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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무현은 FTA를 선택했을까.

Written by leejeonghwan

April 21, 2004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나는 노무현을 찍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최악을 막으려면 차선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고 그 현실적인 판단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른바 비판적 지지였던 셈이다. 그 때문에 나를 ‘노빠’라고 비난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민주노동당을 찍었다. 더이상 노무현을 비판적으로 지지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노무현의 한계를 알고 있고 그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열린우리당은 탄핵 국면을 뒤집어 주도권을 잡았고 덕분에 나는 비로소 차선이 아니라 최선을 마음놓고 찍을 수 있었다.

한때 노무현 정권은 역대 그 어느 정권보다 개혁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따져보자. 노무현은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것처럼 보였을뿐 실제로 아무 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그럴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노무현은 그동안 한나라당이 발목을 잡아서 제대로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댔다. 그러면서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칠레 FTA도 그랬고 이라크 파병도 그랬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도 마냥 방관하고 있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전혀 개혁적이지 못했고 사실 많은 부분에서 한나라당과 큰 차이도 없다.

이번 총선을 끝으로 그동안 노무현의 발목을 잡았던 수구보수 세력과 낡은 지역주의도 힘을 잃었다. 더이상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권은 이제 소모적인 정쟁을 넘어 제대로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노무현에게 개혁의 의지가 있느냐는데 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겠다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권력을 움켜쥔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경제 논리 앞에서 신자유주의에 저항할 명분이 이들에게는 없다. 이들은 자동차와 휴대전화 산업을 살리기 위해 농업을 희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금융 시장을 개방하고 주주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익을 챙겨주면서 이 모든 변화의 과정이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실업은 늘어나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계속 확산되는데 아무런 대안도 갖고 있지 않다. 이게 역대 그 어느 정권보다 개혁적인 정권의 실체다. 노무현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경제가 망가지는데 어떻게 더 버티란 말이냐고 반문한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개혁 의지는 딱 여기까지다.

마침내 4월1일에는 칠레 FTA가 마침내 발효됐다. 두 나라는 이제 관세 없이 자유롭게 수출과 수입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칠레에 자동차와 휴대전화, 컴퓨터 등을 더 싼 가격으로 더 많이 팔 수 있게 됐고 칠레도 닭고기와 감자, 포도와 복숭아 등을 우리나라에 더 많이 팔 수 있게 됐다. 정부는 FTA 체결에 힘입어 칠레에 대한 무역수지가 연간 3억2천만달러 늘어나고 덕분에 국내총생산도 0.005% 이상 늘어날거라고 장밋빛 전망을 마냥 늘어놓는다. 감자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좀 안됐긴 했지만 그들이 좀 희생을 하고 나라가 그만큼 더 잘 살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논리다.

자유 무역과 세계화의 매력은 언뜻 짜릿하다. 어릴 때 침흘리며 구경만 했던 바나나를 이제 노점상에서 2천원에 한송이씩 원없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처럼 개방하면 개방할수록 과일 가격이 낮아질지도 모른다. 내친 김에 쌀 시장까지 개방하면 가난한 서민들 가계 부담이 훨씬 줄어들지도 모른다. 중국 쌀은 1kg에 300원, 20kg 한포대에 6천원 밖에 안한다.

비판만 할게 아니라 이쯤에서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보자. 당신이 노무현이라면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FTA를 체결하지 않으면 칠레는 우리나라 수출품에 엄청난 관세를 매기고 우리나라의 자동차와 휴대전화는 칠레에 더이상 발을 들여놓을 수 없게 된다. 관세 없이 수출하는 다른 나라랑 경쟁이 되지 않을게 뻔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덩어리에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FTA를 거부할 명분은 거의 없다. 이게 노무현과 얼치기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다.

힘들고 돈 안되는 농사는 집어치우고 나라 전체가 반도체와 TFT-LCD, 휴대전화만으로 먹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까운 세금을 물지 않고도 마음껏 수출을 할 수 있는 신나는 환경이 됐으니 말이다. 다 쓰러져 가는 농업을 살리겠다고 잘 나가는 자동차나 휴대전화 산업을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모든 언론이 입을 모아 FTA를 통과시키라고 노래를 부르고 모두가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은 결국 FTA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이 아니라 누가 대통령이라도 어떻게 감히 FTA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

칠레 FTA는 시작일뿐이다. 우선 일본과 FTA 협상이 진행중이고 중국과 함께 3자간 FTA를 맺는 협상도 추진되고 있다. 이밖에도 싱가포르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인 아세안이나 유럽 연합과 FTA를 맺는 계획이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FTA는 대세다.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EAFTA나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FTAA(자유무역지대)를 비롯해 세계는 이미 자유무역의 소용돌이에 빠져든지 오래다. 자본은 국경을 넘고 모든 규제와 보호를 넘는다.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조아는 언제나 생산도구를 끊임없이 혁명하고 따라서 사회관계도 혁명한다”고 썼다. 세계화는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는 과정이다. 자동차를 더 싸게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자동차를 만들고 감자를 더 싸게 만들 수 있는 나라가 감자를 만든다. 생산성 없는 산업과 경쟁력이 없는 나라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세계화는 그렇게 착취와 종속이 확산되는 과정이다.

