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003 Archives

미역국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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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들을 위한 간편 요리 조리법, 네번째. 미역국.

서른번째 생일을 맞아 이번에는 미역국을 소개한다. 미역국만큼 끓이기 쉽고 대충 끓여도 그럭저럭 먹을만한 국거리도 드물다. 게다가 온갖 영양소가 충분히 들어있다. 그야말로 자취생들을 위한 간편 요리다.

<재료>
소고기 한토막, 미역 대여섯 줄기, 참기름, 간장, 다진 마늘, 소금 약간.
냄비, 국자.

<요리법>
1. 소고기를 가로 세로 2cm, 두께 0.5cm 크기로 썬다.
2. 냄비에 소고기와 다진 마늘을 넣고 참기름과 간장을 부어 함께 볶는다.
3. 간장이 다 쫄아들면 냄비에 물을 붓고 볶은 소고기를 국물이 제대로 우러날 때까지 끓인다.
4. 소금을 풀어 간을 맞추고 미역을 넣고 더 끓인다.
5. 맛있게 먹는다.

<참고사항>
1. 미역은 미리 꺼내어 찬물에 담궈 둔다.
2. 미역은 혈액 순환과 신진 대사를 촉진시키고 고혈압과 동맥경화, 심장 장애에 효과가 있다. 요오드가 많이 들어있어 비만을 억제해준다.
3. 늦은 밤 출출할 때나 술 마신 다음날 아침 해장에도 딱이다.
4. 미역은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은 다음 물에 불리면서 염분을 제거하는 것이 좋다.
5. 파는 넣을 필요 없다. 파는 칼슘의 흡수를 방해하고 미역 고유의 맛을 앗아간다.

미역의 효능.

아이를 낳으면 엄마들은 왜 미역국을 먹을까.

미역 100g에는 단백질이 6.8g, 당질이 43.8g, 섬유질이 7.5g, 칼슘이 763mg, 요오드가 100mg씩 들어있다. 특히 미역에 든 칼슘은 분유와 맞먹을 정도다, 주목할 부분은 요오드다. 요오드는 심장과 혈관의 활동을 돕고 체온과 땀의 조절, 신진 대사를 증진시킨다. 요오드 공급이 부족하면 신진 대사가 느려져 비만이 되기 쉽다. 아이를 낳고 갑자기 뚱뚱해지는 엄마들은 요오드가 부족한 탓일 가능성이 크다.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는 꼭 필요한 음식이다.

게다가 미역은 강력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산성인 쌀을 중화시켜준다. 쌀 140g의 산도를 중화시키는데 미역 2.2g이면 충분하다. 산성 식품을 많이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특히 필수 식품이다.

미역을 기름과 함께 조리하면 각종 영양성분의 흡수율이 높아진다. 미역 초무침이나 미역국을 끓일 때 참기름을 한방울 떨어뜨리면 좋다.

미역은 또 피하지방이 축적되는 것을 막아 비만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 또 대장의 운동을 도와 음식물을 청소하고 장의 연동운동을 도와 숙변을 몸밖으로 내보내는 작용도 한다. 중성지방이나 콜레스테롤을 저하시켜 당뇨병의 예방하고 개선하는데도 효과가 있다. 고혈압과 동맥경화, 심장 장애 등의 성인병에도 좋다.

소양인, 몸에 열이 많아 얼굴로 열이 자주 달아오르는 사람이나 소면배설에 문제가 있는 사람, 담에 자주 걸리는 사람 등에게 효과적이지만 평소 손발과 아랫배가 찬 사람이나 소화기관이 약한 사람, 대변이 무른 사람에게는 별로 좋지 않다.

"시장은 늘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소비자는 가격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물건만을 산다는 것이다." 니콜라스 하이에크, 스와치 그룹 회장.

기술 집약적 산업의 핵심은 대량 생산과 판매에 있다. 기나긴 세월에 걸친 엄청난 개발 비용을 비용을 뽑아내려면 그만큼 많이 만들어서 많이 파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시계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정확하고 단정한 시계를 만든다는 건 왠만한 노하우를 갖추지 않으면 결코 흉내내기 어려웠다. 지름 3센티미터도 안되는 이 조그만 시계에는 수백년의 노하우가 담겨있다. 어떻게 비슷하게 흉내를 낸다고 해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어딘가 조잡하고 어설프기 마련이었다. 시계 산업의 진입 장벽은 까마득히 높아보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그때 시계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아무나 찰 수 없었던만큼 가격은 굉장히 비쌌다. 스위스는 그때 세계 시계 산업의 3분의 1 이상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시계는 스위스 시계가 최고라는 불변의 명성도 그때 만들어졌다.

그러나 스위스 시계의 명성은 1970년대 후반 심각한 도전에 맞닥뜨린다. 돈에 밝은 일본 사람들은 스위스 시계를 뜯어놓고 수백년의 노하우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이내 비슷한 시계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스위스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 만든 시계를 싸구려에다 조잡한 시계라고 얕잡아봤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열광했다. 눈치챌 수 없을만큼 비슷하면서도 가격은 터무니 없이 싸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자들이나 차던 시계를 이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찰 수 있게 됐다. 시계 산업은 그야말로 대량 생산 시대로 접어들었고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스위스 시계 산업은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가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고가 제품에 목을 맸던 것과 달리 일본과 홍콩의 시계 제조업자들은 일찌감치 대량 생산과 판매에서 해답을 찾았다. 스위스 시계가 세계 최고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시계를 사치품이라기 보다는 일상용품으로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10배 가까이 비싼 돈을 주고 스위스 시계를 사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시계 산업의 진입 장벽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스위스는 1974년만해도 한해 9100만개의 시계를 만들어 팔았는데 10년 뒤인 1983년에는 4300만개 밖에 팔지 못했다. 절반 가까이 판매량이 줄어든 셈이다. 세계 시계 시장에서 스위스 시계가 차지하는 비중도 43%에서 15%로 뚝 떨어졌다. 스위스 시계의 자부심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결국 일본과 홍콩에 자리를 내주고 스위스는 3위로 주저 앉았다. 게다가 대만과 중국, 한국까지 막강한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한창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시계, 이른바 전자 시계의 인기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몇년만에 스위스의 시계 산업 종사자는 9만명에서 4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오랜 명성과 자부심이 무색하게 스위스의 시계 산업은 사양산업으로 전락할 운명이었다.

