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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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야학 수업을 맡고 2년째인가. 그때 썼던 글이다. 지금과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지만 읽다보면 가슴이 벅차 오르는 문장이 몇개 있다. 무모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던 때다. 많은 시행착오를 쌓아왔지만 그 꿈을 아직 나는 버리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사헌부와 사간원과 홍문관의 차이를 암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직전법이나 관수관급제, 연분9등법 따위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또한 사실상 거의 의미가 없다. 시험이 아니라면 우리는 척준경이나 이자겸 같은 사람들과 완벽하게 무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를 학습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헌부와 사간원과 홍문관 따위 조선 시대의 관료체제를 일별함으로써 그들의 가치관이나 삶의 형태, 사회구조(혹은 그 이미지들)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직전법이나 관수관급제 따위, 그리고 그 변천과정을 살펴보면서 권력과 지배·피재배 관계의 본질을 이론이 아닌 역사적 사례로서 체득할 수 있다. 실제로 기회주의자 혹은 변절자인 척준경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미국이나 일본과 왜 다른지, 지난 10년전과 지금이 왜 다르고 앞으로의 10년이 어떻게 다를 것인지 역사 학습을 통해 우리는 그 판단의 동기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역사 교사는 사헌부와 관수관급제와 척준경만을 가르칠 뿐이다. 잡다한 지식의 습득과 암기를 통해 학습자는 인식의 폭을 스스로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고 체계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습자의 몫이다.

일년여의 역사 수업을 통해 체득한 것은 이러한 단순한 지식의 나열과 암기가 학습의 근간이며 이것들이 곧 사고와 인식의 기본이 된다는 사실이다. 척준경과 이자겸을 모르고서는 고려 초기의 혼란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며 동일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우리의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척준경과 이자겸 뿐만 아니라 묘청이나 연산군이나 정문부나 박팽년이나 개로왕에 대해 학습해야 하는 이유다. 또한 우리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호족과 신진사대부의 공통점,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학습해야 하는 이유다.

야학운동(The People's Education)은 학습이라는 매개를 통해 민중이 자아(주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다. 흔히 교육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공동학습이나 대안 모색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야학운동의 궁극적인 방향은 사회와 시대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변화·발전(진보)에 있다. 우리는(민중은) 배우고 판단하고 참여하고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

야학운동의 테마는 소외의 극복이다. 소외의 극복은 아래에서부터 시작돼야 하지만 우리는 어떤 동료들이 수동적이고 비사회적임을, 패배적이고 자기비하적임을 발견한다. 만약 그 수동성이 교육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지식 습득의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 의사소통의 단절이 과연 인식의 영역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우리는기꺼이 이를 수정해야 한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말이 통하게 해야 한다. 수업이 필요하면 수업을 거쳐야 한다.)

수업은 각자의 설익은 자아와 가치관을 명확히 하기 위한 기초 지식과 논리의 확립이다. 변혁은 어설픈 논리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운동가는 섣부른 구호만으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야학에서 수업에 충실한다는 것은 사실 검정고시와 아무런 상관 관계도 없다. 물론 수업을 착실히 밟아나간다면 검정고시 따위는 합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사회에 대해 혹은 신자유주의나 여러가지 모습으로 혼재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권력과 차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외와 단절을 극복하고 역사와 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번째 작업이 우리에게는 수업이다. 효율적인 수업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세미나나 공동학습이나 그밖의 어떤 작업들도 공허하고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수업은 이제 운동이 되어야 한다.
민중은 현상에 대해 학습하고 판단을 내리고 서로와 의견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사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모두가 희망하는 대로 사회는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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