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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특검과 수상쩍은 사회 대타협 논의.

Written by leejeonghwan

February 29, 2008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28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특검에 출두했다. 핵심은 이 전무가 경영권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그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있느냐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의 불법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조사 받은 것은 이 전무인데 흥미롭게도 비명은 언론이 지르고 있다. 29일 아침 주요 보수·경제지들은 이 전무에 이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소환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삼성그룹이 심각한 경영차질을 빚고 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한국일보는 22면에 <"칼날 깊다" 삼성 경영 올스톱>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서울신문은 6면에 <결국 오고야…>라며 삼성그룹 임직원들의 탄식을 그대로 전했다. 한국일보는 “삼성의 정상적인 경영 시스템은 사실상 올스톱인 상태”라며 “그룹의 주요한 행사는 모두 취소됐고 올해의 경영 방침을 가늠하게 하는 신년사는 물론 사업 방향을 설정하는 경영계획 수립도 연기된 상태”라고 전했다. 서울신문은 “일본 소니와 샤프의 전격 제휴로 삼성전자에 대한 위기감과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는데도 대책 마련은커녕 하루하루 특검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삼성그룹 임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하루 아침의 일이 아니지만 이들 신문은 총수 일가의 비리로 글로벌 기업의 경영이 올스톱되는 이 비정상적인 시스템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다. 이 회장 일가가 아니면 삼성은 굴러갈 수 없는 기업이란 말인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서울경제다. 이 신문은 28일부터 “사회 대타협 더 미룰 순 없다”는 주제의 기획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다. 특별 취재팀을 구성해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아일랜드까지 직접 둘러보고 왔다. 그리고 “시민사회와 노동, 기업, 정부가 자발적으로 한데 뭉쳐 사회대타협을 이뤄낸다면 한국 사회의 갈등 구조는 통합의 용광로로 바뀔 것”이라고 제안한다. “법과 질서를 지키는 가운데 상호 존중 속에서 건전한 비판과 협조의 문화가 정착된다면 대국 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내놓았다.

시리즈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먼저 궁금한 것은 왜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사회 대타협이냐는 것이다.

서울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진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성장의 불씨를 되살리고 분배를 확대”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지난 10여년 간 쌓여온 노사 대립 및 성장과 분배 갈등,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따른 취약계층 확대는 성장 우선 정책만으로 해결하기 쉽지 않고 특히 공동체 의식의 실종과 함께 중산층의 붕괴와 양극화, 이념 대립 등 사회 분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태”라는 문제제기도 중요한 골격을 이룬다.

사회 대타협을 둘러싼 논의는 지난 2003년 이후 대안연대회의를 중심으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핵심은 누가 누구와 어떻게 타협을 할 것이냐다. 더 구체적으로는 삼성을 비롯한 재벌 대기업들과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것이냐다.

지난 논의가 실패했던 건 막연히 외국의 사례를 답습하면서 불가능한 타협을 가정하고 종용해 왔기 때문이다. 기업은 타협할 의지가 없는데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정부 역시 기업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그런데 서울경제는 이 해묵은 논쟁을 다시 들춰내면서 “유럽의 선진국들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극심한 파업과 노사갈등을 극복하고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 복지확충의 세 마리 토끼를 잡아 현재의 부국을 건설하는 탄탄대로를 일궈냈다”는 다분히 교과서적인 결론을 끌어낸다.

네덜란드의 경우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대신 기업은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분배를 양보했다. 정부는 세금을 줄여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랬다. 아일랜드도 임금 인상을 제한하는 대신 정부가 소득세율을 낮췄고 덕분에 일자리가 크게 늘어났고 실업률이 줄었다. 서울경제는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세계 곳곳의 젊은이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몰려들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경제는 대타협을 주장하지만 정작 기업이 무엇을 양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일단 임금 동결을 받아들이고 세금을 깎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면 성장도 하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라는 이상한 도식으로 흐른다. 애초에 전제도 명확하지 않고 결론도 설득력이 없다. 서울경제는 부족한 설득력을 해외 사례를 통해 보완한다.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생산성 향상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 성장을 이뤄야 한다”는 핀란드 기업 연합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서울경제는 해묵은 논쟁을 아무런 비판없이 그대로 다시 끌어낸다. 스웨덴 발렌베리를 본받자는 이미 충분히 정리된, 다분히 식상한 주장이 대표적이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은 볼보와 에릭슨, 스카니아, 일렉트로룩스, SEB 등의 대기업을 거느린 기업 집단이다. 서울경제는 “만약 한국에 발렌베리 가문과 이들 기업이 있었다면 시민단체와 국민들은 뭐라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부의 세습 반대 목소리가 들끓을 것”이지만 “스웨덴 시민들의 반응은 딴 판”이라고 전한다.

