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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훨씬 전에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영화다. 기억을 더듬어 한참을 찾았는데 DVD 따위는 아예 없고 어렵사리 토런트에서 내려 받아 영어 자막으로 다시 봤다. 미키 루크가 권투에 다시 빠져들기 전, 살인 미소를 흘리고 다니던 무렵의 영화다. 마틴은 아일랜드 해방군의 테러리스트다. 경찰에 쫓기다가 원치 않은 살인 청부를 떠맡은 마틴은 살인 현장을 한 신부에게 들키고 만다. 그는 신부에게 총을 겨눴다가 그냥 돌려 보낸다.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면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브뤼노 다베르는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2년 반이 흘렀다. 어느날 온 가족이 모여 TV를 보는데 아들이 말한다. "우리 아빠도 저런데서 일해야 되는데." 브뤼노는 중얼거린다. 저 친구가 내가 할 일을 대신하고 있군. 그날 저녁 브뤼노는 위험한 계획을 떠올린다. 내 경쟁자가 과연 몇명이나 되는지 알아야겠어.

영화 '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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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끄 베넥스의 1981년 영화로 이른바 누벨 이마쥬의 대표 작품으로 꼽힌다. 이미지만 강조한 현실 도피적인 영화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영화가 또 얼마나 되나. 나는 이 영화를 10번쯤 봤다.

'몽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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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안 몽크는 사랑하는 아내 트루디가 죽고 난 뒤 정신질환에 시달린다. 잘 나가던 강력반 형사였던 그는 3년 동안 집밖에 나오지 않다가 지금은 탐정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최고의 탐정이지만 누군가의 셔츠에 얼룩이 묻어 있거나 테이블 위에 놓인 연필의 길이가 다르거나 하면 도무지 집중을 하지 못한다. 경찰 복직을 희망하지만 거부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악수를 할 때마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야 하고 엘리베이터가 무서워 30층 건물을 걸어 올라간다. 길을 걸을 때면 모든 기둥을 한번씩 꼭 만져줘야 한다.

기록과 증언을 종합해보면 1980년 5월 27일, 광주 금남로 전라남도 도청에는 157명의 시민군이 남아 있었다. 질 게 뻔한 싸움. 그야말로 개 죽음이 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끝까지 도청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와 맞서면서 군인들을 기다렸고 결국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그들이 왜 그렇게 무의미한 죽음을 자처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정부가 보증보험 시장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가 내부 검토에 들어갔고 곧 공청회도 열릴 전망이다.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보증보험회사인 서울보증보험이 거세게 반발하는 가운데 새로운 시장을 넘보게 된 손해보험회사들은 벌써부터 군침을 삼키고 있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보증보험 시장 개방, 과연 독일까 약일까. 정부는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시장 개방을 추진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적으로 에이즈 환자가 4천만명이 넘지만 그 가운데 제대로 치료를 받는 사람은 5%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약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약회사들이 내놓은 에이즈 치료제는 한 달 분량에 700달러 정도. 그런데 인도의 제네릭 약품을 만드는 제약회사들은 거의 비슷한 약을 30달러 미만에 만들 수 있다. 당장 사람이 죽어 가는데 약값이 없다. 700달러짜리 정품과 30달러짜리 짝퉁, 약효에 차이가 없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에스엔유 프리시젼은 특별한 회사다. 대학교 실험실 벤처로 출발한 이 작은 회사는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과 일본, 대만 등 세계 굴지의 대기업들에 초정밀 계측장비를 납품하고 있는데 해마다 매출과 이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세계시장 점유율이 73%에 이르고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32.6%, 1인당 순이익도 1억2500만원이나 된다. 대학 교수가 사업에 뛰어들어 세계시장을 무대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성공 비결을 들어보고 대학과 기업의 연계, 산학협력의 현실과 과제를 고민해 본다.

'조선일보'에 "방향 잘못 잡은 양극화 해소 정책"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성신여대 경제학과 강석훈 교수의 글이다. 강 교수는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시장과 경쟁 원리를 더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득 격차가 확대되면 소득 분배는 약화되지만 계층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양극화도 완화된다는 논리에서다.

나는 매주 월요일마다 경기도 의왕시의 야학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야학의 강학(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대학생들이거나 대학을 졸업한 직장인들이고 학강(주로 배우는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정규학력 미필자들이다. 이들은 배움의 한을 풀려고 날마다 저녁에 야학에 온다.

김미숙은 수다스럽고 말많은 아줌마다. 언제 어디서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는 아마도 우리나라 보험 시스템의 문제를 가장 정확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보험이론을 전공한 대학 교수들도 그만큼 소비자의 입장에서 제도의 이면을 고민하지 못한다. 진보진영의 이론가들 못지 않게 그의 관점은 명확하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다.

인터뷰 / 김미숙 한국보험소비자협회 회장.

한때 잘 나가던 보험설계사였던 그는 어느 날 보험회사들이 계약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보험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지금은 보험회사와 맞서 싸우면서 계약자들의 권리찾기에 주력하고 있다. 보험회사들의 문제점을 파고들던 그가 언젠가부터 공적보험의 강화라는 주제에 매달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사적 보험의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고 결국 해답은 사회적 합의와 연대, 공적 보험의 강화 밖에 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황우석은 말한다. 배아줄기세포는 생명이 아니라고. 난자에서 핵을 떼내고 사람의 체세포를 이식해 만든 배아줄기세포는 자궁에 착상될 수 없기 때문에 생명이 될 수 없다고. 다만 장기 세포로 분화해 인공 장기를 만드는데 쓸 뿐이라고 말한다. 이건 현실이다. 보건복지부는 어제, 7월31일 생명윤리법에 따라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에 배아줄기세포 연구룰 승인했다. 국내 첫 승인 사례다.

순박한 섬 마을 사람들이 살인 사건의 공범이 된다. 그리고 몇년 뒤 누군가가 잔인한 복수를 시작한다. 이 영화가 끔찍한 것은 어쩌면 관객들 모두 공범이 될 수 있다는 걸 암시하기 때문이다. 저주처럼 피의 비가 쏟아질 때 마을 사람들은 뛰쳐나와 흐느껴 운다. 집단화한 공포는 개인적인 공포보다 더 끔찍하다.