“좋은 시계 말고 잘 팔리는 시계를 만들어라”

스위스 시계 산업의 회생 방안을 의뢰받은 컨설팅 회사, 하이에크 엔지니어링은 살아남으려면 시장에 귀를 기울이라고 주문했다. 이제 좋은 시계를 만드는 것과 돈을 잘 버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잘 팔릴 수 있는 시계를 만들고 실제로 잘 팔아야 한다.

하이에크의 충고를 받아들인 스와치 그룹은 5년의 준비 끝에 1982년 지금까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계를 내놓는다. 놀랄만큼 정확한데다 완벽한 방수와 방충 기능을 갖추고 가격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싼 단돈 40달러. 게다가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스위스 시계가 아닌가. 일본과 홍콩 시계가 75달러 가까이 하던 때, 스와치 그룹의 모험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단순히 가격을 낮추는 것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대대적인 공정 개선가 원가 절감의 노력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이른바 하이에크 리포트가 내놓은 피라미드 전략은 다양한 상표를 명확하게 차별화하고 저가와 중가, 고가로 나누어 경제적 환경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고객으로 끌어안는데서 출발한다. 정작 제대로 된 돈벌이는 하나에 100만달러를 넘어가는 플랑방 같은 고가 상표 시계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50달러 미만의 저가 시계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계산을 한 셈이다. 하이에크는 세계 시계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저가 시계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스위스 시계 산업의 미래는 없다고 거듭 경고했다.

스와치 그룹은 지주회사 스와치 그룹 아래 블랑팡과 오메가, 라도, 론진, 티소, 발망, 캘빈클라인, 스와치 등 익숙한 이름의 시계 상표에 따라 14개의 회사로 나뉜다. 각각의 상표들은 철저하게 다른 분위기로 차별화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각각 경쟁력을 갖추고 외부와 경쟁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탄탄하게 결속을 다진다.

“시장의 저변을 다져라”

저가 상표 시계를 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고가 상표 시계의 잠재 고객이 될 수 있다. 설령 잠재 고객이 되지 않더라도 그들이 품은 스와치 그룹의 고가 시계에 대한 막연한 선망, 그것만으로도 고가 시계의 가치는 한참 올라간다. 저가 시계는 또 나름대로 고가 시계의 명성을 덤으로 얻고 시장의 믿음을 쌓아 나갈 수 있다. 피라미드는 그렇게 가치를 확대 재생산시킨다.

한때나마 일본과 홍콩이 스위스를 넘볼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의 시계 산업에서 이같은 피라미드의 밑바닥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스위스는 오랜 자만감에 들떠서 시장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게을렀다. 스와치 그룹은 뒤늦게 나마 파격적인 가격의 저가 시계로 물량 공세를 펼치면서 피라미드의 밑바닥을 탄탄히 다졌고 빼앗긴 시장과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100만달러를 넘나드는 초고가 제품을 만드는 블랑팡이나 오메가의 직원들은 늘 고급 정장을 차려 입고 사회 저명인사들을 주로 만난다. 직원들의 연령도 높다. 그러나 100달러 이하의 저가 패션시계를 만드는 스와치의 경우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직원들이 캐쥬얼 복장으로 일한다. 상표에 따라 전략이 모두 제각각인 셈이다.

스와치 그룹은 자금 흐름을 관리할 뿐 14개 계열사의 경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생산 및 판매 전략은 개별 계열사가 알아서 한다. 블랑팡이나 오메가는 우수 모델이 한번 나오면 2~3년 동안 모델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스와치는 빠르면 3개월 만에, 보통 반년에 한번씩 모델을 교체한다. 매년 봄,가을에는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을 가진 신제품 100개씩 쏟아져 나오고 다양하고 기발한 아이디어의 제품들이 선보인다. 장미 향기가 나는 시계, 멜빵에 부착하는 시계, 거꾸로 가는 시계, 등등.

해마다 200개가 넘는 신제품 모델을 쏟아내는 덕분에 스와치 그룹의 시계는 자연스럽게 희소성을 갖는다. 대략 3만5천개의 시계를 찍어내고 나면 스와치 그룹은 주물을 폐기 처분한다. 대량 생산과 판매의 시대에 그런 희소성을 부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전향적 발상 덕분에 스와치 그룹은 다양한 취향의 수많은 고객들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게 됐다.

스와치 그룹의 컨설팅을 맡아 스위스 시계 산업에 대안을 제시했던 하이에크는 1986년 직접 자본을 끌어들여 지분을 인수하고 스와치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다.

