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기자들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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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사설입니다.)

"권력자에겐 거친 질문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백악관 기자실의 전설로 불렸던 헬런 토머스의 말이다.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된다"고도 했다. 레바논 이민 2세인 토머스는 UPI통신 기자로 60년 이상 백악관을 출입하면서 존 F. 케네디에서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전현직 대통령을 취재했다. 한 백악관 대변인이 맨 앞줄에 앉아 쏟아내는 그의 날카로운 질문을 '고문(torture)'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인터뷰 전문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인터뷰란 싸움이다. 상대를 완전히 발가벗기고 자신도 발가벗은 채 서로가 숨기는 것 없이 인격 전부를 걸고 맞서는 싸움이다." 이런 말도 했다. "독재자에게 질문할 때 '대개 독재자들은 부패하기 마련인데 너는 얼마나 부패했느냐'고 물을 수 있는 기자가 몇이나 될까. 나는 다른 기자들은 용기가 없어 던지지 못하는 질문을 던질 뿐이다."

13일 열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 박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는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취임 3년이 다 돼 가지만 대통령이 기자들과 만나는 자리는 이번이 일곱번째고 기자들 질문을 받은 건 세 번째다. 대통령이 기자들 질문을 받는다는 게 기사거리가 되는 상황도 참담하지만 그나마 두 차례 질의응답도 사전에 질문 내용이 전달되거나 기자들끼리 사전에 질문 내용을 조율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미디어오늘 취재 결과 청와대 기자들은 이번에도 질문 순서를 정하고 질문 내용이 겹치지 않도록 사전에 조율한 것으로 확인됐다. 원활한 진행을 위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어느 기자회견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짜여진 문답은 없다"면서 "질문하면 그 자리에서 답변한다"고 밝혔지만 분명한 것은 기자들이 이번에도 각본을 미리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각본이 청와대에 유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청와대 기자들은 순번을 정해 질문할 기자들을 추린 것으로 확인됐다. 순번이 아닌 기자들은 구경만 할 뿐 질문을 할 수 없고 대통령 답변을 듣고도 추가로 답변을 요구할 수도 없다. 이런 기자회견은 청와대 말고 어느 곳에서도 없다. 진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 귀한 자리에서 진행을 원활하게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국민들을 위해서인가. 대통령을 위해서인가.

청와대 기자들은 질문 순서를 조율하는 건 이번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대통령과 기자들이 날선 공방을 벌이던 모습을 국민들은 기억한다. 노 전 대통령은 150회의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회에 그쳤고 박 대통령은 3년에 가까운 동안 5회, 질의응답은 2회에 그쳤다. 그나마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다. 질문지를 만드는 순간 곧바로 청와대에 넘어간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청와대 기자들이 권력 앞에 굴종했다고 단정 짓는 건 성급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취재하면서 그를 불편하게 만들 질문을 던지는 데 스스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으며 이런 시스템이 기자들의 자기 검열을 불러오고 다른 기자들의 질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궁금한 게 많고 기자들은 그 질문을 대신해야 할 사람들이다. 청와대 기자들의 담합은 직무유기일 뿐만 아니라 국민과 독자들에 대한 배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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