'점프'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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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어설픈 도둑 2인조가 담을 넘어 들어온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도둑들, 집을 잘못 들어온 것 같다.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엄마, 아빠, 삼촌, 딸이 모두 무술깨나 한가닥하는 고수들, 무술 합계가 모두 117단이나 되는 집이다. 아닌 밤중에 신나고 통쾌한 도둑 잡기가 시작되고 도둑들은 한바탕 혼쭐이 난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관객들은 한시간 반 동안 조금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점프'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몇 안되는 연극 가운데 하나다. 이 연극에서 임한창씨의 배역은 주정뱅이 삼촌이다. 백수에다가 늘 말썽만 일으키는 천덕꾸러기지만 벽을 타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세바퀴 도는 재주가 있다. 술이 좀 되면 중국 영화에서 본 듯한 취권도 나온다. 이날 밤 도둑 잡기에서도 삼촌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한다.

"L'homme sans tete". 후안 솔라나스 감독의 17분46초짜리 단편영화다.

머리를 가게에서 사고 팔 수 있다면 어떨까. 돈만 내면 얼마든지 멋진 머리를 살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별볼 일 없는 머리밖에 살 수 없다. 그마저도 없거나 내키지 않으면 머리 없이 다니는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머리는 그냥 액세서리, 장식품일 뿐이다.

죽은 여자친구가 어린 남자애로 환생하고 어처구니 없게도 그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서 이은주는 인우의 죽은 여자친구 태희로 나온다. 태희는 영화가 시작하고 20분도 안돼서 죽는다. 태희는 예쁘긴 하지만 수동적이고 마치 소품처럼 영화의 흐름에서 한발 벗어나 있다. 영화는 철저하게 인우의 관점에서 흘러간다.

'연애소설'에서 이은주는 비를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수인으로 나온다. 수인은 친구 경희가 죽고 난 다음 연락을 끊고 사라진다. 수인과 경희는 지환을 좋아하면서도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이들을 찾아 헤매는 건 지환이다. 수인은 마냥 기다리고 지환을 만나자 마자 죽는다. 다만 비극적이고 감동적인 결말을 위해 수인은 죽는다.

유령과 크리스틴은 언뜻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사라 브라이트만을 생각나게 한다. 음악을 가르쳐 주었지만 크리스틴은 유령을 존경하기만 할 뿐 사랑하지는 않는다. 유령은 그런 크리스틴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것은 가망없는 욕망이다.

참고 : 사라 브라이트만을 생각함. (이정환닷컴)

흥미롭고 놀라운 영화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상영되지 않았고 당분간 상영할 계획도 없는 것 같다. 따라서 당신은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읽어도 무방하다. 아마도 볼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시간 순서가 뒤섞여 있기는 하지만 영화의 흐름을 따라 줄거리를 다시 정리해 본다. 천천히 제대로 읽어야 이해가 된다.

1. 기차 여행에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엘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라는 그 흔한 노래를 모른다. 어색함을 풀어보려던 클레멘타인은 벌쭘해진다.

'오아시스'에서 종두는 공주를 강간하려다 실패한다. 공주는 그런 종두에게 전화를 걸고 종두는 다시 공주를 찾아간다.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다는 공통점 말고는 두 사람이 왜 서로 사랑하게 되는가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왜 이들이 서로 사랑하면 안되느냐고 반문한다.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 관객들은 이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을 선뜻 부인하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관객들은 종두와 공주의 영역 밖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불편하다.

이 그림, 어딘가 수상하다. 일단 옛날 그림치고는 꽤나 직설적이고 선정적이다. 이 여자애 표정을 봐라. 슬쩍 뒤돌아보는 그런 무심한 눈빛이 아니다. 진주 귀걸이도 수상하다. 예쁘긴 하지만 많아봐야 17살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딱 봐도 별로 부유해 보이지 않는 여자애가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예쁜 귀걸이다.

1632년 네덜란드 태생의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이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꼽힌다.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냈던 베르메르는 평생 36점의 그림밖에 안그렸고 43살에 일찍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지만 이 여자애가 누구인가, 베르메르와는 어떤 사이인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딸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니다. 그렇다고 연인을 바라보는 열정적인 눈빛도 아니다. 이 영화의 상상력은 여기서 출발한다.

'엘리펀트'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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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는 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사람들이 총을 얼마나 쉽게 살 수 있는가 보여준다. 미국, 특히 미시간주에서는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면 사은품으로 총을 준다. 논란이 많은 부분이지만 미국에서는 실제로 누구나 총을 쉽게 살 수 있다. 그 총으로 당신은 누구든 쏠 수 있다. 해마다 1만1000여명이 그렇게 총에 맞아 죽는다. '엘리펀트'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우편 주문으로 총을 샀고 13명을 쏘아 죽였다. 이 영화는 부분적으로 영화지만 본질은 실화다. 1999년 4월 22일의 일이다.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다. 개연성은 있지만 지나치다.

용병 출신의 크리시는 처음으로 보디가드 일을 맡는다. 멕시코시티에서는 한시간에 한건 꼴로 유괴가 벌어지고 그 가운데 70%는 돌아오지 못한다. 크리시는 피타의 보디가드가 된다.

영화는 여기서 조금 복잡해진다. 군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크리시는 한번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본 적 없다. 그런데 예쁘고 착한 피타가 크리시를 사랑한다고 한다. 피타는 아홉살 짜리 여자애다. 피타는 너무 예쁘고 착하고 그런데도 별 볼 일 없는 크리시를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웅'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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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중국 사람들의 꿈이다. 우리는 언뜻 그들의 꿈에 매료되지만 그 꿈에서 깨는 순간 언짢아진다.