“시계를 팔지 말고 이미지를 팔아라”

스와치 그룹의 성공 비결은 단순한 판매전략에 그치지 않는다. 스와치 그룹은 시계를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 장치를 넘어 패션과 자기표현의 한 방법으로 바꿔놓았다. 한발 더 나아가 고객들은 스와치 그룹의 시계를 사회적 지위나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하이에크 회장이 일찌감치 깨달았듯이 좋은 시계를 만드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스와치 그룹이 만들어 내는 시계는 시계라기 보다는 새롭고 고급스럽다는 이미지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을 보려고 시계를 사는게 아니라 시계를 차기 위해 시계를 산다. 우리는 시계를 산다기 보다는 스와치라는 상표(브랜드)를 산다. 스와치 그룹은 이런 소비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해마다 수백가지 새로운 모델의 시계가 쏟아져 나오지만 목록 기호 대신에 독특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그런 이미지 전략 가운데 하나다. 이를 테면 시계마다 ‘너무 늦지 마(Don’t be too late)’라거나 ‘시간 기술(Chrono-Tech)’, ‘검은 마법(Black Magic)’ 같은 이름을 갖는다.

스와치 그룹은 결국 차별화에 성공했고 대량 생산과 판매 시대에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새로운 진입장벽을 만들어 냈다. 쇠락 위기에 놓인 스위스의 시계 산업을 중흥시킨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스위스의 50개 공장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 440개에 이르는 생산, 판매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시계 그룹이 됐다. 스와치 그룹의 역사는 현대 시계의 역사라고 해도 될만큼 파란만장하다.

스위스의 시계 산업은 이제 세계 시계 시장의 51%를 차지할만큼 예전의 명성을 회복했다. 스와치 그룹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1~25%에 이른다. 2000년 기준으로 세계를 통틀어 판매된 스와치 시계는 2억5천만개를 넘어선다.

“스와치는 도전이고 변혁이고 즐거움이다. (Swatch is provocation, innovation, and fun – forever.)” 니콜라스 하이에크, 스와치 그룹 회장.

1. 복습.

촛불에 손을 가져다 대면 뜨겁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그러나 이 뜨거운 촛불이 현실이 아니라면, 다만 뜨겁다는 느낌을 주는 신호, 두뇌의 자극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이상 뜨거움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촛불은 실재하지 않고 손은 실제로 타지 않으니까. 현실의 당신은 머리와 척추에 전기줄과 빨대를 꽂은채 커다란 유리병에 담겨져 잠들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의식은 시스템이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을 피곤하게 배회한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이상 당신은 이 현실과 가상의 현실을 구별할 수 없다.

"왜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을까."

현실은 왜 이렇게 비현실적일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면, 상쾌한 아침과 맑은 바람과 투명한 햇볕과 향긋한 크림스프와 달콤한 키스와 슬픔과 분노와 그리움과 절망이 모두 가상의 현실이라면.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비가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꼬마아이 : 숟가락을 휘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 대신 진실을 깨달아야 해요.
네오 : 진실이 뭐니?
꼬마아이 : 숟가락은 없어요. 휘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죠. 숟가락에 집중을 하세요. 당신의 마음을 휘면, 숟가락도 휘어져요.

잡혀온 사람들은 커다란 유리병에 담겨 머리와 척추에 전기줄과 빨대를 꽂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의식은 로봇이 만든 가상 현실 시스템, 매트릭스를 흘러다니고 몸은 유리병에 무기력하게 누워 로봇들이 쓸 에너지를 마음껏 빨리운다. 그런데도 가상의 현실은 오히려 아늑하기만 하다.

"이 스테이크는 존재하지 않아. 내가 이것을 내 입에 넣을 때, 매트릭스는 나의 머리에 신호를 보내. '맛이 있다'고."

2. '리로디드'의 가정.

숟가락이 없다는 걸 알면 숟가락을 휠 수 있다. 그러나 숟가락은 없지만 매트릭스는 분명히 있다. 숟가락을 부정할 수는 있지만 매트릭스를 부정할 수는 없다. 2편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서는 매트릭스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네오가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매트릭스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현실일뿐이다. 결국 진짜 싸움은 매트릭스 바깥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2편의 끝부분에서 네오는 시온을 공격하는 센티넬을 손으로 멈춰세운다. 그때부터 관객들은 혼란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네오의 초능력이 매트릭스 바깥에서도 먹히는 것일까.

(영화를 아직 안봤는데 앞으로 보실 생각이라면 여기까지만 읽으세요.)

나는 2편을 보고 난 다음 몇가지 가정을 세웠다.

뒤통수에 전극을 꽂고 누워 매트릭스에 연결돼 있을 때 우리는 매트릭스가 만들어 내는 디지털 신호를 사고하고 이해하고 기억한다. 디지털 신호를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소프트웨어를 플로피 디스크에 복사하는 것과 정확히 같다.

매트릭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네오는 시스템의 입장에서 보면 시스템의 균형을 위협하는 이를 테면 악성 바이러스다. 매트릭스 안에서 네오가 숟가락을 휠 수 있었던 건 숟가락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오의 능력은 매트릭스의 신호를 의식적으로 왜곡하고 시스템의 균형을 넘어서는 명령을 직접 만들어 내는데 있다. 네오가 매트릭스의 소스에 들어가 의인화한 시스템의 설계자를 만났다는 건, 시스템의 소스 코드가 네오의 두뇌에 그대로 복사됐다는 걸 의미한다.

네오가 매트릭스 바깥에서 센티넬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시스템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 또는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이 커다란 시스템이 결국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데 있다. 가상의 현실, 매트릭스를 움직이는 시스템과 매트릭스의 바깥에서 센티넬과 기계 도시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정확히 같다. 매트릭스의 안과 바깥은 모두 하나의 시스템에 묶여 돌아간다.

3. '레볼루션'의 사전 지식.