1994년 미국과 북미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한 캐나다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30%에서 60%로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 농가의 실질 소득은 24% 줄어들었고 농가 부채는 두배 이상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이 캐나다에 투자한 자금의 96.6%는 캐나다 기업을 인수합병하는데 집중됐다. 3천개가 넘는 기업이 미국 기업에 합병됐다. 10년 동안 캐나다의 생산성은 2% 가까이 늘어났지만 임금 상승률은 0.4%에 그쳤다. 실업률은 8.6%까지 올라갔다.

FTA를 찬성하는 사람들 논리의 핵심은 언제라도 개방은 불가피하다는데 있다. 그래서 착취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먼저 뛰어들어서 다른 나라를 착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착취를 당하더라도 아예 소외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논리도 있다. 당신은 이런 논리에 반대할 수 있는가.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유 무역이 추구하는 자유가 결국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나라들과 그 나라 금융 자본의 자유라는데 주목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자본의, 침탈의 자유다. 개방하면 할수록 국부의 유출은 피할 수 없다. 경쟁이 심화되면 국가도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 규제 완화와 노동의 유연화, 기업은 신바람이 나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린다. 살아남으려면 기업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고 더 많은 노동자를 잘라야 한다. 자본은 세계를 넘나들면서 먹을게 남아있는 제3세계 국가들을 쥐어짜고 악착같이 이익을 챙긴다. 개방된 시장에서 가난한 나라들은 경쟁력을 잃고 더욱 가난해진다. 착취당하는걸 알면서도 시장을 열어주고 그나마 남아있는 자원을 송두리째 내준다. 더 부지런히 일하는데도 세계의 빈곤은 더욱 확산된다.

놀라운 사실은 저 유명한 참여연대와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주도하는 소액주주 운동도 결국 신자유주의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는데 있다. 언뜻 재벌과 맞서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주주와 투자자들, 그 가운데서도 절대 다수의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을뿐이다. 기업은 주주의 이익과 주가 상승을 위해 단기적인 성과에 신경을 써야 하고 주주들에게 더 많은 배당을 줘야 한다. 기업의 이익은 그 기업을 끌고온 노동자들의 몫인가. 아니면 그 기업의 주식을 들고 있는 주주들의 몫인가. 신자유주의가 내놓는 해답은 명확하다. 실업이 늘어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격히 확산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를 대변한다.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뿌리는 제법 깊다.

낯설게도 신자유주의에 맞서 우리가 기댈데는 국가 밖에 없다. 이미 국경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세계화의 배후는 미국도 칠레도 그 어느 국가도 아닌 자본이다. 국가는 오랫동안 권력과 억압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자본의 침탈에 맞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보호막이다. 그런데 그 국가가 국민을 버리고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나섰다. 노무현 정부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자본을 선택할 것이냐. 국민을 선택할 것이냐. 여기서 전선이 갈린다. 자본과 국민을 동시에 끌어안을 수는 없다. 노무현 정부는 결국 자본을 선택했다. 내가 ‘노빠’가 되기를 거부하고 민주노동당을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안타깝게도 노무현에게는 자본의 논리를 거부할만한 철학도 용기도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할 때다. 우리 시대의 성장 이데올로기를 되짚어 보자. 우리 국민소득은 과연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늘어나야 하는가.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대국 10위에서 9위로, 8위로 계속 올라서야 하는가. 기업은 영업이익을 지난해 1000억원에서 올해는 2000억원으로 늘려야 하는가. 도대체 왜. 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또 지금보다 얼마나 더 잘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자본의 천박한 논리에 휘둘리면서 말이다. 돈에는 색깔이 없다고? 웃기지 마라. 아무런 생각 없는 당신도 공범이다.

우리가 약탈하고 착취하는 자의 입장에 설 수 있을 때, 세계화의 폐해는 도의적인 문제일뿐 경제 논리로는 100% 옳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국민이나 노동자와 여성과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일 때 세계화는 생존의 문제다. 우리가 지금 세계화의 대세에 순응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는 일이다. 아무도 우리를 위해 싸워주지 않는다. 국가조차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우리 시대 가장 절박한 화두다.

* 창원대학교 교지 ‘봉림문화’에 실릴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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