이 영화는 진나라의 황제, 진시황과 그를 죽이려는 자객들의 이야기다. 수천명 정예 군사의 호위를 뚫고 진시황을 죽일 방법은 거의 없다. 장천과 파검, 비설이라는 자객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가 실패했다. 진시황은 이들 세명의 자객을 모두 죽이는 자에게 황제를 열걸음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고 선언한다.

또 다른 자객 무명은 이를 노린다. 자객들을 모두 죽이고 호위를 뚫고 황제 앞에 설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일 수도 있다. 그게 진시황의 욕망 앞에서 무참하게 죽어간 동족의 원수를 갚는 유일한 방법이다.

'빈 집'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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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영화는 대개 끔찍하다. 이를테면 살인의 예감 같은 것이다.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상황, 또는 죽이는 상황, 그리고 파국. 강간을 하거나 강간을 당하고 미치거나 낚시 바늘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김기덕의 영화가 끔찍한 것은 그런 파국이 일상적인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김기덕은 그런 상상을 그대로 영화에 담아낸다.

'빈 집'의 끔찍함은 좀더 교묘하다. (아래는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줄거리를 전혀 모르고 보는게 더 좋을 수도 있다.)

'연인'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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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章子怡'는 '장쯔이'라고 부르면서 '劉德華'는 '유덕화'라고 부르는 것일까.

'章子怡'의 중국 발음은 '장쯔이'고 한국 발음은 '장자이'다. '劉德華'의 중국 발음은 '류떠화'고 한국 발음은 '유덕화'다. 우리는 '章子怡'를 '장쯔이'라는 중국 발음으로 부르고 '劉德華'를 '유덕화'라는 한국 발음으로 부른다. 최소한의 원칙도 없다.

일본 사람인 '金城武'는 일본 발음으로 부르면 '가네시로 타케시'가 되고 중국 발음으로 부르면 '진청우'가 된다. 우리는 그를 '금성무'라고 부른다.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을 어떤 사람은 마음대로 '장예모'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궈룽(張國榮)'은 '장국영'이 되고 '저우룬파(周潤發)'는 '주윤발'이 된다. 잘난 척을 하려는 게 아니라 부르기에는 편하지만 분명히 잘못된 발음이다.

쿠르드족에게는 나라가 없다. 이란과 터키, 이라크의 국경 산악 지대에 살고 있지만 남의 땅일뿐이다. 이란과 터키, 이라크는 쿠르드족을 내쫓고 싶어하는 한편, 이들이 적당히 국경의 완충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쿠르드족의 역사는 핍박과 시련의 역사였다.

전체 인구는 3천만명에 이르는데 터키 국민의 24%(1500만명), 이란 국민의 12.4%(800만명), 이라크 국민의 23.5%(600만명)을 차지한다. 이밖에 시리아와 구 소련에도 각각 150만명과 5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워낙 수가 많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이들을 선뜻 독립시키지 못한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쿠르드족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

복선과 확인 만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장진의 '아는 여자'가 그렇다. 이나영이 연기하는 한이연은 '네 멋대로 해라'의 전경 그대로다. 딱히 새로울 건 없는 영화다. 줄거리가 어설프지만 꽤나 재기발랄하고 그럭저럭 재미도 있다. 그게 바로 복선의 힘이다. 아래는 영화를 보지 않을 생각이거나 줄거리를 미리 알아도 상관 없는 사람만 읽기 바란다.

'슈렉 2'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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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은 못생겼고 가난하다. 피부색부터 다르다. 진흙탕에서 살고 입 냄새도 고약하다. 사람들은 슈렉을 무서워하거나 싫어한다. 슈렉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다. 차별과 소외, 무관심과 냉대, 적의에 그는 익숙하다. 그는 사회적 약자고 소수자다.

1편의 마지막 장면, 마법에서 풀려난 피오나 공주가 여전히 괴물에 머물렀을 때 우리는 실망하면서도 안도했다. 공주가 꼭 예쁠 이유는 없다. 못생긴 괴물이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석연치는 않았지만 그때만해도 '슈렉'은 동화의 그야말로 동화적인 이데올로기를 뒤집는 것처럼 보였다.

2편에서 슈렉은 마법 덕분에 잠깐이지만 건장하고 멋진 청년으로 변신한다. 잠깐이지만 그때 그는 더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남들이 갖지 못하는 것을 갖는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다. 그가 지나갈 때 동네 여자들은 황홀한 눈길로 그를 쳐다본다.

피오나 공주도 마찬가지다. 사람일 때 피오나 공주는 정말 예쁘다. 그러나 슈렉과 피오나 공주는 사람으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다시 괴물로 돌아간다. 그리고 두 괴물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

2편에서 '슈렉'은 동화의 위선과 허구를 뒤집기는커녕 확대 재생산한다. '슈렉'은 동화의 이데올로기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 슈렉은 결국 진흙탕으로 돌아가고 다시 사회적 약자로 머문다. 사람들은 슈렉과 자기 자신을 결코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슈렉이 동화를 침범하거나 훼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도한다.

'슈렉 2'의 해피엔딩은 슈렉이 조롱하는 그 어떤 동화보다도 더 억지스럽다. '슈렉'은 동화의 허황된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히 한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슈렉'은 동화를 부정하는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동화에서 배제한다. 왕자와 공주의 동화는 여전히 동화로 남고 다만 슈렉이 거기에 합류할 자격이 없을뿐이다.

'트로이'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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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억달러. 돈을 마구 쳐바른 헐리우드 영화가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그저 그런 흥미거리 영화로 흘려넘기기엔 우연의 일치와 암시가 제법 절묘하다.

3200년전 고대 그리스 시대, 세계 정복의 야심을 품은 미케네는 연합군을 맺어 트로이에 쳐들어 간다. 전쟁의 이유는 좀 어이가 없다.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 달아났고 이 전쟁은 그에 대한 복수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형제다. 이들에게 사실 바람난 헬레네는 그냥 핑계다. 트로이는 해상무역의 시대, 육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트로이를 집어 삼키면 지중해를 장악하게 된다. 아가멤논은 트로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그의 욕심에 1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 트로이를 침공한다. 이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된다.