매트릭스는 수많은 프로그램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프로그램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하게 시스템의 통제를 따른다.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프로그램은 네오와 스미스가 유일하다. 스미스는 처음에 네오와 같은 악성 바이러스를 잡도록 만든 이른바 백신 프로그램이었다. 그때는 스미스도 시스템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1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네오는 스미스를 해킹하고 스미스의 프로그램에 자신의 일부를 덮어쓰기 한다. 물론 거꾸로 스미스가 네오의 프로그램을 복사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핵심은 바이러스를 잡으려던 백신 프로그램이 결국 바이러스가 됐다는데 있다.

스미스는 네오처럼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는 방법을 알게됐고 이를 기꺼이 즐긴다. 오히려 네오와 달리 순수한 프로그램인 스미스의 능력이 네오를 넘어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스미스가 네오에게 애증을 갖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스미스는 심지어 사람의 몸을 빌려 매트릭스 바깥으로 뛰쳐나오기도 한다. 네오가 매트릭스안에서 시스템의 소스 코드를 복사 또는 기억해 나온 것처럼 스미스는 베인의 두뇌에 자신을 덮어쓰기 한다.

사람의 몸을 갖게 된 스미스는 세상이 얼마나 낯설었을까. 매트릭스는 완벽하긴 하지만 매트릭스의 신호와 실제 몸이 느끼는 오감은 꽤나 다를테니까.

4. 매트릭스 3 : 레볼루션.

겉멋과 의미없는 복선을 모두 거둬내고 나면 줄거리는 간단하다. 시온은 결국 센티널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질 위기에 놓인다. 네오는 트리니티와 함께 시스템의 중심부로 간다. 컴퓨터로 치면 중앙처리장치, CPU다. 그곳에서 네오는 시온의 운명을 놓고 시스템과 담판을 벌인다.

네오는 베인과 싸우다 눈이 멀지만 눈을 감고도 시스템의 구조와 센티넬의 움직임을 모두 느낄 수 있거나 이미 알고 있다. 시스템의 소스 코드가 네오의 두뇌에 모두 복사돼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시스템이 한 사람의 두뇌에 담길 수 있다는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시스템의 고민은 이제 네오가 아니라 스미스다. 그래서 네오와 시스템은 서로 협상의 여지가 있다. 스미스는 이미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 매트릭스의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스미스를 없앨 수 있는 것은 결국 결자해지, 쉽지는 않겠지만 네오 뿐이다. 네오는 스미스를 없애주는 것을 조건으로 시온에 대한 센티넬의 무자비한 공격을 멈춰줄 것을 제안한다. 시스템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시온은 나중에라도 다시 공격할 수 있지만 매트릭스는 한번 무너지면 끝이니까. 시스템은 그래서 네오와 타협한다.

맑은 꿈이라는 게 있다. 꿈이라는 걸 알고 꾸는 꿈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 네오처럼 총알을 피할 수도 있고 하늘을 날 수도 있다. 네오와 스미스의 싸움도 맑은 꿈처럼 결국 상상력의 싸움이다. 상상력의 싸움은 극한으로 치닫기만 할뿐 좀처럼 끝을 보기 어렵다.

숟가락이 없다는 걸 알면 숟가락을 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휘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마음일뿐이다. 마찬가지로 네오나 스미스나 서로의 존재하지 않는 육체를 죽일 수는 없다. 죽는 것은 마음일뿐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죽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스미스를 없애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매트릭스에 들어가 스미스를 만난 네오는 덫을 놓고 유인한다. 네오는 시스템과 스미스를 연결하는 플러그다. 한바탕 난리법석 끝에 스미스가 습관처럼 네오에게 자신을 복제할 때 스미스는 네오를 통해 시스템에 접속되고 동시에 시스템의 통제에 묶이게 된다. 시스템은 재빨리 이 골치덩어리 바이러스를 삭제한다.

시온과 시스템은 결국 공존하기로 한다. 어차피 당분간이겠지만 말이다.

5. 궁금증과 아쉬움.

3편이 아쉬운 건 기대가 컸던 탓이다.

결국 2편이 낳았던 무수한 추측과 가정은 그리 명쾌하게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대부분 무의미하게 돼 버렸다. 물론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3편은 그냥 생각없이 보기만 해도 재미있다. 돌아보면 2편은 너무 과장되고 터무니없이 겉멋을 부렸다. 차라리 1편에서 끝내지 그랬느냐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끝까지 풀리지 않는 궁금증과 아쉬움은 어떻게 네오가 센티넬을 제어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물론 네오는 눈을 감고도 시스템을 모두 느낄 수 있거나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느끼거나 알고 있는 것과 제어하는 것은 또 다르다. 워쇼스키 형제는 설명을 제대로하지 않았거나 상상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2편을 본 관객들에게 터무니 없는 상상과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그만큼 3편에서 실망을 안겨줬다. 왜 이렇게 어설픈 실수를 했을까. 의미없는 복선을 마냥 늘어놓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다니.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이야기로 마무리하자. 한겨레신문에서 발췌한다.

"1편을 본 다음에는 온갖 책을 들고 왔다. 라캉, 리오타르, 데리다…. 2편을 보았다. 히치콕의 '현기증'을 자기의 원본으로 삼고, 저패니메이션을 뒤섞은 다음 컴퓨터 해킹 프로그램으로 다시 번역한 이 영화는 많이 따분해졌다. 그리고 3편을 보러갔다. 아무 생각없이 보러가면 된다. 시작이 있는 곳에 끝이 있다. 어쩌면 이 카피는 스스로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같다. 주체의 소멸이 지나쳐 테마의 소멸에 이른 것은 (워쇼스키의 말을 빌려) 이런 이야기의 필연이다. 그러니 따져 묻지 마라. 당신은 게임오버한 다음에도 그걸 사유하는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 제작한 영화다. 영어 제목은 'If you were me', '네가 나라면'이다. 여섯명의 감독이 풀어낸 여섯개의 문제 의식. 우울하지만 많은 걸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다수에 속해 있을 때 우리는 소수가 얼마나 고통받고 얼마나 소외받는가 알지 못한다. 다수는 소수를 억압하면서 소속을 확인하고 만족을 얻는다.