서울경제는 발렌베리와 스웨덴의 사회적 대타협 모델을 둘러싼 지난 논쟁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서울경제는 “근로자들은 기업주들의 지배권을 영구 보장하고 기업주들은 기업이익금의 85%를 사회보장 재원(법인세)으로 내놓기로 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것으로 스웨덴 사회적 대타협을 정리한다.

삼성이 특히 삼성경제연구소를 내세워 발렌베리를 배우자고 주장하고 서울경제를 비롯해 보수경제지들까지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시스템을 추종하는 이 낯선 광경은 결국 우리나라도 스웨덴처럼 재벌 총수 일가의 경영권 또는 지배권을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낯 뜨거운 추파다.

물론 사회적 대타협 또는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은 충분히 열어둘 필요가 있다. 재벌 개혁도 그 연장선에서 논의돼야 한다. 그러나 짚고 넘어갈 부분은 기업 경영에 개입하지 않고 내부 감시자 역할의 감독 이사에만 머물고 있는 발렌베리 가문과 소수 지분으로 순환출자 등의 불법을 동원, 부당하게 경영권을 장악하고 이를 승계하고 있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일가는 애초에 타협의 지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먼저 사회적 대타협은 서로의 힘이 비슷해야 가능하다. 이른바 스웨덴 모델의 뿌리는 1938년 12월의 찰츠요바덴 협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자 단체인 LO와 기업연합 SAF가 체결한 이 협약의 핵심 내용은 노조가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대신 임금협상을 개별기업 단위가 아니라 LO의 중앙조직 차원으로 단일화하자는 것이었다.

LO는 이 협약 이후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됐고 LO를 지지기반으로 사민당은 74년 동안 장기집권을 이어올 수 있었다. 사민당이 세금을 늘려가면서 광범위한 복지모델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지지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웨덴의 사회적 대타협은 흔히 착각하는 것처럼 어설픈 타협이 아니라 치열한 정치 투쟁의 산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임금 동결을 통합 사회적 대타협의 배경에는 실업급여와 직업교육 등을 통한 적극적인 노동정책이 있었다. 임금을 동결하고 일자리를 나누는 사회적 합의와 연대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요구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철학과는 애초에 출발점이 다르다.

서울경제 이규진 기자는 기자수첩에서 “샬트셰바덴을 떠나며 반기업·반재벌이 아니라 파이를 키울 수 있도록 마음껏 멍석을 깔아줬던 당시 스웨덴 국민들의 장기적인 안목과 대승적 판단에 강한 부러움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에 돌아와 삼성특검 소식을 들을 때마다 샬트셰바덴이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는 대목에서 이 시리즈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역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서울경제와 인터뷰에서 장 교수는 “지금 재벌 입장에서 아쉬운 것은 그거(경영권 안정) 하나 뿐”이라며 “국민들이 그거 하나를 쥐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틀을 짜보자는 것”이라고 밝힌다. “경영권에 대한 집착이 있고 아쉬운 게 그거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카드로 협상하자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장 교수는 일찌감치 ‘사다리 걷어차기’나 ‘쾌도난마 한국경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선진국들이 유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환상의 이면을 들춰내고 그 대안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국내 언론이 장 교수를 인용하는 과정에서는 경영권 안정만 부각시킬 뿐 정작 재벌이 무엇을 양보할 것이냐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이 빠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대타협이 불가능한 것은 재벌이 아무것도 양보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부 역시 재벌에게 양보를 종용할 의지가 없다. 노동자들에게 임금 동결을 요구하지만 정작 임금을 동결하더라도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보장이 없고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도 없다. 사회적 대타협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누구와 무엇을 타협하란 말인가. 서울경제의 뜬금없는 기획 시리즈와 그 의도가 수상쩍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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