'포레스트 검프'를 꽤나 비슷하게 흉내냈는데 어딘가 언짢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따뜻한 이야기니까 그냥 보고 감동만 느끼라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감동을 느끼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설프고 억지스럽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발사 성한모는 얼떨결에 대통령의 이발사가 된다. 이발사가 본 대통령은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냥 대통령이고 그냥 마냥 두려울 뿐이다. 대통령이 곧 법이던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대통령의 이발사라는건 이발사에게는 최고의 명예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통령이 어떤 대통령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대통령은 설사병을 하는 사람을 잡아가둔다. 북쪽에서 내려온 간첩들이 설사병을 옮겨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설사병을 하는 사람이 모두 간첩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간첩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이쯤되면 웃어야 할까 언짢아 해야 할까 갈피를 잡기 어렵다. 설사병을 하는 사람들은 어딘가로 끌려가서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재판을 받고 결국 죽는다. 1974년 10월 유신 무렵이다.

그런데 이발사의 아들이 그 설사병에 걸린다. 이발사는 괜한 충성심에 아들을 파출소로 데려간다. 이제 겨우 10살인데 누가 이 아이를 보고 간첩이라고 하겠어? 게다가 나는 대통령의 이발사잖아.

아이는 끌려가서 어른들처럼 전기 고문을 당한다. 여기서 우리가 견딜 수 없는건 아이를 고문하는 권력의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고문하는 영화 감독의 상상력의 결핍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냥 따뜻한 이야기니까 그냥 보고 감동만 느끼라고 한다. 몇달만에 돌아온 아이는 고문 끝에 결국 다리를 못쓰게 된다. 이발사 아버지는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들쳐업고 전국 방방곳곳을 떠돌며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다닌다. 이쯤해서 감동의 눈물을 한번쯤 흘려줘야 된다.

온갖 약을 다 써도 아이는 걷지 못하고 돌아온 이발사는 다시 대통령의 머리를 깎기 시작한다. 이발사는 어린아이에게 전기고문을 하는 무자비한 권력과 대통령을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는 분노할줄도 모른다. 아픔을 모두 끌어안고 다만 견뎌낼 뿐이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우리나라 현대사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나열되기만 한다. 언뜻 권력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제대로 부딪히지도 제대로 들여다 보지도 않는다. 지나간 역사를 툭툭 건드리고 있을 뿐이다. 아이가 전기 고문을 당하는 장면마저도 마치 동화처럼 그려낸다. 아이가 입에 전구를 물면 파란 불이 들어오고 고문 기술자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쇼란 말인가.

5월 5일 개봉 예정. 상상력의 결핍과 강요된 감동, 빈약하고 무책임한 역사 인식.

신혼의 질투 많은 남편은 다른 남자들이 아내에게 말만 걸어도 화를 낸다. 남편은 화물선의 선장이다. 배는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강과 바다를 가로질러 끝없는 항해를 계속하고 아내는 언뜻 도시의 떠들썩함이 그리워진다. 결국 배가 항구에 멈춘 사이, 호기심 많은 아내는 남편 몰래 배에서 내리고 아내가 떠났다고 생각한 남편은 화를 내고 서둘러 배를 출발시킨다.

물론 남편은 얼마 못가서 금방 후회한다. 몇시간 뒤 텅빈 항구에 돌아온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남편은 배를 돌리지 않는다. 뭍에 남겨진 아내는 남편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난다. 남편은 넋이 나간 표정이다. "물 속에서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인대요." 남편은 아내의 말을 기억하고 물로 뛰어든다. 양동이에도 머리를 처박는다. 언뜻 아내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다. 보다 못한 선원들이 결국 아내를 찾아 나선다.

흑백으로 보는 바다와 안개는 꿈을 꾸듯 아득하다. 줄거리는 간단하면서도 매우 선명하고 경쾌하다. '라탈랑트'는 대표적인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 가운데 하나다. 장 비고는 장 콕토, 장 엡스텡과 함께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꼽힌다. 아방가르드(avant-garde) 또는 전위 예술은 1차 세계대전 무렵 자연주의와 고전주의의 전통에 맞서 나타난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등의 예술사조를 말한다.

시적 리얼리즘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영화는 장 비고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단편 영화를 포함해 평생 네편의 영화를 찍었고 29살에 죽었다.

'송환'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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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어왔지만 두 아이의 아빠로서 나는 생활의 유혹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때 이 할아버지들을 만났다." / 김동원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걸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알았다. 이 두시간반짜리 영화를 찍으려고 김동원 감독은 12년 동안 이 할아버지들과 함께 살았다.

사진의 김영식 할아버지는 간첩이었다. 그는 1962년 간첩선을 타고 내려오다 울산 앞바다에서 붙잡힌다. 그는 물 고문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1972년에 전향서를 쓰고 1988년에 출감한다. 어쩔 수 없이 전향을 했지만 풀려난 그는 같이 배를 타고 내려왔던 다른 할아버지들을 볼 면목이 없다. 다른 할아버지들은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고 30년 이상 감옥생활을 하다가 1992년에야 풀려났다. 김선명 할아버지처럼 45년이나 복역한 할아버지도 있다.

모두가 다 버리고 떠난 낡은 이념을 붙들고 이 할아버지들은 청춘을 감옥에서 흘려보냈다. 아직도 사회주의와 혁명을 이야기하고 모이면 김일성 찬가를 부르는 이들은 여전히 간첩이다. 그러나 늙고 힘없는,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간첩이다.

할아버지들은 말한다. 그깟 종이 한장이 뭐라고 전향서만 쓰면 풀어주겠다고 온갖 지독한 고문을 다 했다고 한다. 그런 고문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그런 말도 안되는 폭력에 지면 안된다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고 한다. 혁명은 실패했지만, 여기서 지면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죽을 각오로 버텼다고 한다.

할아버지들은 2000년 9월에야 마침내 고향 땅 북한으로 돌아간다.