1. 그녀의 무게.

여직원을 뽑는 면접. 면접관은 모두 느끼한 표정의 아저씨들이고 상고 졸업반인 여학생들은 물건처럼 그들 앞에 진열된다. 커피 심부름 하는데 고등학교 성적은 필요가 없다. 성격도 따질 이유가 없다. 얼굴과 키와 몸무게가 유일한 변별 기준이 된다. 외모의 차별은 어디에나 만연돼 있지만 스무살에 사회 첫발을 내디딜 이들에게 그런 현실은 가혹하고 냉혹하다.

현실이 이렇다면 학교 선생님이 이들에게 살을 빼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살을 빼서 취업을 해라. 그래서 커피 심부름이든 뭐든 하고 돈을 벌어라. 다른 대안은 없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는 흔히 웃음거리일뿐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겪는 서러움을 한번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낄길거리고 웃는 뒷자리의 여자애들이 나는 몹시 신경쓰였다.

임순례 : "외모의 기준을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으면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자기 확신이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다."

2. 그 남자의 사정.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야 알았다. 주민1, 주민2, 주민3, 주민4, 주민5, 주민6, 주민7, 그리고 A씨. 모두가 익명의 그늘에 숨어 있는데 A씨만 실명으로 드러나 있다. A씨가 지나갈 때 엄마들은 아이에게 말한다. "저 아저씨 옆에 가면 안돼, 알았지?"

A씨는 청소년 성 매매 범죄를 저지르고 벌금형과 함께 신상이 공개됐다. A씨의 'A'는 아마도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따왔을 것이다. '주홍글씨'의 헤스터 프린은 남편이 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간통(adultery)을 뜻하는 'A'자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라는 형벌을 받는다.

청소년의 성을 돈으로 사는 범죄는 경제적 능력을 가진 남성이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린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파렴치한 범죄다. 다른 범죄, 이를테면 매춘과 달리 청소년 성 매매 범죄는 상대의 경제적 무능력을 악용하는, 사실상 강간이나 마찬가지다. 가중 처벌해야 한다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신상공개가 과연 최선인가 하는 문제는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가중 처벌이 필요하다면 벌금이나 수형 기간을 두배, 세배, 그래도 부족하다면 10배로 늘리면 되지 않을까. 신상공개는 19세기 이래 사라진 수치형의 일종이다. 이를 테면 현대판 '주홍글씨'인 셈이다.

신상공개는 사회의 심리적 만족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죄를 벌하되 사람을 벌하면 안된다는 법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신상공개는 범죄를 예방하고 억제하는 아무런 효과도 없으면서 다만 A씨에게 창피를 주고 사회인으로서의 A씨의 지위와 역할을 송두리째 박탈하는데 그치고 있을 수도 있다.

정재은 : "무시돼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인권까지 보호하는 사회야 말로 진정 발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3. 대륙횡단.

좁은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애인 승강기는 무척 시끄럽고 느리다. 사람들은 길을 가로 막고 선 승강기를 비켜 지나가면서 동정의 눈빛을 보낸다. 승강기 위에 올려진 그는 그 눈빛을 묵묵히 모두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계단을 모두 오르기까지의 시간은 그래서 까마득하게 길다.

온몸이 뒤틀린 뇌성마비 장애인 김문주씨는 어느날 광화문 네거리를 횡단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카메라는 높이 떠서 비틀비틀 거리로 나서는 김씨를 잡는다. 승용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멈춰섰다가는 신경질적으로 비켜 지나가고 그렇게 대륙의 절반을 조금 지나칠 무렵 경찰들이 달려와 김씨를 붙잡는다. 김씨는 바닥에 드러눕고 울부짖는다. 김씨의 대륙횡단은 그렇게 좌절됐다.

여균동 :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다른 사람이 내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연습을 하기 바란다."

4. 신비한 영어나라.

아이의 혀 밑바닥을 잘라내는 수술을 시키는 엄마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영어 발음을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설마 하고 넘겼는데, 이 영화는 그 끔찍한 수술 장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감독은 눈을 똑바로 뜨고 보라고 말한다. 아이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댄다. 어느순간 소리도 사라진다. 숨이 멎을 것처럼 끔찍하다.

이 영화가 짚어내고 있는 것은 영어 공부에 대한 집착이라기 보다는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부모의 기대와 욕심이다. 아무리 아이의 미래를 위한 옳은 선택이라고 한들 너무 잔인하다. 아무리 부모라고 한들 이럴 권리는 없다.

박진표 :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눈뜨고 못볼짓을 자행한다. 눈을 크게 뜨고 영화를 끝까지 봐주길 바란다. 가장 큰 인권침해는 자식의 인생을 먼저 결정해 버리는 오만함이다."

5. 얼굴 값.

주차장 매표소에 예쁜 언니가 앉아 있다. '이런데 있을 애가 아닌데.'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얼굴은 반반한데 왜 이런데서 일하느냐." 예쁜 언니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쁜 언니는 자꾸 틱틱거린다. 손님은 급기야 화를 낸다. "야, 얼굴값 하는 거냐. 손님한테 그게 무슨 태도냐."

예쁜 언니는 괜한 편견 때문에 피곤하다. 마지막 반전을 기대하시라.

박광수 : "주차장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주인공처럼 우리도 편견과 편견 속에 쳇바퀴를 도는 건 아닐까."

