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걷어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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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이 길에 버려져 있으면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보기 싫다고 걷어차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 누군가는 주워야 한다. 깡통 걷어차기라는 제목은 "Stop kicking the can down the road", 보스턴컨설팅그룹의 보고서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깡통 걷어차지 마라, 좀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 책에서 깡통은 위기의 전조다. 걷어차는 걸로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김동은과 조태진은 둘 다 낯선 이름인데 이 책의 문제제기는 참신하다. 이 책을 읽으면 미국의 양적완화는 미친 짓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미국만 망하는 게 아니라 세계 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판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세계적으로 돈을 풀어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게 그럴 듯한 해법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금리를 낮춰서 돈을 풀고 제로 금리가 되면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의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돈을 푼다.

2009년부터 2010년 3월까지 1차 양적완화에서 1조2500억달러, 2010년 11월부터 2011년 6월까지 2차 양적완화에서 6500억달러, 2012년 9월부터 시작된 3차 양적완화에서 달마다 4009억달러 이상이 시중은행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 돈이 실물경제를 살린 게 아니라 대부분 금융시장에서 증발해 버렸다는 데 있다. 실물경제와 금융경제가 따로 놀았고 기대했던 부의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2003년 3월 이래 13년 동안 연방준비은행은 6배 이상 미친 듯이 돈을 찍어냈지만 그 사이 미국 경제는 연 평균 1.7% 성장하는데 그쳤다. 남북전쟁 이래 최악의 수준이다. 같은 기간 실물경제 투자는 연 평균 0.8% 늘어나는 데 그쳤고 자영업자와 무급 근로자를 제외한 실질적인 고용률도 연 평균 0.1% 늘어나는 데 그쳤다. 중산층 실질 소득은 8% 줄어들었고 중산층 일자리도 6% 줄어들었다. 미국 국민 5명 가운데 1명 정부 보조를 받아 생활하고 있다."

돈 풀어 경제 살리기가 바로 깡통 걷어차기라는 이야기다. 이건 정말 상식적인 문제다. 금리가 낮아지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건전한 투자보다는 한탕주의식 투기 행위가 늘어나게 된다. 물가 상승의 고통은 고스란히 일반 국민들 부담이 된다. 금리를 낮추는 것도 돈을 푸는 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출구 전략을 시작하는 순간, 아니 내비치는 순간 세계 경제가 요동을 치고 그나마 버티고 있는 국민들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빠져든다.

김동은과 조태진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경제는 지금까지 "쉽고 달콤한 길"을 걸어왔다. 미국을 비롯해 선진국들의 산업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그 빈 자리를 부채를 통한 과소비와 금융 경제의 비정상적 성장으로 메워온 결과가 지금의 위기라는 주장이다. 미국이 지금 와서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근본적인 체질 개선 보다는 돈을 풀어 소비 심리와 투자 심리를 살려보자는 게 미국이 선택한 생존 해법이었다.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 천국 미국에서 복지 규모가 확대되고 재정지출이 늘고 정부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광경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제프리 삭스는 신자유주의가 왜곡됐다고 지적한다. "경제 질서를 시장에 맡겨 자율적인 운영을 도모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창의성을 극대화하자는 의미가 그 주체가 누가 됐든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모든 일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돼 버렸다"는 이야기다.

제프리 삭스는 이런 말을 했다. "기업의 부는 정치자금과 정부 로비, 정부와 산업의 회전문 인사를 통해 정치적 권력으로 비화한다. 정치적 권력은 다시 법인세 인하, 규제완화, 정경유착을 통해 기업의 더 큰 부로 이어진다. 기업의 부가 권력을 낳고 권력이 기업의 부를 낳는다." 금리인하와 환율개입, 규제완화, 감세, 재정적자 등등 정부가 경제를 살리겠다고 내놓는 정책들 상당수가 정치세력과 경제세력의 유착의 결과라는 지적이다.

경제위기 이전 가계와 기업 등 민간에 몰려 있던 빚이 경제위기 이후 정부 부채로 이전된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정부가 빚의 종착역 역할을 하면서 시스템의 위기로 확산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1800년대 이후 정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90%를 넘었던 26차례 경우를 분석한 결과 경제위기가 최소 23년 이상 지속됐고 GDP 성장률이 평균 1.2% 이상 줄어들었고 빚을 다 갚고 난 뒤에는 GDP 성장률이 당초 기대보다 25% 가량 낮아졌다.

한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업 경쟁력의 약화와 부동산 거품, 급격한 인구 고령화, 만성적 장기적 경기 침체, 가계소득이 줄고 중산층 비중이 줄어들고 재정수입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다. 한국의 깡통 걷어차기는 감세와 규제 완화, 정치세력과 대중이 유착하면서 증세 없는 복지라는 고약한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면서 위험을 키우고 있다.

김동은과 조태진은 이 책에서 "우리에게 빚의 위기는 앞으로 찾아올 수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먼 훗날의 가정이 아니라 반드시 찾아올 것이지만 우리의 노력을 통해 그 시기를 지연시키고 충격을 일부나마 완화할 수 있는 머지않은 필연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과도한 빚의 시대를 지나 배고픈 조정의 시기를 앞두고 있다"는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쉽게도 이 책의 결론은 다소 식상하다. 이들은 "우리의 미래는 균형재정에 달려 있다"면서 "정부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적극적 증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잃지 않는 일"이라는 하나마나한 결론으로 끝난다. 결국 정치의 문제일 텐데 당장 쉽고 달콤한 길을 걷기 바라는 건 국민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깡통 걷어차기 / 김동은·조태진 지음 / 쌤앤파커스 펴냄 /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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