김동원 감독은 할아버지들을 한번 더 만나고 싶었지만 국가보안법 전과 때문에 북한에 갈 수 없었다. 북한에 다녀온 친구가 찍어온 비디오에서 조창원 할아버지는 말한다. "김동원 그 사람, 말은 못했지만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오."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한없이 좋기만 했던 이 할아버지들은 간첩이었다. 그래서 모든 젊음을 감옥에서 버려야했다. 그 섬뜩한 열정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아서 끝내 고향에 돌아간 할아버지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너무 많은 걸 잃었지만 싸워서 결국 이겼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송환'을 "2003년 최고의 영화"라고 평가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따뜻한 영화를 나는 본적이 없다.

돈 주고 보기는 아까운 그저그런 영화다. 평범하지만 그럭저럭 기본은 하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 공식을 따른다. 심각한 고민없이 만드는 이런 영화들이 한해 수백편씩 쏟아져 나온다.

매트는 시골 마을의 보안관이다. 덜렁대는 꼴이 딱히 실력이 대단한 것 같지는 않다. 부인과는 별거 상태, 곧 이혼할 계획이고 따로 오래된 애인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애인이 뇌종양인가 암인가 심각한 병에 걸린다. 의사는 얼마 더 살지 못할거라고 한다. 애인은 죽고나면 100만달러에 이르는 보험금을 매트가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매트는 감동을 먹는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매트는 스웨덴에 가서 수술을 받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경찰서 금고에서 48만달러를 빼돌린다.

스위스로 떠나기로 한 날, 애인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애인의 집은 불이 꺼져있다. 그리고 다음날 애인과 그의 남편은 집에서 불에 타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돈 가방은 사라지고 없다.

매트는 이제 보험금을 노리고 애인과 그의 남편을 죽인 방화범으로 몰리게 됐다. 게다가 공금까지 횡령했다. 불륜도 드러날 판이다. 수사가 시작되고 강력반 형사인 부인이 수사를 전담하게 된다. 매트는 부인의 수사를 돕는척 하면서 방해하고 부인보다 더 빨리 진짜 범인을 찾아내서 누명을 벗어야 한다.

놀랍게도 애인이 불치병에 걸렸다는건 거짓말이었다. 이제 상황은 분명해진다. 애인과 그의 남편이 짜고 매트를 속여 공금을 훔쳐내도록 한다. 보험을 매트 앞으로 돌려놓고 가짜 시체를 만들어 불을 지른다. 두 사람이 돈을 챙겨서 사라지고 난 뒤 매트의 온갖 추악한 비밀이 드러난다. 이미 두 사람이 죽었고 돈은 사라졌고 불륜과 보험만 남았다. 이 상황에서 누가 매트를 믿겠는가.

상황 설정은 그럴듯하지만 결말은 모두 예측가능하다. 너무 뻔해서 하품이 날 정도다.

- 매트의 아내는 신참 경찰이면서 수사를 총괄 지휘하게 된다. 이혼 위기의 매트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도우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
- 매트의 아내는 남편의 수상한 행동을 눈여겨 본다. 결국 남편이 범인이라는걸 가장 먼저 알게 된다.
- 매트에게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매트를 무조건 이해하고 돕는다. 친구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매트를 구출한다.
- 매트를 배반한 애인은 결국 총을 맞고 죽는다. 매트가 죽기 직전 매트의 부인이 나타나 애인을 쏜다. 어, 당신이 어떻게? 관객은 모두 알고 있는데 매트만 혼자 놀란다.
- 매트의 애인은 일찌감치 돈을 들고 튀었어야 했다. 얼쩡거리다가 매트를 맞닥뜨리게 되고 진실이 드러나고 결국 매트의 부인이 쏜 총에 맞아 죽는 신세가 된다.
- 돈도 되찾고 누명도 풀린다. 그 여자를 사랑했어? 글쎄, 잘 모르겠어. 결국 아내는 남편을 이해하게 되고 두 사람은 다시 사랑하게 된다.

'사마리아'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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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를 보고 생각했다. 김기덕의 영화에 더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구원이니 화해니 괜한 삽질할 것 없다. 그야말로 꿈보다 해몽이 좋은 꼴이다.

이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임권택의 '취화선'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을 때부터 그딴 영화제의 권위와 안목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적 신비와 철학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아버지뻘 나이의 남자들에게 몸을 팔아 돈을 모으던 친구가 죽는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친구는 그 남자들을 만나 친구를 대신해 다시 그들과 자고 친구가 받았던 돈을 돌려준다. 아버지는 딸이 남자들과 여관에 드나드는 걸 보고 그 남자들을 찾아가 모욕을 주거나 때리거나 죽인다.

해몽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 바수밀다니 사마리아니 그럴싸하게 제목을 갖다 붙이긴 했지만 괜한 과대망상은 버려라.

나이든 남자들은 대개 역겹다. 죽은 친구는 그 나이든 남자들을 모두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여자아이가 몸을 팔면서 밝고 즐겁게 웃는 것을 보고 나이든 남자들은 맛이 간다. 어린 여자아이의 품에 안긴 나이든 남자들은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관객들은 불편하다. 남자들은 죄책감을 나눠갖고 여자들은 수치심을 나눠갖는다. 김기덕의 영화는 여전히 끔찍한 경험이다.

살아남은 친구는 죽은 친구를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은 친구에게 미안하다. 살아남은 친구는 죽은 친구가 그 남자들을 정말 좋아했다는걸 알게 된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친구가 모아놓은 돈을 돌려주기로 한다. 내 친구는 돈 때문에 너희들과 잔게 아니야. 그래서 이를 악물고 죽은 친구처럼 밝고 즐겁게 웃는다. 이 역겨운 남자들을 정말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죽은 친구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 그게 무력한 어린 여자아이가 죽은 친구를 대신해 해줄 수 있는 복수의 모든 것이다. 끔찍하지만 그렇다.

김기덕의 이번 영화에서 아버지는 무력하다. 딸의 행동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한다. 이 아버지는 무력할뿐만 아니라 무책임하기도 하다. 결국 딸을 놓아두고 혼자 떠난다. 딸을 죽이거나 강간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다른 영화라면 모르겠지만 김기덕은 그런 억지를 부리고도 남을거라고 생각했다.