6.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뭐가 좋다고 도대체 뭘 얼마나 벌겠다고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 한국까지 왔을까. 네팔 사람 찬드라는 어느날 공장 기숙사를 빠져나와 라면을 먹으러 갔다가 지갑과 함께 길을 잃는다. 네팔 사람은 한국 사람을 많이 닮는다. 찬드라는 정말 시골에서 올라온 아줌마처럼 생겼다. 경찰은 한국말을 떠듬떠듬하는 찬드라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한다. 찬드라는 정신병원에 넘겨져 그곳에서 6년4개월을 갇혀지낸다. 아무도 찬드라가 외국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무관심은 그렇게 무섭다.

이건 실화다. 그리고 찬드라는 실존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찬드라처럼 사회에서 버림받고 격리되어 어딘가에 수용된다. 사회는 그들이 밖으로 나오는 걸 좀처럼 용인하지 않는다.

박찬욱 : "이건 특정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능, 그리고 그로 인한 슬픔을 그리고 싶었다."

'황산벌'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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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계백은 살아남아서 적에게 치욕을 보느니 지금 죽는게 낫다며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나선다. 영화 끝 무렵, 계백이 김유신의 칼에 목이 잘려죽는 순간, 영화는 계백의 부인이 죽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을 하든가 말든가, 나라가 쳐 망게불든가 말든가, 그것이 뭣인디 니가 내 새끼들을 죽여분다 살려분다 그래야!"

쨍하고 가슴에 아픔이 느껴진다.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울컥, 눈물을 흘렸다.

"호랭이는 죽어서 가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혔다. 제발 깨끗하게 가잔께."

"뭣이 어쩌고 어쩌? 아가리는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제. 호랭이는 가죽 땜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지는 거여, 이 인간아."

계백은 황산벌에서 5천명의 병사들과 함께 김유신이 몰고온 5만명의 병사들에 맞서 싸운다. 당과 신라의 욕심이 맞물려 오월동주, 일단 가장 힘없는 나라부터 무너뜨리기로 하고 시작한 전쟁. 한 나라의 역사가 여기서 끊길 판이다. 억울하고 서러운 전쟁이다. 굳이 이름 때문에 죽지 않더라도 기꺼이 목숨을 다해 싸울 명분은 충분하다.

성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성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머릿수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얕은 잔꾀로 마냥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천 수만의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명예로운 승리 또는 명예로운 죽음에 대한 확신이다. 그 확신이 사라질 때,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한낱 개죽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 성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황산벌'은 꽤나 균형잡힌 시선으로 백제와 신라를 바라본다. 관객들은 계백도 김유신도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 백제는 결국 그렇게 500년 역사를 마무리하고 신라는 당과 손잡고 삼국통일에 성공한다. 희화화하기는 했지만 '황산벌'의 역사관은 놀랄만큼 날카롭고 정직하다.

'지와 사랑'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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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다란 나무 침대에 나르치스가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에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갠 채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모습은 마치 송장과도 같았다. 그는 눈을 뜬 채 아무 말도 없이 골드문트를 쳐다보았다. 비난도 하지 않고 명상에 잠겨 어떤 다른 시대와 세계 안에 들어가있는 것처럼 친구를 알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나르치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절실한 일인가?" 나르치스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15분쯤 시간이 있어. 밤 기도가 시작될 시간이거든."

그는 수척한 몸을 일으켜 아무것도 깔지 않은 나무 침대 위에 앉았다. 골드문트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며칠 밤을 새워 야위고 지친 얼굴, 방심하고 있는 듯한 시선, 나르치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약초 채집을 나갔다가 집시 여인 리제를 만난 골드문트는 수도원으로 돌아와 나르치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골드문트는 지금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수도원을 떠나려고 한다. 그래서 철야 기도를 앞두고 짧은 휴식 시간 동안 고요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나르치스를 흔들어 깨운다.

"제겐 목표가 없다고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나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에게 가기는 합니다만 아닙니다.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무언가가 나를 부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나르치스는 오랜 명상과 단식, 철야 기도에 쓰러질듯 지친 모습이다. 신앙과 진리 탐구에 젊음과 열정과 사랑과 미래, 모든 기대를 쏟아붓고 날마다 시들어 가는 친구에게 골드문트는 여자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겠다고 말한다. 나르치스를 닮고 싶었던 골드문트는 결국 나르치스가 여러차례 설명했던 것처럼 자신과 나르치스가 얼마나 다른가 깨닫는다. 골드문트는 그렇게 수도원을 떠나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한다.

헤르만 헷세의 소설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었다. '지와 사랑', 원제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다. 이 책은 다섯번 정도 읽고 학교 숙제 등으로 세번 정도 독후감을 썼다. 새삼스럽게 다시 이 책을 들추는 것은 문득 내가 그리워하고 동경했으나 결국 버리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지나간 기억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골드문트는 평생 나르치스를 그리워하고 나르치스의 삶을 동경한다. 나르치스와 자신이 다르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렇다. 나르치스는 지금도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예배실에서 투명하고 창백하게 여위어 가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명상하고. 아마도 이제는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높은 정신 세계에 성큼 다가가 있으리라.

