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행동주의와 언론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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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혼자 퍼서 먹었다." 경향신문 트위터의 기사 소개 글을 두고 한바탕 논란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구내식당에서 직접 식판을 들고 밥을 덜어먹는 사진을 소개한 글을 두고 온갖 악플이 쏟아진 것이다. 일부 독자들에게는 '퍼서 먹었다'가 '퍼먹었다'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오마이뉴스가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를 김정숙씨라고 부른 걸 두고도 예의가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영부인을 어떻게 씨라고 부르느냐"는 댓글도 눈에 띈다.

한겨레21도 문 대통령 표지 사진 때문에 한바탕 곤혹을 치렀다. 대선 기간에 한 번도 문재인 후보를 단독으로 실은 적이 없는 데다 정작 당선 이후에 실린 사진이 밝은 표정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길윤형 한겨레21 편집장이 "결의와 고뇌가 느껴지는 것 같아 표지로 골랐다"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안수찬 한겨레 미래라이프에디터가 페이스북에 "덤벼라 문빠들"이란 글을 써서 논란에 불을 지른 듯한 모양새다.

대선 때는 "한경오는 가난한 조중동, 몽둥이가 답이다"라는 등의 아찔한 문구의 '짤방'이 나돌기도 했다. 한겨레가 문재인 후보 사진을 다른 후보들보다 작은 크기로 실었다며 비난이 속출했는데 알고 보니 총탄이 박힌 전남도청의 하얀 벽면이 잘려 나간 것처럼 착시를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박사모'와 다를 게 뭐냐"는 우려와 함께 "청와대 변기를 '매화틀'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을 정도다.

문재인 팬덤 현상은 3기 민주 정부에 대한 넘치는 기대와 열망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시달렸으면 대통령이 밥 먹고 커피만 마셔도 국민들이 행복해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불과 반년 전 최순실 게이트로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됐던 한국이 민주주의와 진보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1000만 촛불의 힘이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리고 민주 정부를 다시 세웠다. 우리는 만개한 민주주의 축제를 즐길 자격이 충분하다.

엄혹한 선거판에서 애써 객관과 중립을 유지하는 신문들이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답답해 보였을 수도 있다. 어떻게 잡은 정권인데, 언론과 전쟁을 벌이다 뜻을 펴지 못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언론이 해야 할 일은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를 만들고 정권의 호위무사로 나서는 게 아니라 비판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언론의 본령이고 책무다.

노무현의 좌절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이에나 같은 언론으로부터 문재인을 지켜야 한다는 열성적인 지지자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실제로 문 대통령도 앞으로 5년 내내 언론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오죽하면 노 전 대통령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유시민 작가는 '진보 어용 지식인'을 자처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의 언론 지형이 왜곡돼 있고 공정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중동에 맞서' '우리 편이 돼 주는 언론' 따위를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에 기대하는 것은 이 신문들을 죽이는 길이다. 언론이 늘 옳을 수는 없고 언론 역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연히 잘못하면 욕을 먹어야 하고 합당한 비판이라면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론에 요구할 수 있는 건 최선의 진실을 말하라는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가난한 조중동'이라고 비난하면서 '우리들의 조중동'이 되라고 강요하는 건 끔찍한 일 아닌가.

우리는 언론 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부당하게 해직당하고 취재 현장에서 쫓겨난 언론인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 뿐만 아니라 애초에 권력의 외압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지배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아울러 일부 언론에 집중됐던 특혜를 중단하고 권력과 언론의 유착을 뿌리부터 끊어야 한다. 방송과 통신을 쥐락펴락하면서 여론 장악의 첨병으로 활동해 왔던 방송통신위원회 등 조직 개편도 필요하다.

언론 개혁은 우리 편 언론을 키우는 게 아니고 나쁜 언론을 찍어 누르는 것도 아니다. 언론이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이해관계에 영향 받지 않고 권력에 맞서고 언론 역시 열린 태도로 독자들로부터 비판을 감수하는 것, 공론의 장에서 주장과 주장이 부딪히면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과정,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언론 개혁의 출발이라고 믿는다. 좋은 권력이냐 나쁜 권력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이 바로 서야 권력이 바로 서고 사회가 바로 선다.

오늘은 미디어오늘 창간 22주년을 맞는 날이다.

정치·경제 권력 뿐만 아니라 언론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지속가능한 저널리즘 생태계를 위한 고민을 계속 이어나갈 것을 독자 여러분에게 약속드린다. 미디어 소비자(수용자)들의 행동주의는 우려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고무적이다. 독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상 언론의 횡포가 과거처럼 위력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미디어오늘도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고 계속해서 저널리즘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고민하고 싸울 것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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