대신 김기덕은 좀더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린다. 죽은 친구를 대신해 남자들과 자거나 그 남자들을 죽인 아버지가 잡혀가면서 누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가 누군가를 구원했다고 억지를 부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억지는 정말 가당찮다.

도대체 왜 김기덕의 영화는 이렇게 해몽이 거창한가. 모두 얼치기 평론가들이 만들어낸 잠꼬대일뿐이다. 드러난 것 이상으로 다른 의미를 두려고 애쓰지 마라. 흔히 비난하는 것처럼 남자들의 판타지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성의 없고 어설픈 영화다. 김기덕은 도발적이기만 하다. 메시지는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의미가 없다. 당연히 구원도 화해도 없다.

영화보다 더 한심한 것은 포스터와 광고 선전문구다. 영화와 아무런 관계도 없을뿐더러 정말 싸구려 발상이다. 도대체 누가 여자아이를 발가벗겨서 수녀 흉내를 내게 했을까. 그리고는 "내가 더러워?"라고 묻는다. 감독조차도 이 영화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모처럼 등산을 갔다 와서 일찌감치 자고 있는데 동생이 "형아야, '소림축구' 한다"고 하길래 깼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다시 봐도 재미있다.

주성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나는 주성치 영화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식신'도 '희극지왕'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그럭저럭 주성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부류에 들게 됐다. 나는 탄탄하게 잘 만든 영화가 좋다. '소림축구'는 요란하고 뻔하고 터무니 없이 과장되긴 하지만 잘 만든 영화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느낌을 준다. 밝고 긍정적인 희망을 불러 일으킨다.

수많은 중국 영화를 봤지만 나는 '소림축구'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을 제대로 그려낸 중국 영화를 보지 못했다. 씽씽과 그의 소림사 형제들은 넝마주이거나 식당 종업원이거나 야채장수고 늘어진 누런 런닝셔츠에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는다. 만두 하나 사먹을 동전 조차 없다. 주성치는 이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의 현실과 꿈을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구조는 얼핏 비슷하지만 우리가 봐왔던 영웅들의 중국 영화와는 그래서 다르다.

씽씽이나 아매 같은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는 백화점은 근처에도 갈 수 없다. 그게 현실이다. 씽씽은 아매의 손을 붙잡고 폐점 시간이 지난 백화점에 간다. 씽씽은 허풍을 떤다. "뭐든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아매는 예쁜 옷을 보고도 만질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때 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던 씽씽의 친구가 소리지른다. "야, 청소 도와주러 왔으면 청소나 할 것이지 뭐하는 짓이야."

아매가 태극권으로 만두를 빚는 장면은 정말 멋지다. 밀가루는 태극 무늬를 그리며 물과 섞이고 반죽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아매는 씽씽의 다 떨어진 운동화를 꿰매주지만 어느새 유명해진 씽씽은 운동화 같은 건 얼마든지 새로 사면 된다고 말한다. 눈물이 들어간 만두는 짜고 맛이 없다. 아매는 만두가게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그 아매가 축구대회 결승전에 나타난다. 씽씽의 팀은 잇따른 부상으로 선수가 부족해 실격패를 당할 상황이다. 아매는 골키퍼를 맡겠다고 한다. 씽씽은 아매가 건네준 헌 운동화를 신고 뛰기로 한다.

소림사에서 함께 수학했던 여섯 의형제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힘들게 배운 소림무공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고 가난은 불가항력이다. 축구는 이들에게 마지막 꿈이다. 영화에서나마 이들의 꿈은 이뤄져야 한다.

소림무공과 축구의 결합은 환상적이다. 그러나 강함으로 강함을 언제까지나 이길 수는 없는 법. 결국 강함을 이기는 것은 부드러움이다. 아매는 만두를 빚던 솜씨로 폭풍 같은 공을 춤을 추듯 가볍게 잡아낸다. '소림축구'가 시시한 코미디 영화에 그치지 않는 것은 터무니 없이 과장된 가운데 언뜻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수평적으로 뒤섞이고 복선과 복선이 절묘하게 교차한다. 단 한 장면도 군더더기가 없고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지 않는다. 이게 영화의 기본이다. 그 기본도 안돼 있는 영화가 너무 많다.

어설픈 컴퓨터 그래픽으로 덧칠을 하고 어쩔 수 없이 뻔하고 유치하긴 하지만 '소림축구'는 솔직하고 소박한 영화다. 즐거움을 주는 영화다.

이 남자, 어딘가 낯이 익다. 200만달러짜리 광고를 찍을 정도면 그럭저럭 잘 나가는 배우 아닐까. 나중에 알고 봤더니 '고스트 버스터스'에서 유령 사냥꾼으로 나왔던 빌 머레이라는 배우다. 물론 그때보다 훨씬 늙었다. 나이 탓일까. 이 영화에서는 제법 무게감이 있다. 모든 일에 심드렁하고 무관심한 남자다. 흘러가는대로 흘러보내고 굳이 잡으려 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체념과 냉소가 남자 주위에 묵직한 공기를 만든다.

이 여자, 아주 예쁘지는 않은데 매력적이다. 매력적이긴 한데 딱히 섹시하지는 않다. 어느 정도 닫아걸고 심드렁하게 흘려 보낼 나이가 된 남자와 달리 이 여자는 불안해하고 늘 두리번 거린다. 남자가 중심에서 고독한 것과 달리 여자는 겉돌면서 철저하게 소외돼 있다. 여자의 호기심과 냉소는 남자보다 더 직설적이고 경쾌하다. 우리는 이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이 여자의 매력이다.

나는 두 사람이 한번쯤 함께 잘줄 알았다. 이런 줄거리의 영화가 뭐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신기하면서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한번도 자지 않는다. 안타깝기보다는 상당히 다행스럽다.