그때 나르치스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나를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나르치스와 다른 삶을 살게 됐다.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너와 같은 종류의 사람, 강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 영감을 받은 사람, 몽상가, 시인, 연애하는 사람, 그와 같은 사람은 우리들 다른 인간, 즉 정신적 인간보다는 대개 우월해. 너희들의 본성은 모성적이지. 너희들은 충실한 것 속에서 생활하며, 너희들에게는 사랑과 힘과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제공되어 있어. 우리들 정신적인 인간은 가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충실한 것 속에 살고 있지 않고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어. 충실한 생활, 과실의 즙, 사랑의 뜰, 예술의 아름다운 나라는 너희들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은 대지이지만 우리들의 고향은 관념이야. 너희들의 위험은 감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위험은 진공의 공간에서 질식하는 것이야. 너는 예술가지만 나는 사색가일 뿐이야. 그리고 네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을 때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어. 나에게는 해가 비치고 있으나 네게는 달과 별이 비치고 있고 너의 꿈속에는 소녀가 나타나지만 나의 꿈속에는 소년이 나타난다."

시인통신을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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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통신이 마침내 허물렸다. 딱히 자주 가는 집은 아니지만 양영권 기자랑 종로에 나갈 때면 꼭 시인통신에 들르곤 했다. 종로 1가 뒷골목, 칙칙한 1980년대의 분위기, 우리는 켜켜히 내려앉은 지나간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묵묵히 술을 들이켰다. 그 시인통신이 최근 재개발 바람에 밀려 결국 허물려 사라졌다.

다음에 들어가 찾아보니 '시인통신과 간큰 사람들'이란 카페도 있다. 그런데 회원도 거의 없고 게시물도 없다. 시인통신의 주인이 써놓은 듯한 문패만 덩그라니 걸려 있을 뿐이다. 어디로 옮겨갔을까, 시인통신은.

시인통신은 1980년 교보문고 뒷골목 2평짜리로 시작되었다. 그곳은 주인이 없어도 스스로 커피를 마시고 돈을 놓고 가버릴 정도의 서로의 허물이 없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상황에 따라서 드나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면서 많은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0년 계엄의 서슬한 칼날에 광화문으로 사람들은 몰려들고 그 작은 가게에는 30명 아니 40명씩 끼어앉아 이 나라의 울분과 최루탄에 찌든 사람들에 이야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학생, 기자, 시인, 소설가, 화가, 예술인, 노동운동가. 그 틈에 끼어앉아 있는 수상한 눈초리들. 그러나 그들은 그 작은 공간에서 비비면서 서로를 아꼈다.

돈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계산을 더 많이 했고 없는 사람들은 그냥 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불평과 대꾸조차 없었다. 화장실도 없는 그곳의 철대문 옆은 밤마다 생기는 낙서 투성이였다. 그때 그곳을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철대문으로 통했다.

지금은 모두들 50이 넘고 돌아가신 분들도 너무 많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이곳을 다니는 새로운 3040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금은 철대문집에서 쫓겨나 종로1가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곳은 인테리어를 하지 못한다. 왜냐면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냥 벽에 한지로 부치고 수리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그곳의 낙서들은 20년 전부터 있던 그들의 글이 있기에.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면 낯설다. 그러나 그곳의 역사를 안다면 자신을 그곳의 흐름에 맡기면 우리의 사라지는 정을 느낄것이다. 지금은 1, 2층으로 나누어져 있고 화장실도 있다. 화장실이 생기자 시인통신을 찾던 모든사람들은 너무나 좋아했다. 어린아이처럼.

주말에 사람이 없는것이 시인통신의 특색이다. 평일에 가야 낯익은 많은 사람들을 볼수 있다. 9시가 넘어서 가면 좋다. 이제 모든 분들에게 시인통신의 지나온 이야기들을 하려 한다. 시대를 지나오는 길에 시인통신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카페 '시인통신과 간큰 사람들'에서.

재미있는 책이다. 나는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의 한자와 그 문화적 차이에 관심이 있다. 다만 일본 사람이 쓴 책이라 우리나라 사람들과 이해하는 맥락이 좀 다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내가 이해하는 맥락으로 '일본 정신의 기원'을 다시 써보기로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나라와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중국 사람은 '사람'을 '人'이라고 쓰고 '렌'이라고 읽는다. 우리는 '人'을 '인'이라고 읽는다. 그러나 사실 '인'은 '렌'의 잘못된 발음이다. 우리는 '인'이라고 말하면 '인'이 '人'인가, '因'인가, '印'인가, '忍'인가 도무지 알 수 없다. 다만 앞뒤 문맥을 따져서 '사람'을 뜻하는 '인'이겠거니 할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 사람이 '人'을 '인(렌)'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인'은 중국 사람에게 사람을 뜻하는 '人'의 발음 기호일뿐이다.

중국 사람에게 '인(렌)'은 사람을 뜻하지만 우리에게 '인'은 '人'으로 바뀌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의 뜻을 갖게 된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버려두고 '인'이라는 중국의 말을 가져다 썼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일본은 '人'을 두가지로 읽는다. 음을 따라 '징(じん)'이나 '닝(にん)'이라고 읽기도 하고 뜻을 따라 '히토(ひと)'라고 읽기도 한다. 한번 풀어서 설명하면 일본 사람은 '人'이라고 써놓고 '사람'이라고 읽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테면, '문화인'은 '文化人'이라고 쓰고 '분카징'으로 읽고 '어른이 되다'는 '人となる'라고 쓰고 '히토토나루'라고 읽는다.

우리는 '人'은 '인'이라고 읽을뿐 '人'을 바로 '사람'이라고 읽지 않는다. '사람'의 뜻을 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읽을 때는 '인'이라고 읽는다. 그게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이다. 일본은 한자를 들여오면서 '사람'을 '人'으로 쓰기로 했지만 우리는 '사람'을 버려두고 '人'을 '인'으로 읽기로 하고 '사람' 대신 '인'을 쓰기로 했다.

