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깨끗한데 무슨 백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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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창사 이래 최초로 반도체 생산 라인 공개... 10분 견학으로 뭘 보라고.

아무도 의혹을 제기하지 않는데 그 의혹을 해명하겠다고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무려 80여명의 기자들이 모였다. 전현직 삼성전자 직원 가운데 백혈병과 림프종 환자가 23명, 그 가운데 9명이 죽었다. 언론은 그동안 이들의 죽음에 침묵했다. 기사거리가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런데 이제 와서 무엇을 확인하겠다고 모인 것일까. 참으로 난감하고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삼성전자가 15일 창사 이래 최초로 반도체 생산 공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조수인 사장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는 벤젠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으며 방사선도 허용기준을 크게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해명했다. 조 사장은 "의혹이 계속되고 있어 1급 기밀에 해당하는 생산 라인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의혹이 완전히 풀릴 거라고 보지는 않지만 향후 지속적으로 작업 환경을 개선해 나갈 것을 약속 드린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이날 공개한 생산 라인은 기흥 공장의 5라인과 S라인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피해자들이 일했던 1라인과, 2라인, 3라인이 전혀 다른 라인으로 바뀌어서 가장 비슷한 5라인을 공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5라인도 작업 환경이 3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견학 시간은 방진복을 입는 시간을 포함해서 15분 남짓, 그것도 100미터 정도 복도를 따라 걷는 정도였고 작업 과정을 가까이서 살펴 볼 수는 없었다. 

지난달 31일 사망한 박지연씨는 근로복지공단 진술서에서 "도금 접착성 검사를 할 때 와이퍼를 245℃의 납에 담그는데 이때 하얀 연기가 코로 흡입돼서 역겹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고도 진술한 바 있다. 박씨가 일했던 온양 공장과 이날 공개된 기흥 공장은 공정이 전혀 다르다는 게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이날 기자들은 검사와 세척 작업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 보거나 웨이퍼가 담긴 박스를 들고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을 마주쳤을 뿐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박씨가 맡았다는 연기는 납이 아니라 송진가루가 타서 나오는 것으로 인체에 무해하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모든 작업장에는 국소 배기 설비가 설치돼 있어서 연기를 직접 들이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고 강조했다. 기자들은 "지금 얼마나 잘 돼 있는가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3년 전 상황이 어땠는지를 설명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복해서 물었지만 정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이날 기자들은 방진복과 모자, 두 겹의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들어갔는데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머리가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불쾌한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작업장 내부는 밝고 깨끗했지만 기계음이 끊이지 않았고 비좁고 덥고 답답했다. 배기 설비가 설치돼 있다고는 하지만 면으로 된 마스크가 화학약품의 흡입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홍보 사진에서 보던 우주복 같은 방진복을 입은 직원은 없었다. 

박씨는 "엑스레이 검사가 가장 비중이 컸는데 10년이 넘은 노후설비라 잠금장치조차 없어 바쁠 때면 설비가 켜져 있는지도 모른 채 문을 열고 작업했던 적도 많았다"고 진술했는데 이날 조 사장은 "인터락을 해제하는 순간 가동이 중단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박씨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박씨는 죽고 없고 작업 라인이 모두 바뀌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이날 견학은 삼성전자가 준비한 관광버스로 출발했는데 피해자 부인인 정아무개씨가 함께 가겠다고 버스에 올라타는 바람에 출발이 지연되기도 했다. 정씨는 "아이 아빠를 부려먹다 죽인 곳을 나에게도 보여달라"고 항의했다. 2005년 숨진 황민웅씨의 부인인 정씨는 "사고 라인도 아닌 전혀 다른 라인과 설비를 보여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라고 반발했으나 강제로 버스에서 끌려 내려갔다. 

사상 최초로 공개됐다고는 하지만 기자들은 피해자들이 어떤 작업을 했는지, 그리고 그게 과연 질병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삼성전자는 두 차례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모든 걸 공개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이 자리에는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따라다니던 홍보팀 관계자는 "직접 보니까 어떻느냐, 정말 깨끗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조수인 사장은 "반도체 라인의 직원이 3만명이 넘는다"면서 "10년 동안 22명이라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왜 산업 재해를 인정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조 사장은 "우리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산재 인정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근로복지공단에서 하는 것"이라면서 "적절한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만 선의로 접근하더라도 다른 의도로 오해될 수 있어 조심스럽다"고 설명했다. 

한 외신 기자는 "일본에서도 1970년 미나마타병이 사회적 논란이 됐는데 일본 정부는 30년이 지난 2000년에서야 이를 인정했다"면서 "삼성전자도 의혹이 해소됐다고 말하지 말고 이제부터 의혹을 해소하는 과정을 시작하겠다고 말하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조 사장은 "향후 필요하다면 다시 역학조사를 하겠다"면서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도 적당한 때 적당한 방법으로 공장을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들 모임인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공유정옥씨는 "반도체 생산 라인이 깨끗한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업무 관련성 논란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다. 공유씨는 "하루 날 잡아서 6시간 측정한 걸 두고 벤젠이 검출되지 않았고 방사선 노출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 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공유씨는 "당연히 지금은 훨씬 개선됐을 거라고 믿지만 5년 전 10년 전에도 지금과 같았을 거라고 주장하는 건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백혈병 피해자들 모임인 반올림은 14일 성명을 내고 "이번 공장 공개는 우리가 요구해 왔던 투명한 정보공개와는 거리가 멀다"면서 "이런 방식으로는 의혹과 불신을 해소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반올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종란 노무사는 "박지연 씨의 사망을 계기로 증폭된 삼성반도체 직업성 암 피해 사실에 대한 언론의 관심과 삼성 내부의 동요를 신속하게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언론은 그동안 왜 이런 의혹에 침묵했을까. 삼성전자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물어봤더니 확인되지도 않은데다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그걸 뭐하러 또 쓰느냐는 반응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기사를 쓰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쓰지 말란다고 해서 안 쓰겠느냐"고 반문했다. 기자들이 알아서 안 쓰는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한 방송사 기자는 "취재는 다 했는데 아마도 천안함 침몰 사고 때문에 뉴스가 안 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기자들은 노골적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작업장을 돌아보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던 한 경제지 기자는 "3년 전에도 지금하고 비슷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 기자는 "삼성전자 가봤더니 정말 깨끗하더라, 의혹이 말끔하게 해소됐다"는 기사를 쓸지도 모른다. 

(미디어오늘 이용호 화백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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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미씨가 삼성전자에 입사한 때가 2003년 10월. 황씨는 기흥공장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했다. 그로부터 2년도 채 안 된 2005년 6월, 황씨는 백혈병 판정을 받는다. 그해 12월 골수이식 수술을 받고 퇴원하지만 1년을 조금 넘기고 결국 세상을 떠난다. 황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택시기사다. 황씨는 병원... Rea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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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ge contains a single entry by 이정환 published on April 15, 2010 6:1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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