두 사람은 익숙하게 서로를 알아본다. 어떤 사람들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해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너 공부시키려고 학교 관두고 구두통 메고 다녀도 한번도 후회한 적 없어. 어머닌 시장통에서 허리 한번 못 펴고 국수 팔아도 너 땜에 힘든 줄 모르고 살아."

동생은 훈장을 받아서 자기를 돌려보내겠다고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에 빠져드는 형이 두렵다. 누구든 그런 형을 놓아두고 혼자서 살아돌아갈 수는 없다. 평생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전쟁의 와중에 어디에도 도망갈 곳은 없다.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아서 함께 돌아가는 수밖에는.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물론 유례없이 훌륭한 영화라는 건 인정. 하지만 아쉬움이 많다.

스펙터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돈 많이 들이고 화약 많이 터뜨린다고 멋진 영화가 되는건 결코 아니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지 않느냐고? 글쎄, 카메라를 너무 흔들어 대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그 정도로 혼란스럽고 두려운 상황이라는 건 알겠는데 연출의 과잉이 아닌 정직한 영상이 아쉬웠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뒤로 숨고 화약 냄새와 돈 냄새만 과시하듯 넘쳐났다. 기대가 커서 그랬겠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장면은 굳이 외국영화를 예로 들 것도 없이 '무사'나 하다못해 '황산벌'만큼도 못했다.

스펙터클에 신경쓰다 보니 형과 동생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전쟁에 미쳐가는 형은 낯설기만 하다. "김진태는 이제 내 형이 아니야." 그런 형을 부인하는 동생의 반발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생은 한가롭게 병원에 누워있을게 아니라 좀더 일찌감치 형을 찾아나서야 했다. 동생은 마지막 두밀령 전투에서 죽어가는 형을 놓고 도망쳐 내려온다. 죽음을 무릅쓰고 형을 찾아나섰던 동생은 주저하지도 않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설명도 없고 반성도 없다. 이 영화는 정작 중요한 부분에 성실하지 못하다.

줄거리는 한번도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영화 시작부터 동생은 살고 형은 죽도록 예정돼 있었고 예정된 수순을 따라 험난한 전쟁을 거쳐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형은 죽는다.

감동적이고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안타깝게도 상상력은 가난하고 지극히 전형적이다. 나는 우리나라 영화의 흥행 공식이 자못 걱정스럽다.

'실미도'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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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누가 강우석 감독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투캅스' 같은 저질 코미디 영화만 만드는가. 강우석은 대답했다. '투캅스' 같은 영화 한편 만들어서 성공하면 다른 영화 세편을 만들 돈이 남는다. 지금은 예술 영화 만들 때가 아니다. 일단 살아남아서 영화를 많이 만들고 우리나라 영화 산업을 살리고 봐야 한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벌써 10년전 일이다. 그때 강우석의 전략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강우석은 '투캅스'의 성공을 발판으로 영화 투자와 제작으로 돌아섰고 제법 큰 수익을 거둬들였다. 그의 회사 시네마서비스는 코스닥에 올라갔고 강우석의 주식 평가액은 2004년 1월, 200억원을 넘어섰다.

돌아보면, 그의 성공은 좀 배가 아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화를 뭘 알아요? 기껏 '투캅스' 같은 영화에나 열광하겠죠. 나는 그의 그런 건방진 태도가 싫었다. 나는 그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우석은 끝까지 부인하고 있지만 '투캅스'는 프랑스 영화 '마이 뉴 파트너'를 완벽하게 표절했다. 나는 강우석을 용서할 수 없었다. 창의성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표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투캅스' 하나로 우리나라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떠올랐다.

돌아보면 강우석의 영화는 모두 '투캅스'처럼 과장되고 억지스럽다. '공공의 적'도 그렇고 '실미도'도 그렇다. 나는 강우석 영화의 잇딴 흥행 기록이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왜 그의 영화는 이렇게 인기를 끄는가. 왜 우리는 그의 영화를 안볼 수 없는가. '실미도'는 아주 형편없는 영화는 아니지만, 안봐도 딱히 아쉽지 않을 영화다. 개봉 한달도 안돼서 500만명이나 기를 쓰고 봐야할 만큼 그렇게 훌륭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실미도'의 놀라운 흥행을 보면서 나는 강우석과 시네마서비스를 비롯한 몇몇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가 대중매체와 영화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실미도'는 실화다. 나는 지난해 북파공작원들을 직접 인터뷰한적도 있다.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article&y_number=454&nnew=1

정말 영화 같은 사건이지만, 이를 영화로 만들 때 관건은 해석이다. 사건만으로 영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실미도'는 역사를 다루면서도 그 해석에 실패했다. 주제는 마냥 거창한데, 그 주제를 풀어내는 화법은 마치 '투캅스'처럼 서툴기만 하다. 장면 장면 감동은 남지만 영화를 총괄하는 메시지가 없다. 강우석은 지난 10년 동안 흥행의 기법만 어설프게 배운 모양이다. 그는 감독 보다는 영화 투자나 제작이 더 어울린다.

영화 마지막 부분, 수류탄이 터지기 직전 부대원들은 앞다투어 수류탄 위로 몸을 던진다.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서다. 친구가 물었다. 이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글쎄, 모두 이미 한번씩 죽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얼마든지 또 죽을 수 있다고 모든 미련을 버린 사람들이었으니까. '실미도'는 그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이 끝으로 치닫는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면 그건 아마 우리가 갈 곳 없는 이 사람들의 절망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형 당하거나 평생 감옥에서 썩을 쓰레기 같은 놈들이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죽여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손쉬운 편견은 끔찍하다. 그런 편견에 맞서는 절망과 분노는 기꺼이 무모한 죽음으로 치닫을만큼 뿌리가 깊다. '실미도'는 이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를 제대로 짚어내야 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어설픈 구성은 집요하게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쉬리'나 '공동경비구역'의 무게감을 흉내내려는듯, 분단 현실을 서툴게 덧칠했지만 도무지 갈피를 못잡는다. 문제의식 없이 애매한 피해의식만 늘어놓으니 당연히 비장감도 떨어진다. 등장인물은 지극히 피상적인데다 낯설만큼 격앙되고 과장되기만 할뿐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감독의 시선도 중구난방이다.