몇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일본은 '山'을 음을 따라 '상(さん)'이라고 읽기도 하고 뜻을 따라 '야마(やま)'라고 읽기도 한다. '山'이라고 써놓고 '야마'라고 읽는 것은 우리가 '山'을 '뫼'라고 읽는 것과 같다. '산'은 중국의 '샨'라는 발음을 흉내낸 것일 뿐 스스로 아무런 뜻도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뫼'를 몰아내고 스스로 의미를 갖게 됐다.

일본은 '月'을 음을 따라 '카츠(がつ)'나 '케츠(げつ)'라고 읽기도 하고 뜻을 따라 '츠키(つき)'라고 읽기도 한다. 일본은 한자를 들여오면서 '달'을 '月'로 쓰기로 했지만 우리는 '달'을 버려두고 '月'을 '월'로 읽기로 하고 '달' 대신 '월'을 쓰기로 했다. '월'은 중국의 '유어'라는 발음을 흉내낸 것일 뿐, 스스로 아무런 뜻도 없다.

일본어에서 음을 따라 읽는 음독은 보통 다른 말과 결합되는 합성어를 읽을 때 쓰고 뜻을 따라 읽는 훈독은 독립된 단어를 읽을 때 쓴다.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히기 때문에 일본 사람도 한자를 읽는데 흔히 혼동을 겪는다. 명함에 쓰여진 한자를 어떻게 읽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니다.

한자는 중국 사람에게 표의문자면서 동시에 표음문자다. 한자는 우리에게는 표의문자고 일본 사람에게는 표음문자다. 우리는 '사람'의 뜻을 담아내려고 '人'이라고 쓰고 일본 사람은 '히토'를 글로 적으려고 '人'이라고 쓴다.

우리나라에서 한자는 여전히 낯설다. '인'은 '사람'과 같은 뜻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인'은 이미 우리말이지만 그 뿌리는 결국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렌'이다. 우리는 '사람 = 인', '달 = 월', '뫼 = 산'이라는 등식으로 한자를 이해한다.

그러나 일본 사람에게 '人'은 그냥 '히토'다. 우리가 '사람'을 글로 표현하려고 '人'을 가져오고 중국 사람을 따라 '인'이라고 읽은 것과 달리 일본 사람은 '히토'를 글로 표현하려고 '人'을 가져오고 그냥 '히토'라고 읽었다. 일본에서는 '징'이 '히토'를 몰아내지 않았다. 중국에서 들어온 개념은 '징'으로 쓰고 일본 고유의 개념은 '히토'라고 쓰면 되니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신들의 황혼'에서 이를 두고 "한자가 일본을 정복하는 대신 일본에게 정복 당했다"고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정신의 기원'에서 "일본은 외래적인 한자를 내면화했다"고 말한다. 일본은 일본어를 글로 표현하려고 한자를 가져다 썼다. 우리가 한자를 들여와 중국 발음으로 읽으려고 애썼던 것과 다르다. 일본은 한자를 마음대로 읽는 것은 물론이고 한문도 일본어 문법과 어순에 맞도록 마음대로 뜯어고쳤다. 결국 중국 한문을 제대로 읽는 일본 사람은 거의 없게 됐지만 일본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많았다.

우리는 거꾸로 중국 한문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일본보다 많았지만 아예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 한자를 모르면 개념을 알 수 없고, 이를 테면 '人'이라는 한자를 모르면 '인'이 무엇을 뜻하는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읽고 쓰는 것은 물론이고 듣고 말하는데도 한계가 지워졌다. 동시에 우리 고유의 개념은 한자와 한문에 눌려 조금씩 사라졌다.

우리는 번역 없이 한문을 읽었지만 일본은 철저하게 번역을 하고 철저하게 일본화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일본화하는 과정에서도 한자는 철저하게 외부에 머물렀다는데 있다. 이를 테면 똑같이 '히토'라고 읽지만 'ひと'는 일본 고유의 개념, '人'은 중국의 개념, 둘은 명확히 느낌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카타카나도 마찬가지다. '빵'은 카타카나로 'パン'라고 쓰고 '빵'이라고 읽는다. 히라카나로 'ばん'라고 써도 같은 발음이지만 결코 그렇게 쓰지 않는다. 카타카나로 쓰여진 'パン'은 '빵'이 외래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히라카나와 한자, 카타카나, 일본은 세종류의 표기법으로 말과 개념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일본은 그래서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빠르다. 객체는 객체화할 때 비로소 인식된다. 객체를 무리하게 떠안으려 하지 않고 철저하게 객체화하는 일, 일본 정신의 기원은 이 바탕에서 이해해야 한다. 고진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자.

"예컨대 한자나 카타카나로 수용된 것은 결국엔 외래적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받아들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외래적인 관념은 아무래도 한자나 카타카나로 즉 표기에서 구별되는 이상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관념들은 본질적으로 내면화되는 일도 없고 또 저항도 받지 않는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저 옆으로 치워질 뿐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에는 외래적인 것이 모두 보존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말을 '詞(사, ことば)'와 '辭(사, じ)'로 나눈다. '詞'와 '辭'는 개념이 되는 말과 개념이 안되는 말, 한자로 쓸 수 있는 말과 쓸 수 없는 말의 구분이다. 결국 '辭'는 '테(テ)', '니(ニ)', '오(ヲ)', '와(ハ)' 같은 조사들이다. 아무런 내용도 없지만 미묘한 감정과 정서를 담은, 노리나가는 이것이 바로 일본 정신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일본에 유교나 불교 같은 지적이나 도덕적인 차원에서 고유한 것은 없다. 다만 그런 지적이고 도덕적인 원리에 부정되고 은폐되는 작은 감정이 바로 일본 정신이라는 이야기다.

류노스케는 말한다. "우리의 힘은 파괴하는 힘이 아니다. 변조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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