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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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벗어나고 싶으면 더 열심히 일하라고 우리는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 그날그날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고 너무 쉽게 체념해왔다. 일찌감치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부터 32년 전 방글라데시 치타공 대학의 무하마드 유누스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그날 먹고 살기에도 힘겨운 사람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다. 가난을 벗어나려면 우선 빚이 없어야 하고 그날그날 먹고 사는 것을 넘어 조금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학 교수였던 그는 가난을 벗어나려면 최소한의 종자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테면 구두닦이는 구두를 닦아서 번 돈의 절반을 구두 통 주인에게 준다. 만약 그가 구두 통 주인이 될 수 있다면 그의 수입은 두 배로 늘어나게 된다. 그는 그날그날 먹고 남는 돈으로 저축까지 할 수 있다. 그게 그가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다.

역설적이지만 열악한 자본주의에 맞서려면 자본가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된다. 가난한 소작농은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마련해야 하고 조그만 가게를 얻어 장사라도 해야 하고 돈이 모이면 송아지나 송아지가 안 되면 닭이라도 한 마리 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날그날 먹고 살기에 허덕일 뿐 영원히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문제는 누가 구두 통이나 손바닥만한 땅이나 조그만 가게나 송아지나 닭을 살 돈을 빌려줄 것이냐다. 유누스가 직접 그라민은행을 설립한 것은 이들에게 누군가가 돈을 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라민은행은 우리 돈으로 3만원이나 5만원 정도를 아무런 담보도 없는 이들에게 빌려줬고 이들은 늘어난 수입의 일부를 쪼개서 빚을 갚아나갔다.

그라민은행은 구두 통이나 손바닥만한 땅이나 조그만 가게나 송아지나 닭을 거저 나눠주지 않고 이것들을 살 수 있는 돈을 빌려주고 빚을 갚아 자기 걸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 실험은 놀랄만큼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기를 쓰고 빚을 갚았다. 대출 상환율은 98%를 넘어섰다.

그라민은행은 이제 2천개 이상의 지점을 거느린 거대 은행으로 성장했고 세계 50여개 나라에서 이 은행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가난을 벗어난 사람들은 기꺼이 이 은행에 예금을 맡겼고 그라민은행은 이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단체가 아니라 당당히 금융기관으로도 자리를 잡게 됐다.

가난 퇴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우리나라를 찾은 그는 기자회견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연체율이 높아져 금방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그라민은행의 32년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마다 프라이빗 뱅킹이나 기업 특화 지점을 개설하는 것처럼 소액금융 전문 지점을 개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가난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라며 “사람들의 인식과 사회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해결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물론 그라민은행이 가난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절망적인 가난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일 수도 있고 그나마 그 성과도 부풀려졌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라민은행이 이 자본주의의 극단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지 않은 대안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자선이 아니라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가 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는 꿈꾼 것만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가난 없는 세상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어야만 이 같은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 그는 몽상가였지만 자본주의의 한계와 정면으로 맞섰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만들어 냈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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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학생인지라 틀릴 수도 있습니다만;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단의 마지막 두 문장의 위치가 서로 바뀌면 좀더 자연스러운 전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 시스템이다." 이렇게요. ㅋ

기자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려니 민망하군요. 항상 좋은 기사 잘 읽고 있습니다 ^^

네. 뭔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마무리가 좀 애매하더라고요. 그렇게 바꾸니까 좀 더 자연스럽네요. 고맙습니다.

자선은 단지 빈곤의 상태를 더 연장시켜줄 뿐이라고 말했던 유누스 박사의 말이 생각나네요! 그라민 은행이 자선기관이 아닌 금융기관이어서 지난 금요일 이대에서 강연이 있은 후 한 교수님이 즉석 모금을 제안했는데, 유누스 박사님이 기부 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기부는 자선단체에 하라시면서 국내 기관을 소개하기까지 하셨었죠...제가 쓴 관련 글도 트랙백 보냅니다.

이제 곧 수능을 칠 수험생이라서 그런지 이런 글을 보면 제목만 봐도 '아, 이 글의 제목은 거시적 관점, 갈등론을 반영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

사회·문화 시간에 배웠던 '생산적 복지'나, 유누스 교수의 '그라민 은행'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식은 굉장히 비슷한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렇게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여러 시도가 이루어지고, 또 그 시도들이 성공하는 것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거죠.

저를 비롯하여 요즘 젊은 세대, 특히 인문학,사회과학에 약한 공학도 출신의 젊은 세대들은.

공학도 출신답게 효율과 경제성, 그리고 합리주의에 스스로가 능통하다고 생각하며 또 매사에 합리적인 사고를 하려고 노력하는 듯 합니다.


문제라면.

"그 실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없이" 자본주의와 자유경제가 고효율, 합리주의의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범주에서 자유롭지는 못하군요 ㅠ.ㅠ 무지해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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