흥행의 목적으로 역사를 차용했을 뿐, 해석 없는 역사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좋은 영화는 돈을 쏟아붓는다고 되는게 아니다. 흥행에 성공할지언정 '실미도'는 기억에 오래 남을 좋은 영화는 아니다. 억지 흥행은 '투캅스' 시리즈만으로 충분했다.

2003년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반지의 제왕 3 : 왕의 귀환'이 있어서 더욱 특별했던 한해였다.

특별한 감상은 없다. 다만, 굉장히 신나고 신기하고, 무엇보다도 용기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영화였다. 나는 과연, 이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 모든 걸 내걸고 싸울 수 있을까. 싸우다가 죽어도 좋을만큼 이 전투는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만화 같은 이런 영화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건, 우리가 승리의 확신 없이는 현실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질 줄 알면서도 싸울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진짜 용기가 아닐까.

함께 영화를 본 금융연구원의 최공필 박사는 날마다 오크족 못지 않은 막강한 적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그의 적들은 일차적으로,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정부 관료들이다. 그는 지금이 IMF 무렵보다 더 심각한 위기라고 생각한다. 경제는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다. 그는 위기를 넘어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날마다 수많은 보고서를 만들고 정책 제안을 내놓지만 받아들여지는 건 하나도 없다. 그에게 권력의 독선에 맞서는 일은 오크족과 싸우는 일 못지 않게 절망적이다. 그래서 그는 일에서 겨우 벗어나는 토요일 저녁이면 만신창이가 된다.

위기는 우리나라처럼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애매하게 걸터앉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맞서 싸울 적조차 명확하지 않은 싸움을 해야 한다. 희생양은 일차적으로 가계와 노동자다. 그 와중에 기업은 사상 최대의 실적을 냈다고 난리법석이다. 경제는 빠른 속도로 양극화되지만 언뜻 위기는 드러나지 않는다.

오늘은 뒤늦게, 경숙과 달훈이 형과 조촐하게 모여서 최 박사의 생일 파티를 했다. 하시는 일에 올해는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인사를 건넸다.

현실은 상상에 못미친다. 책을 옮겨놓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열정과 냉정 사이'는 두권인데, 각각 준세이와 아오이가 주인공이다. 두권은 따로따로면서 하나의 제목과 줄거리를 갖는다. 츠치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 두명의 작가가 한 묶음씩 번갈아 가면서 쓴 소설, 읽을 때도 그 순서를 따라 읽는 게 좋다.

가장 아쉬웠던 건, 아오이가 내가 생각하는 아오이가 아니었다는 거다. 뭐랄까, 나는 아오이가 수선화 같은 여자일줄 알았다. 미우라 아야꼬 '양치는 언덕'의 주인공 나오미처럼, 무너져 내릴듯 깊은 아름다움을 담은.

아오이 배역은 홍콩 배우 천후이린이 맡았다. 한자로 '陳慧琳'이라고 쓰는데 모든 신문이 '진혜림'이라고 쓰고 있다. '진혜림'이 아니라 '천후이린(陳慧琳)'이다. '장국영'이 아니라 '장궈룽(張國榮)'이고 '주윤발'이 아니라 '저우룬파(周潤發)', '장자이'가 아니라 '장쯔이(章子怡)'.

그것은 우리가 이제 '모택동'을 '마오쩌둥(毛澤東)'이라고 고쳐 부르고 '주용기'를 주룽지(朱鎔基)라고 고쳐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연예인 이름이라고 결코 예외는 아니다. 기회가 있으면 다시 이야기하겠다.

천우이린은 예쁘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아오이는 아니었다.

줄거리를 모두 알고 나니 영화를 좀 더 꼼꼼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잘 만든 영화는 큰 줄거리 안에 작은 줄거리, 이른바 서브 플롯이 탄탄하게 엮여있다. 책으로 읽을 때는 무심하게 넘겼던 작은 줄거리 하나가 영화에서는 큰 줄거리보다 더 마음에 남았다.

준세이는 오래된 그림을 복원하는 일을 한다. 실력도 제법 인정받고 있다. 화가인 할아버지는 복원 따위는 그만두고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지만 준세이에게 그림을 복원하는 일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되살려내는 일이다. 준세이는 10년이나 지난 약속을 잊지 못한다. 준세이는 과거에 매여있다.

그러던 어느날 준세이가 복원하고 있던 치이고리의 그림이 갈갈이 찢긴채 발견된다. 그림의 변상도 변상이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을 망가뜨린 공방의 신용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1년이 넘던 복원 작업도 물론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원한을 산 것일까. 곧 공방은 폐쇄된다. 준세이는 일본으로 돌아와 백수로 지낸다.

그리고 얼마 뒤 준세이는 조반나 선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놀랍게도 그림을 찢은 사람이 조반나 선생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조안나 선생은 준세이를 사랑한만큼 준세이의 재능을 질투했을 수도 있다. 가슴 아프고도 쓸쓸한 일이다. 도대체 무엇을 되돌이킬 수 있단 말인가. 한번 찢어진 그림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서 아오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런 준세이와 달리 아오이의 설명이 부족했던 탓도 있다. 책과는 달리 준세이와 아오이가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는 장면이 끼어들었는데, 좀 어색하다. 설마 아오이는 그때까지 준세이를 잊고 있었던 것 아닐까. 영화의 상황설정은 그렇게 밖에 안보인다.

마지막 대사. "기적 같은 건 쉽게 일어나지 않아. 우리들에게 일어난 기적은 단지 네가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 끝까지 냉정했던 너에게 난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가슴속의 빈공간을 채울수 있을까. 나는 과거를 뒤돌아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 기대만 할 것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돼."

가끔은 연애 소설도 괜찮다. 제대로 된 연애 소설을 읽고 싶다면 '열정과 냉정 사이'가 좋다. 때마침 가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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