 죽일 수는 없다. 죽는 것은 마음일뿐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죽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스미스를 없애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매트릭스에 들어가 스미스를 만난 네오는 덫을 놓고 유인한다. 네오는 시스템과 스미스를 연결하는 플러그다. 한바탕 난리법석 끝에 스미스가 습관처럼 네오에게 자신을 복제할 때 스미스는 네오를 통해 시스템에 접속되고 동시에 시스템의 통제에 묶이게 된다. 시스템은 재빨리 이 골치덩어리 바이러스를 삭제한다.

시온과 시스템은 결국 공존하기로 한다. 어차피 당분간이겠지만 말이다.

5. 궁금증과 아쉬움.

3편이 아쉬운 건 기대가 컸던 탓이다.

결국 2편이 낳았던 무수한 추측과 가정은 그리 명쾌하게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대부분 무의미하게 돼 버렸다. 물론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3편은 그냥 생각없이 보기만 해도 재미있다. 돌아보면 2편은 너무 과장되고 터무니없이 겉멋을 부렸다. 차라리 1편에서 끝내지 그랬느냐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끝까지 풀리지 않는 궁금증과 아쉬움은 어떻게 네오가 센티넬을 제어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물론 네오는 눈을 감고도 시스템을 모두 느낄 수 있거나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느끼거나 알고 있는 것과 제어하는 것은 또 다르다. 워쇼스키 형제는 설명을 제대로하지 않았거나 상상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2편을 본 관객들에게 터무니 없는 상상과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그만큼 3편에서 실망을 안겨줬다. 왜 이렇게 어설픈 실수를 했을까. 의미없는 복선을 마냥 늘어놓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다니.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이야기로 마무리하자. 한겨레신문에서 발췌한다.

“1편을 본 다음에는 온갖 책을 들고 왔다. 라캉, 리오타르, 데리다…. 2편을 보았다. 히치콕의 ‘현기증’을 자기의 원본으로 삼고, 저패니메이션을 뒤섞은 다음 컴퓨터 해킹 프로그램으로 다시 번역한 이 영화는 많이 따분해졌다. 그리고 3편을 보러갔다. 아무 생각없이 보러가면 된다. 시작이 있는 곳에 끝이 있다. 어쩌면 이 카피는 스스로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같다. 주체의 소멸이 지나쳐 테마의 소멸에 이른 것은 (워쇼스키의 말을 빌려) 이런 이야기의 필연이다. 그러니 따져 묻지 마라. 당신은 게임오버한 다음에도 그걸 사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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